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대구(大邱) 사람이다.
1906년 4월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渡美)하여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고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공립협회(共立協會)의 회원인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재무(財務)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과정을 '독립재판(獨立裁判)'으로 전개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 장래에 동량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해 홍 언(洪焉) 등 8명의 창립발기위원과 함께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는 한편, 후일 흥사단 이사부장을 역임하였다. 1917년 1월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北美實業株式會社)를 조직하고 주금(株金) 9만 5천 달러를 모집하여 쌀농사를 지어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27년 문을 닫고 말았다. 또한 1932년 1월 재차 흥업회사(興業會社)를 조직하여 재원 확보에 노력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재무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송금하는 한편,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 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代表者會議)에 참석한 그는 각 단체를 통합해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조직하는 한편,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또한 회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추진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어 1938년 4월 총회관을 낙성하는데 헌신하였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그를 비롯한 북미 대한인국민회 임원들은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자, 한시대(韓始大) 등과 함께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동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여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가 설치되자,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1941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부의장, 1943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겸 재무로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한 후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 해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 대표원으로 참석한 그는 개조된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그 해 10월 조국의 재건을 후원할 목적으로 구성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在美韓族國內派遣代表團)의 재무로 선임되어 고국을 떠나온 지 40여년 만에 조국의 땅을 밟았으나, 당시 해방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8개월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121·436∼43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563·679∼681·711·715·716·835·847·848·851면
- 신한민보(1942. 1. 1, 3. 19, 1943. 9. 30)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2권 148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50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71·672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