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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726
성명
한자 安元奎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2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6년 와이파후공동회(共同會) 회장(會長), 1907년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부회장(副會長), 1909년 국민회(國民會)의 발기인, 1910년 대한공진단(大韓共進團)의 재무, 1910년에 조직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 지방총회(地方總會)에서 총회장(總會長) 등 1914년 국민군단(國民軍團)재원조달(財源調達) 책임자(責任者), 1922년 하와이 교민단(僑民團) 부단장(副團長), 1936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장(總會長), 1941. 해외(海外) 한족대회의장(韓族大會議長), 1943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의사장(議事長), 1944년 주미외교위원회(駐美外交委員會) 위원(委員) 등을 역임(歷任)하며 일평생(一平生) 독립운동(獨立運動)헌신(獻身)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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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대한제국 말기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건너와서 1906년 3월 하와이 오하우지방의 와이파후 농장에서 환난상구(患難相救)와 일화배척(日貨排斥)을 목적으로 공동회(共同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동포들의 자치생활을 지도하였다. 그 후 1907년 9월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서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자 동 대회에 참석하여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조국의 국권 회복과 한인동포들의 안녕 보장, 민족교육 장려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 후 1908년 11월 미 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통합하여 미주 전역의 유일한 한인민족운동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발기인 모임에 한인합성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909년 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년 7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부회장을 역임한 데 이어 1910년 4월에는 동회(同會)의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지방총회를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10년 7월 일제의 한국 강점이 현실화되자, 하와이 각 지방 대표자들을 호놀룰루에 소집시켜 대동공진단(大同共進團)을 조직하고 재무로 선임되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와 연서로 일본 왕에게 일제의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한을 발송하는 한편, 국권회복을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14년 6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연무부(演武部) 사업을 후원하기 위해 박종수(朴種洙)와 함께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 지방에 있던 약 1,500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을 기부하여 박용만(朴容萬)을 단장으로 하는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의 창립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러나 1915년부터 하와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던 이승만이 1921년 3월 하와이 국민회를 해산시키고 1922년 3월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거류민단령(臨時居留民團令)에 의하여 하와이 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을 조직하자,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하와이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분열된 한인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1933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을 해체하고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여 분열된 한인사회를 수습하게 되자, 1936년 1월 부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국민부담금제도를 통해 국민회의 채무를 청산하는 한편, 혈성금제도(血誠金制度)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상비를 조달하였으며, 노인 동포의 노후를 위하여 호상부제도를 실시하는 등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사실상 부흥시켰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동 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는 한편,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議事部)가 설치되자,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한편,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한후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11월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위원을 새로이 선임하자,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된 데 이어 이듬해인 1946년 1월에도 재차 총회장에 당선되는 등 40여 년간 조국의 독립과 하와이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연감 13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66, 672면
  • 일체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3권 530, 802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27, 851, 858면
  • 포와조선인사정(재호놀룰루제국총영사관) 987, 98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0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02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37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489, 523, 662, 665, 667~669, 706, 707, 709, 710, 770, 798, 801, 830, 831, 834, 835, 84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493, 89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안원규 - 경기 파주 -
본문
1877년 8월 30일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임진면(臨津面) 문산리(文山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문학(安文岳)과 어머니 정씨의 2남 1녀 중 장남이다. 1903년 미국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가 감리교 전도사로 활동하였다.1906년 3월 10일 하와이(Hawaii) 오하우지방의 와이파후 농장에서 공동회(共同會)를 조직하였다. 와이파후공동회는 국내의 반일애국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오하우지방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초기 하와이 1세대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이다. 주로 어려움이 처했을 때 서로 돕고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일본물품 배척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 동포들의 자치 생활을 지도하고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1903년 이후 정치색을 띤 독립운동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하와이 각 지방에는 1907년 경 20여개 이상의 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2월 15일 재미 한인들은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들을 하나로 모아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자신 해산 후 조직적이고 총괄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위한 합동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9월 2일, 24개의 한인 단체 대표 30명이 호놀룰루(Honolulu)에 모여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조직하였다. 한인합성협회는 4개조의 합동결의안을 채택하였는데 네 번째 조항으로 기관지 『합성신보』를 발간하기로 하였다. 기존 각 단체들이 발행하던 회보들을 『합성신보』로 통합하여 실력을 집중하고 언론을 일치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들의 권익 향상과 일상적 안녕을 보장하고 민족교육을 장려하면서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직 후 1년여 동안 47개 지역에 지회가 설립되어 천여 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1908년에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미국인 스티븐스(D).(W). (Stevens) 저격 의거를 계기로 재미한인단체들은 재차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미주 전역을 통할하는 유일한 한인민족운동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의 통합이 논의되었다. 이때 한인합성협회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논의에 참여하여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가 통합 창립되었다. 이듬해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까지 국민회와 합동하면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출범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두고,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로 조직 구성을 갖추었다. 1909년 2월 하와이 지방총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 4월에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이끌었다.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이 현실화 되자, 7월경 하와이 각 지방 대표자들을 호놀룰루에 소집시켜 대동공진단(大同共進團)을 조직하였다. 대동공진단은 하와이에서 무예연습과 군사훈련을 통해 군인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군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여 대동공진단이 무장항일운동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대동공진단의 재무로 선임되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와 함께 일왕에게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하였다.1914년 6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무장항일투쟁을 위해 준비하던 연무부(演武部) 사업을 후원하기 위해 박종수(朴種洙)와 함께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 지방에 있던 약 1,500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을 기부하였다. 이에 박용만(朴容萬)을 단장으로 하여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이 창립될 수 있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항일무장투쟁을 대비하여 독립군 부대의 지휘관 양성을 위한 군사 교육 단체로서 기능하였다.1915년부터 하와이 한인 단체들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던 이승만(李承晩)이 1921년 3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해산시켰다. 이어 1922년 3월 22일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거류민단령(臨時居留民團令)을 따라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부회장으로서 하와이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한인사회 통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대한인교민단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 예속되어 이승만의 지도를 따라 임시정부에 보내는 군자금인 인구세(人口稅)도 구미위원부로 보냈다. 1922년 6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키자 이에 대한 항의서를 발송하고 1925년 3월 의정원에서 이승만의 탄핵안을 통과시켰을 때에는 임시정부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1929년 11월 국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정책이 가혹해지자 다시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였다.1933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이 해체되고 하와이에 대한인국민회가 재건되었다. 1936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분열된 한인사회를 수습하고 조직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여러 활동에나섰다. 우선 국민부담금제도를 통해 대한인국민회의 채무를 청산하였고, 혈성금제도를 실시하여 임시정부의 경상비를 조달하였다. 또한 노인 동포의 노후를 위하여 호상부제도를 실시하는 등 한인들의 자치를 위한 제도들을 만들어 나갔다.1939년에 들어서자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중국 내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하는 등 큰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는 1940년 9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등의 대표자들이 모여 시국 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 지역 한인 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장으로서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고, 독립전선 통일문제, 임시정부의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 여러 사안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서 8월 미주 지역 모든 단체들의 통합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議事部)가 설치되었다. 이때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사업과 외교, 선전 활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 사무를 처리하였다. 이러한 일로 분쟁이 생기자 임시정부에서는 11월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위원을 새롭게 선임하였다. 이때 위원부의 외교위원으로 선임되어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힘썼다. 그 후 1945년과 1946년 연속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더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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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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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형물 항일독립운동기념비 경기도 파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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