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709
성명
한자 白一圭
이명 白允祖, 白日奎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7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0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7. 3월 미국(美國)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조직하고 1908년 (頃)까지 『대동공보(大東公報)』를 발행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 양의사(兩義士) 후원회장(後援會長)을 맡아 재판을 후원하였고 1909년 박용만(朴容萬)과 함께 네브라스카 주에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였고 1914년과 1918~1934년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主筆)및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파견을 결정하고 경비조달을 위한 모금운동에 관여하였고 1919. 4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장(中央總會長)으로 미주본토, 하와이, 멕시코의 독립운동을 총지휘하였으며 1920년 『한국경제사(韓國經濟史)』를 저술간행하여 교포 자제들의 민족 교육(民族敎育) 교재(敎材)로 활용토록 하였으며 1926~1933년 북미대한인국민회(北美大韓人國民會) 총회장(總會長)으로 활동하였고 1934. 1월부터 1936년까지 임시정부 샌프란시스코 제3행서(行署) 재무위원(財務委員)으로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송금하였으며 1939년 조선의용군 후원회(朝鮮義勇軍後援會) 조직에 참가하고 『독립』지의 발기인과 1945. 6월 동지(同誌)의 사장 겸 총무(總務)활동(活動)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1907년 이래 미주 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등 한인사회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백일규는 1907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이병호·문양목(文讓穆) 등과 함께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미주 한인사회의 단결과 민지계발(民智啓發)을 목적한 단체로「대동공보(大同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지방지회를 조직하면서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08년 1월 대동보국회의 회장 겸「대동공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등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한국 침략을 찬양하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하는 의거로 미국법정에 서게 되자, 그는 공립협회와 합동으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후원비를 모아 이들 의사를 지원하는 구제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09년 6월 박용만(朴容萬)이 네브라스카에 독립군간부를 육성하기 위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할 때, 이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의 동량을 길러내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1910년 5월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에 합류하게 되자, 1912년 대한인국민회의 부회장에 피선되어 활약하는 한편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학업을 닦기도 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로의 합동과 더불어 기존의「공립신보(共立申報)」와「대동공보」도 병합하여「신한민보(新韓民報)」로 개편되었는데, 그는 1914년 7월부터「신한민보」의 주필 및 편집을 담당하며 항일언론을 주관하였다. 그는 1918∼1934년 동안에도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차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변화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고자 1918년 대한인국민회가 파리강화회의와 뉴욕에서 열리는 소약속국동맹회의(小弱屬國同盟會議)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이에 필요한 자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에는 도산 안창호가 임시정부에 참가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로 떠나자, 그 뒤를 이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취임하여 미주본토·하와이·멕시코 등지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해 갔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30만달러의 애국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애국금 수합을 위한 선전물을 미주한인사회에 배포하는 등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한편 1918년 캘리포니아대학 경제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경제사에 깊은 연구를 진행하여 1920년 {한국경제사}라는 책을 간행하였는데, 박용만의 {군인수지(軍人須知)},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더불어 미주 한인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한 1926년부터 1933년까지 8년여 동안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방 조직을 확대하며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1934년 1월부터 1936년까지 임시정부의 샌프란시스코 재무위원을 맡아 한인들을 대상으로 인구세와 애국의연금 등 군자금을 모집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39년에는 미주지역 한인들 가운데 진보적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의용대후원회(朝鮮義勇隊後援會)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지지세력들이 주도하여 창간한 신문「독립」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1945년 6월 「독립」의 사장 겸 총무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그는 1946년부터 2년 동안 하와이에서「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509·560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2輯 293·294面
  •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39面
  • 在美3·1運動 總司令官 白一圭의 鬪爭一生(方善柱, 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347∼1360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8輯 486·502·504·517·545·557·572·628·661·674·684·685·759·760·761·764面
  •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26·32·119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731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2卷 828面
  •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624·733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812·842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401面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5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23·631·633·634·635·65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372面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32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백일규 백일규(白日奎), 백윤조(白允祖) 평남 증산(甑山) -
본문
1880년 (음)3월 11일 평안남도 증산군(甑山郡) 성도면(聖陶面) 오화리(五和里)에서 태어났다. 백인(白麟)과 송씨(宋氏)의 둘째 아들로, 형은 백낙조(白樂祖)이다. 백윤조(白允祖)가 본명이었으나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백일규로 개명하였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백일규(白日奎)를 사용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청년시절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로 활동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의 실패와 함께 현실을 타개할 방안을 찾던 중 증산에서 공립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강명화(姜明化)가 하와이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따라 가기로 결심하였다.1905년 5월, 강명화(姜明化)의 가족과 평양의 황마리아 가족, 박재형(朴在炯) 등과 함께 진남포(鎭南浦)를 떠나 하와이로 갔다. 이들은 하와이에 도착하여 호놀룰루(Honolulu) 인근의 에와(Ewa)농장에서 사탕수수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매일 10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원명(鄭元明)·윤병구(尹炳球) 등이 조직한 에와친목회에 가입하여 일본 화폐 배척운동을 전개하였고, 1906년에는 서기를 맡았다. 이때 신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5월부터 『친목회보』를 발간하였다.1906년 8월, 학업을 위해 하와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고 이즈음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907년 1월 문양목(文讓穆)·장경(張景)·방사겸(方四兼) 등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대동보국회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성격의 애국단체로 인민교육의 확장, 인민실업의 흥기, 인민자치의 창설을 3대 강령으로 내세우고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더불어 기관지로 『대동공보(大同公報)』를 발간하였다.1908년 대동보국회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문양목의 뒤를 이어 『대동공보』의 주필 겸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이때 『대동공보』를 통해 국내 의병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논설을 썼으며, 박용만(朴容萬)이 덴버(Denver)에서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할 때 한인들의 참가를 독려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다.1908년 3월 23일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이 스티븐스(D.W.Stevens)를 처단하고 체포되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인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관하였고, 여기서 두 사람의 재판 후원을 위해 재판정권위원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한인공동회에 참여한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 인사들과 함께 전 미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특별의연금을 거두어 두 사람의 재판에 보탰다. 재판이 마무리 되던 12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신흥우를 만나 잡지 『자유보』 창간호를 발간하였다.1909년 『자유보』는 창간되자마자 중단되었고, 학업을 위해 9월 네브라스카(Nebraska)로 이주하여 헤이스팅스공립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년 6월에는 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대학(Hasting College)에 유학 중이던 박용만이 정한경(鄭翰景) 등과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의 수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 미국에 와있는 한인 학생들은 학생 조직의 결집을 위해 헤이스팅스대학에서 한인학생대회를 개최하였다. 1913년 6월에 열린 이 회의를 통해 학생 대표들은 한인학생동맹을 결성하고 『한인학생평론(The Korean Student’s Review)』라는 영문 잡지를 창간하였고, 이때 발행인을 맡았다.1914년 7월 『신한민보』의 주필 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의 요청으로 주필을 맡게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게 된지 6개월 여 만인 1915년 1월 사임하고 버클리(Berkeley)의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18년 5월에 졸업하였다.학업을 지속하면서도 1916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1917년 북미지방총회 부회장과 대의원회 의장, 1918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 겸 중앙총회 대표원 의장을 맡아 활동하였다.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 하고, 미 대통령 윌슨(W. Wilson)의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하자 미주 한인들은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이에 미주 한인들은 파리강화회의와 뉴욕에서 열리는 소약국(小弱國)동맹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고, 이를 위한 자금 모집에 나섰다.1919년 1월 홍언(洪焉)의 후임으로 다시 『신한민보』 주필이 되었다. 3월 9일 현순(玄楯)이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전보를 보내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열고 독립선언 이후 재미 한인들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독립의연 모집 규정’과 ‘인구 등록 규정’을 반포하여 미주 한인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외교부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두고, 서재필(徐載弼)을 외교 고문으로 선임하여 한국통신부 활동을 후원하였다. 그해 4월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상하이(上海)로 떠나자 중앙총회장 대리를 맡아, 미국과 영국 등 4개국 정부 수반과 대사에게 한국 독립 후원을 요청하는 공첩을 발송하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신한민보』에 「한국경제의 역사」를 연재하였고, 이 글을 모아 1920년 2월 8일 『한국경제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미주 한인 학교의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1919년 9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선거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나 1920년 1월 사임하였다. 1921년 3월 김현구(金鉉九)·강영승(康永昇)과 함께 『신한민보』의 명예기자로 선임되었고, 1923년에는 다시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았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미주 한인들의 경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동아일보사가 해외동포 위문금을 보내주기도 하였는데, 이때 이대위(李大爲) 등과 위문금 처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 대한인국민회 서기에 보임되었고, 1924년부터 1925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최진하(崔鎭河)를 도와 법무원과 학무원으로 활동하였다.1926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이 되었고, 1935년 3월까지 총회장을 맡아 어려운 시기의 미주 지역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1928년 6월 대한인국민회를 지켜온 이대위 목사가 사망하자, 장례집행위원이 되어 장례 의연금을 모아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각지의 한인대표들과 함께 ‘내지학생운동응원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11월에는 분열된 미주 한인 사회를 통합하고 임시정부로 독립운동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자는 기치 하에 나성한인공동회(羅城韓人共同會, 현 로스엔젤레스)와 중가주한인공동회, 묵경한인청년회(墨京韓人靑年會, 현 멕시코시티)를 합쳐 미주한인연합회를 발기하고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미주한인연합회를 통한 한인사회 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3년 3월 18일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총회가 미주한인연합회를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일 김규식(金奎植)이 미국에 오면서 대한인국민회는 한국대일전선동맹에 가입한다는 이유로 미주한인연합회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는 미주한인연합회 창설을 주도한 입장에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미국 내 진보적 성격의 한인 유학생들의 입장에 동조하고 그들을 지원하자 보수적인 대한인국민회 내 인물들의 견제도 받았다.결국 1935년 3월, 총회장에서 사임하고 대한인국민회 활동에서 물러나 캔자스시티(Kansas City)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동양식품점을 운영하였다. 1942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고, 그해 12월 북미대한인국민회 대표대회 나성지방회 대표원으로 참가하였으나 곧 사퇴하였다. 1943년 10월 6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북미총지부 기관지 『독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5년 6월 사장 겸 주필, 총무로 활동하였다.광복 후 1947년 1월에서 1949년 2월까지 하와이에서 『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중앙감찰위원을 지내면서 『신한민보』에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과 화합을 위한 글을 기고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바로가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백일규(관리번호:73709)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