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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718
성명
한자 宋憲澍
이명 宋憲柱, 宋憲樹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5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구한말 왕립영어학교(王立英語學校)를 졸업하고 1904년경 도미(渡美)하여 한인상조회장(韓人相助會長)과 목사로 활동하다가 1907년 버어지니아주의 Roanoke 대학에 입학한 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였고 이후 1919년 미국(美國)에서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部)) 위원(委員)으로 하와이 등지에서 애국공채를 발매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34년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로스엔젤레스 재무부(財務部) 주미(駐美) 제 4행서(行署) 재무위원(財務委員)으로 활동하였으며 1936년에는 북미대한인국민회(北美大韓人國民會)를 부흥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여 총회관 건축위원에 선임되었고 1939, 1944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장(總會長), 1941년 재미한족연합회(在美韓族聯合會) 집행부(執行部) 위원(委員), 1942년 한인경위대(韓人警衛隊) 외교과(外交科) 정위(正尉), 1944년 주미(駐美) 외교위원부(外交委員部) 위원(委員), 1945년 상항연합국회의(桑港聯合國會議)에 참석할 대표단(代表團) 대표(代表)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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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기도 고양(高陽) 사람이다.

구한말 관립 영어학교(英語學校)를 졸업한 뒤, 1904년경 하와이로 건너와서 1905년 하와이섬 고할라 지역에서 목사로서 「교회월보」를 발행하는 한편, 동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지역 각 지방 한인들을 규합하여 한인상조회(韓人相助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 동포들의 자치생활을 지도하였다. 그 후 미 본토로 건너온 그는 1907년 버지니아주 로아녹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07년 7월 초순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의 밀사를 돕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건너가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다가 1908년 3월 다시 뉴욕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1910년 다시 로아녹대학에 복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뉴저지주의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19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李承晩)이 조직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920년 6월 하와이로 파견된 그는 애국공채(愛國公債)를 발매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을 후원하였다. 또한 이승만과 함께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교사이자 목사로 활동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상임위원회에서 로스앤젤레스 재무부(財務部) 주미(駐美) 제4행서(行署) 재무위원(財務委員)으로 선임된 그는 중국 항주(杭州)로 이전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애국의연금(愛國義捐金)을 모집·송금하기도 하였다.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代表者會議)에 참석하여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재건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이 때 대한인국민회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추진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어 1938년 4월 총회관을 낙성하는데 헌신하였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에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북미 대한인국민회 임원들과 함께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자,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자, 1942년 2월 자원하여 한인경위대(韓人警衛隊) 외교과(外交科) 정위(正尉)로 임명되어 매주 군사훈련을 받으며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다. 또한 동년 10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 이사로서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의 권유에 따라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란 비망록을 발간하여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활동을 전개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11월 새로이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위원을 선임하자, 외교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1944년 1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1945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평화를 준비하기 위해 개최된 연합국회의(聯合國會議)에 파견할 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하는 등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학사학위(Roanoke 대학), 석사학위와 박사 수료 증명(Princeton 대학)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121․129․378․387․437․43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634․635․102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560․563․679․680․684․819․824․835․847~850․858․951면
  • 신한민보(1942. 3. 5)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9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7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3권 36, 561, 817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5권 138, 139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33, 827, 851, 855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12, 84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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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송헌주 송헌수(宋憲樹), 송헌위(宋憲尉), 송헌주(宋憲柱) 경기 고양(高陽) 한인경위대의 현기식
본문
1880년 10월 22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공덕리(孔德里, 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부친 송득인(宋得仁)과 창녕 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송헌수(宋憲樹)·송헌위(宋憲尉)를 사용하였으며, 한자가 다른 송헌주(宋憲柱)를 쓰기도 하였다.1890년대 후반 신학문 교육기관인 관립 영어학교를 다녔다. 1899년 11월 해고된 교사 허치슨(W. F. du. Hutchison)을 재고용하라는 요구를 하며 영어학교 학생들과 함께 항의 투쟁을 하다가 11명의 학생들과 함께 퇴학당하였다. 그 후 1900년 3월 허물을 뉘우친다는 청원으로 다시 복교하였다. 그런데 1903년 2월 제1회 졸업식 때 4명의 졸업생 명단에 이름이 없고 이후의 행적으로 보아 영어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1년 2월 15일자로 농상공부 통신사(通信司) 전화과(電話課)의 주사로 임명되었다가 그 다음 날 2월 16일자로 사임한 것이 확인된다.1902년 하와이 노동 이민 모집 광고가 나오자 하와이 이민회사의 통역 겸 사무원의 신분으로 1903년 하와이 이민을 단행하였다. 이민 초반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협회 사무직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한인학교 설립에 역점을 두고 1905년 5월 7일 하와이 감리교회 감리사 와드만(John W. Wadman)의 집에서 남학생 기숙학교 설립을 준비하였다. 7월 해관 통역 박윤섭(朴允燮)을 비롯한 한인들과 한인교육회를 설립하고 와드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하와이 한인들의 단결과 상호부조를 위해 1905년 8월 24일 호놀룰루 한인예배당에서 한인상조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05년 12월 28일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하와이 감리교연회에서 『포와한인교보』의 발행인으로 선임되었고 주필은 윤병구에 이어 민찬호가 맡았다.1906년 4월 하와이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1907년 6월 버지니아주 세일럼(Salem)에 위치한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초순 고종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의 밀사를 돕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자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그해 9월 헤이그로 돌아가 이준(李儁)의 장례식을 치르고, 5개월간 유럽 각지를 이동하며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1908년 2월 다시 뉴욕으로 복귀하였으며, 1910년 로녹대학에 복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이듬해 뉴저지주의 프린스턴대학(Princeton University)에 입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1916년 3월 하와이 한인감리교회의 부름으로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으로 초빙되어 호놀룰루로 가게 된다. 1917년 한인중앙학원 교장직을 사임하고 이승만(李承晩)이 운영하던 한인여학원의 부교장으로 옮겼다. 1918년 7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교인들과 함께 신립교회를 설립하고, 그해 12월 교회 명칭을 한인기독교회라고 하였다.1919년 국내의 만세운동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해졌다. 이에 영향을 받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독립운동비모금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때 위원장에 임명되어 독립의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종관(李鍾寬), 총재무 김영우와 함께 ‘대한독립운동비 제1차 의연금증서’를 제작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9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 동안 3,620명이 참가해 33,050달러 35센트를 모금하였다.그해 8월 이승만이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립하자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8월말 하와이에서 출발하여 9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한 뒤, 워싱턴으로 이동하며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6월 워싱턴을 떠나 7월 6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구미위원부에서 해임되었다. 8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8월 11일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중가주 리들리로 옮겨 정착하였다.1921년 10월 30일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에서 윤병구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국내의 기근을 돕기 위해 임시조국동포구제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2월 17일 1차 구휼금 500달러를 서울에 있는 조선기근구제회 회장 이상재(李商在)에게 송금하였다. 이어서 2차 구휼금 683달러를 1925년 5월 7일자로 송금하였다.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뒤 하와이 이민 초기 때부터 역점을 두었던 교육 사업에 힘썼다. 1929년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들이 나성국어학교를 후원하기 위해 9명의 국어학교 교육위원을 선출할 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2월 5일 나성공동회 교육부를 조직하고 신임 교육부장에 선출되었으며, 후원금 292.50달러를 모금하였다. 교육부장으로서 같은 해 3월 10일 나성국어학교 학부형회의 초청을 받아 강연하고 그해 7월 나성국어학교 기숙사 건립을 위해 20달러를 기부하였다.1929년 말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자 미주 한인사회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국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한 방안으로 한인공동회가 뉴욕, 시카고, 중가주(리들리, 중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각각 설립되었다. 1930년 1월 30일 김종림(金宗林)·박재형(朴在炯) 등과 함께 27명의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여 나성한인공동회를 설립하였다. 설립 목적으로 한국독립운동을 협조, 나성한인사회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에 두었고 임원진은 위원장에 김종림, 서기 곽임대(郭臨大), 재무 박재형이었다. 이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가 곧 위원장이 되었다. 나성한인공동회는 3·1절 행사를 거행하고 거둔 독립의연금을 국내 학생 독립운동의 후원금으로 지원하였다.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미주 한인사회에는 독립을 위해 연합전선을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중가주 한인공동회가 대한인국민회에 연합을 제의하였고 여러 단체들이 참여하여 그해 12월 7일 미주한인연합회를 발기하였다. 이때 나성한인공동회 대표로 참가하여 임시정부로 역량을 집중하여 독립운동을 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한인연합회는 집행부와 입법부, 그리고 전체 회의를 위한 대표회로 구성되었는데, 집행부의 사무장에 선임되어 한인연합회를 책임지며 이끌었다.193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부 주미 제4행서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재무위원으로서 애국의연금(愛國義捐金)을 모집·송금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1936년 5월에는 분열된 북미 지역 한인민족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하여 각 지방의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미주 한인의 항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이렇게 다시 대한인국민회가 북미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 되기 시작하자 총회관을 로스앤젤레스로 옮기고 총회관을 신축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를 위해 건축준비위원회가 꾸려 졌으며 이때 건축준비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위원장으로서 건축의연금 200달러를 기부하는 등 총회관 건축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1939년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시국대책을 강구할 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를 통해 미주 내 모든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었으며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 일명 맹호군(猛虎軍)을 편성하였다. 1942년 2월 자원하여 한인국방경위대의 외교과(外交科) 정위(正尉)로 임명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고자 매주 군사훈련을 받으며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다. 또한 10월에는 미국 정부 전략청(戰略廳)의 권유에 따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기획연구부 이사로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n and Pacific War)』란 비망록을 발간하였다.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개설하고 외교 사무를 보았다. 이 같은 분쟁으로 임시정부는 1944년 11월 새롭게 구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를 설치하였고, 이때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44년 1월에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1945년 4월 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평화를 준비하기 위해 개최된 연합국회의(聯合國會議)에 대표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대표로 선임되어 외교활동을 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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