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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682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金慶
이명 金炳俊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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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7 훈격 애국장
1904년 미국(美國) 시카고시로 망명하여 1910년경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하며, 1920년대에는 공동회(共同會)에서 모은 자금 미화2백달러를 임정자금으로 지원한 사실이 있고, 1934.8.23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회의(國務會議)에서 재무부(財務部) 주미제육행서(駐美第六行署) 재무위원(財務委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0월 8일 재미교포로부터 징수되는 인구세와 애국의연금을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송금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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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평남 순천(順川) 사람이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지방회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식당을 경영하던 김경은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국민회(國民會)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탄생한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미주 지역 한인사회의 결집을 도모하면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0년대 말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로부터 임시정부가 재정상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는 편지를 받고, 시카고에 있는 동포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는 한편 자금모집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그는 공동회(共同會)에서 모은 미화 200달러를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역 특성상 교민사회의 자치 및 단합을 도모하는 한편 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는 1934년 8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재무부 주미제6행서(駐美第6行署)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재미교포로부터 징수되는 인구세(人口稅)와 애국의연금(愛國義捐金)을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송금하는 등 지속적으로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2輯 293·29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634·635面
  • 白凡逸志(金九, 敎文社) 232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842·843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509·510面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63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경 초명 : 김병준(金炳俊), 영어명 : 버나드 김(K. Bernard Kim) 평안남도 순천(順川) -
본문
1888년 1월 28일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순천면 서변리(西邊里)에서 출생하였다. 초명은 병준(炳俊)이었다. 정한경(鄭翰景)·박용만(朴容萬)과 동문수학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순천 시무학교(時務學校)에서 영어를 학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며, 오리건주 포틀랜드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군사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퇴학하였다. 후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는 이대위(李大爲) 목사가 포틀랜드중학교 동급생이었다. 1907년경 시카고로 이주하여 백인 식당에서 일하다가 1913년 지배인이 되어 식당을 발전시켜 1920년 5월부터 식당을 직접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당시 박용만이 주도하여 설립한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의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에서 정한경(鄭翰景)과 함께 생도로 활동하였다. 이즈음 이름을 김경(金慶)으로 개명하였다. 영어 이름은 버나드(K. Bernard Kim)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를 비판하고 국민유신단을 조직하기도 하였으나, 1918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시카고지방회 설립 청원에 참여하여 총무직을 맡았으며, 이후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김창준(金昌俊) 목사를 담임으로 한 시카고 한인교회의 설립에 앞장서 이사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8년 7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출신의 성악가이자 작곡가로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졸업생인 임배세(林培世)와 결혼하였다. 이때 미국인 부인과 사이에 조셉과 제롬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한국 여인과 결혼하려고 이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9년에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재정난에 봉착하자 시카고 동포 모금 위원장이 되어 김구(金九)에게 219달러를 보냈다. 1929년 9월 신혼여행을 겸하여 부부가 귀국하여 부친을 뵙고 12월 다시 미국에 돌아왔다. 1930년에는 한미무역회사를 세워 한국의 미술품과 공업품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시카고에서 경영한 워싱턴 카페테리아는 1931년 당시 자본금 3만 달러였으며, 고용된 41명 가운데 한국인이 11명이었고, 1930년 총수입이 13만 달러를 넘어섰다. 또 김배상회는 3만 달러를 자본금으로 한 회사였는데, 한미무역회사로 불리었다. 김경은 시카고 한인 사회뿐 아니라 재미 한인 사회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업가였다. 대한인국민회와 신한민보사, 샌프란시스코 등지 교회 설립, 동포들의 장례, 유학생회 등에도 기부를 많이 하였으며, 1932년에는 조선여자대학, 즉 이화여자전문학교에 300달러를 기부하기도 하였다. 1933년 미국을 방문한 김규식(金奎植)의 중한민중동맹에도 참여하며 지원하였다. 1934년 8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시카고에 재무부 주미제6행서(駐美第6行署)를 설치하고 재무위원으로 선임하였다. 1933~1934년 개최된 시카고 세계박람회의 중국관에 중국인들과 함께 투자하였으나, 그해 중서부의 농사가 가뭄으로 흉작이 되면서 농부들의 관람이 크게 줄어 약 20만 달러의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1938년 8월경 뉴욕으로 이주한 후 잠시 조극(趙克)과 양식당을 경영하였다가 1940년 1월 매각한 후 부동산 등 여러 사업을 경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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