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제자로서 양정(養正)·배재(培材)·보성(普成)중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1906~7년경 계몽운동단체인 자강회(自强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망명 출국하여 중국 지역을 순유(巡遊)하다가 1909년 4월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하였다. 1910년 가을 박용만(朴容萬)이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 지역에 설립한 군사사관학교인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少年兵學校)에 입학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수련하였으며, 졸업 후 소년병학교 중견 간부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18년 6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대학에서 정치와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19년 1월에는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임명을 받아 동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이 되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년 1월 25일부터 오하이오 콜럼버스대학의 한인학생회에서 발행한 「소년한국(young korea)」을 집필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또한 1920년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법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학생총회결성발기자회(學生總會結成發起者會)에 샌프란시스코지방 학생대표로 참석하여 미주 각 지방에 산재한 한인 학생과 학생회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전미학생월보(全美學生月報)」 편집인이 되어 미주 한인 유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단합에 정열을 쏟았다. 한편, 1918년 7월 박용만이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조직한 갈리히연합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하였으며, 1919년 3월 국내와 원동(遠東)의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목적으로 박용만이 결성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동년 5월 박용만이 중국 북경(北京)으로 가 원동의 군사단체들과 연락하여 1921년 4월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자, 하와이 대조선독립단 대표로 통첩문에 참여하는 등 군사통일회의 운동자금을 적극 조달·후원하였다. 그 후 1927년 4월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본인의 명의로 '독립운동8개년계획(獨立運動八個年計劃)'을 발표하는 등 1929년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1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에 입단하여 서기와 재무 및 동기관지 「국민보(國民報)」 주필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월 이승만 중심의 독재체제를 몰아내고 민족운동에 전념할 하와이 한인단체를 건설하고자 투쟁하였다. 특히 이승만이 1925년부터 추진해 오던 동지촌(同志村) 건설의 실패와 동지식산주식회사(同志殖産株式會社)의 몰락으로 동지회가 재정난에 빠져 교회재산과 교민단의 회관을 매각하여 이에 충당하려고 하였을 때, 김원용 등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저지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으로부터 테러습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1932년 1월 이승만 일파를 축출하고 교민단을 변경하여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복설(復設)하여 하와이 한인단체의 통합기구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우는 등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동년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 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특무공작을 후원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결성된 하와이애국단에 가입하여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거사를 적극 후원하여 김 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임명으로 재차 대한인국민회 서기와 재무, 그리고 동 기관지인 「국민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한인 교포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자, 안원규(安元奎) 등과 함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동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여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議事部)가 설치되자,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그 뒤 1944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 단체가 개최한 대표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인 1951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자서전(自敍傳)』을 비롯해 이른바 '삼만전'으로 알려진 『우남이승만전(雩南李承晩傳)』, 『우성박용만전(又醒朴容萬傳)』, 『검은정순만전(儉隱鄭淳萬傳)』 등을 저술하여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기여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269·270면
- 재발굴한국독립운동사(한국일보사, 1988) 제ⅲ권 27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434면
- 한민족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438면
- 재미한인의 독립운동(방선주) 42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96·9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68~673면
- 고등경찰관계년표(총독부경무국) 220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132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38·139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