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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73676
성명
한자 金鉉九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최익현(崔益鉉)의 제자로 1906,7년경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회원으로 활동하다 1909년경 박용만(朴容萬)을 찾아 도미(渡美)하여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의 중견간부로 국문을 가르쳤고 1921. 4. 27 북경(北京)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에서 작성한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에 하와이 독립단 대표로 연명날인하였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워싱턴시에 본거지를 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대표(代表)활동(活動)하면서 1927. 4. 10 독립운동 8개년 계획(獨立運動八個年計劃)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1930년경(年頃)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의 회장으로 군자금을 임정에 보내어 윤봉길과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지원하였으며 1930년경 동지회(同志會)에서 활동하다 재정문제로 이승만과 결별하였고, 1941. 4. 20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를 조직하는데 하와이 독립단 대표로 참석하여 의사부(議事部)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전미학생월보』편집인, 『신한민보』 주필, 하와이 『국민보』 주필 등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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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제자로서 양정(養正)·배재(培材)·보성(普成)중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1906~7년경 계몽운동단체인 자강회(自强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망명 출국하여 중국 지역을 순유(巡遊)하다가 1909년 4월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하였다. 1910년 가을 박용만(朴容萬)이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 지역에 설립한 군사사관학교인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少年兵學校)에 입학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수련하였으며, 졸업 후 소년병학교 중견 간부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18년 6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대학에서 정치와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19년 1월에는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임명을 받아 동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이 되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년 1월 25일부터 오하이오 콜럼버스대학의 한인학생회에서 발행한 「소년한국(young korea)」을 집필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또한 1920년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법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학생총회결성발기자회(學生總會結成發起者會)에 샌프란시스코지방 학생대표로 참석하여 미주 각 지방에 산재한 한인 학생과 학생회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전미학생월보(全美學生月報)」 편집인이 되어 미주 한인 유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단합에 정열을 쏟았다. 한편, 1918년 7월 박용만이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조직한 갈리히연합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하였으며, 1919년 3월 국내와 원동(遠東)의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목적으로 박용만이 결성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동년 5월 박용만이 중국 북경(北京)으로 가 원동의 군사단체들과 연락하여 1921년 4월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자, 하와이 대조선독립단 대표로 통첩문에 참여하는 등 군사통일회의 운동자금을 적극 조달·후원하였다. 그 후 1927년 4월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본인의 명의로 '독립운동8개년계획(獨立運動八個年計劃)'을 발표하는 등 1929년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1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에 입단하여 서기와 재무 및 동기관지 「국민보(國民報)」 주필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월 이승만 중심의 독재체제를 몰아내고 민족운동에 전념할 하와이 한인단체를 건설하고자 투쟁하였다. 특히 이승만이 1925년부터 추진해 오던 동지촌(同志村) 건설의 실패와 동지식산주식회사(同志殖産株式會社)의 몰락으로 동지회가 재정난에 빠져 교회재산과 교민단의 회관을 매각하여 이에 충당하려고 하였을 때, 김원용 등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저지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으로부터 테러습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1932년 1월 이승만 일파를 축출하고 교민단을 변경하여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복설(復設)하여 하와이 한인단체의 통합기구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우는 등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동년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 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특무공작을 후원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결성된 하와이애국단에 가입하여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거사를 적극 후원하여 김 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임명으로 재차 대한인국민회 서기와 재무, 그리고 동 기관지인 「국민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한인 교포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자, 안원규(安元奎) 등과 함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동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여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議事部)가 설치되자,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그 뒤 1944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 단체가 개최한 대표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인 1951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자서전(自敍傳)』을 비롯해 이른바 '삼만전'으로 알려진 『우남이승만전(雩南李承晩傳)』, 『우성박용만전(又醒朴容萬傳)』, 『검은정순만전(儉隱鄭淳萬傳)』 등을 저술하여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기여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269·270면
  • 재발굴한국독립운동사(한국일보사, 1988) 제ⅲ권 27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434면
  • 한민족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438면
  • 재미한인의 독립운동(방선주) 42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96·9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68~673면
  • 고등경찰관계년표(총독부경무국) 220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132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38·13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현구 Henry Cu Kim 충청북도 옥천(沃川)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동지미포대표회, 해외한족대회
본문
1891년 6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에서 아버지 김기만(金基萬)과 어머니 연일(延日) 정씨(鄭氏)의 2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판도판서공파(板圖判書公派) 20세손이다. 미국에서는 Henry Cu Kim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이종사촌 김규흥(金奎興)을 통해 근대 학문에 접하였다. 김규흥은 창명학교(彰明學校)를 설립하였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1906년 서울 계산보흥학교(桂山普興學校)에 입학해 교사 유근(柳瑾)·원영의(元泳義)의 지도를 받았다. 유근과 원영의는 당시 김규흥과 함께 대한자강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원영의의 조언으로 보성학교(普成學校, 현 보성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김규흥을 따라 중국 유학을 꿈꾸었으나 그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자 중국행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어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이 발발하자 신학문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1908년 가을부터 김규성(金圭成)·홍승국(洪承國)·송진헌(宋晉憲)과 함께 유학 준비를 시작하였다. 유학 준비 과정에서 김규성이 상하이(上海)로 돌아가게 되자, 홍승국·송진헌과 함께 원산(元山)-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시베리아(Siberia)를 경유하여 뉴욕(New York)에 이르는 유학길에 올랐다. 여정 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순만(鄭淳萬)으로부터 여비를 도움 받았고, 미국 콜로라도(Colorado) 주 덴버(Denver)에서 활동 중인 박용만(朴容萬)을 소개받았다.1904년 4월 미국 뉴욕에 도착한 후, 박용만을 찾아 덴버로 갔으나 그는 네브래스카(Nebraska)로 떠난 뒤였다. 박용만을 찾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윤병구(尹炳求)의 도움으로 와이오밍(Wyoming)주에서 4개월 간 철도노동자로 일하였다. 자금이 마련되자, 1909년 가을 네브래스카(Nebraska)로 가서 박용만이 링컨(Lincoln) 시에서 운영하던 한인 학생기숙사에 머물며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헤이스팅스(Hastings)대학 예비과에서 대학교 진학 준비를 하면서, 박용만이 설립한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의 학생들에게 한글과 문법을 가르쳤다. 이어 박용만이 설립한 네브래스카 대한인거류민회(大韓人居留民會)에 가입하였고, 이때 제1회 단장을 역임하며 박처후(朴處厚)·백일규(白一圭)·홍승국·정태은 등과 활동하였다.1913년 헤스팅스 대학교 예비과를 졸업한 후, 그 해 9월 뉴욕주에 있는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1914년 오하이오주립대학교(The Ohio State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 이때 학업을 이어나가는 동시에 소년병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한인학생동맹회(Korean Student`s Alliance)’에 참여하였다. 한인학생동맹회는 1913년 6월 4일 한인학생 대표들이 모여 네브라스카(Nebraska)주 링컨(Lincoln)시에서 결성한 단체로, 1년에 2차례 영문 잡지를 발간하며 외교 선전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여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14년 6월 1일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영문 잡지로 한인학생동맹회가 창간한 『한인학생평론(The Korean Student`s Review)』의 기자로 참여하였다. 1917년 6월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이후 1918년 12월 30일, 오하이오주 콜럼버스(Columbus)에서 결성한 ‘북미한인학생연맹(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America)’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문제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동정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월간 영문 잡지를 창간할 때, 박진섭(朴晉燮)과 함께 참여하여 기자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창간호로 『일본 지배하 한국의 자유와 평화? (Freedom and Peace with Korea under Japan?)』를, 4월에는 『지속적인 극동의 문제: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A Persistent Problem of the Far East: What Shall become of Korea?)』, 5월에는 『Young Korea(젊은 한국)』를 발행하였다. 1919년 7월 2일 이살음(李薩音)의 후임으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新韓民報)』의 편집인으로 초빙되어 활동하였다.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재필(徐載弼)이 이승만(李承晩), 정한경(鄭翰景)과 함께 필라델피아(Philladelphia)에서 개최한 ‘제1차 한인회의’(일명 ‘대한인총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유일한(柳一韓)·조안 우(Joan Woo)와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을 기초하고, 10개조의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이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리를 담은 건국의 청사진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에 중요한 좌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한민보』의 편집인으로 1919년 7월 24일자에 쓴 「독립과 통일」 논설을 시작으로 많은 논설과 기고문을 통해 한인 사회가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네브래스카의 한인학생동맹과 오하이오의 북미한인학생연맹에서 활동한 경험으로 1919년 9월 26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한인학생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미주 전체의 한인 학생 통합조직을 만들기 위해 학생연합회발기 예비임시통신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이 되었다. 또 시카고(Chicago)에서 곽림대(郭林臨大)를 중심으로 발기한 ‘미주한인유학생회’와 통합단체를 만들기로 결의하고, 임시회장에 선임되었지만, 1921년 4월 30일 결성된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회장에는 이용직(李容稷), 부회장에 조병옥(趙炳玉)이 당선되었다.이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활동도 전개해 나갔다. 1920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학무원에 선임되었고, 1920년 4월 8일부터 10일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주관한 재미국민대회에 평의원으로 참가하였다. 1921년에는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1922년에는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이자 대의원회를 대표하는 대의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1년 3월부터는 백일규·강영승(康永昇)과 신한민보 명예기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에는 ‘미주 한인사회 대표’ 자격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경비 부족으로 상하이(上海)에 가지 못하였다.1922년 1월 캘리포니아대학교(UC버클리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한편, 8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학생친목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각 분야의 전문지식을 공유하여 재미 한인사회에 새로운 문화운동을 펼치자는 취지로 홍언(洪焉)·백일규·강영승·강창준 등과 이문회(以文會)를 발기했으나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폐지령을 내리고, 이승만의 대통령직을 면직한 직후인 1926년 9월 이승만의 요청으로 구미위원부 위원이 되었다. 이후 국내와의 연계를 도모하기 위해 신간회(新幹會) 미주지회 설치를 추진했으나, 이승만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하였다.1929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교민단의 서기 겸 재무,『국민보(國民報)』 주필을 맡았고, 호놀룰루(Honolulu) 동지회(同志會) 지방회장, 『태평양잡지』 편집인, 동지회 중앙이사부 이사원 등으로 활동하였다.1930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린 동지회미포대표회(同志會美布代表會) 이후 이승만의 독선적인 활동에 실망하여, 1930년 8월 26일자로 『국민보』 주필직과 교민단 재무와 서기직 사직을 공개 발표하였다. 이 일로 하와이 한인사회는 대한인교민단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 간의 갈등과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다.1931년 10월 25일 대한인교민단 산하의 대한인홍보부 서기를 맡아, 10월 28일자로 후버(Hernert Clark Hoover) 미국 대통령에게, 11월 2일자로 국제연맹의회 의장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에게, 12월 11일자로 중국 국민당정부의 린썬(林森)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1932년 11월 14일에는 국제연맹 사무총장 에릭 드럼몬드(Eric Drummond)에게 공한을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1933년 2월 1일 하와이교민단을 해소하고 대한인국민회를 부활하면서 서기 겸 재무, 『국민보』 주필을 맡아 1934년까지 활동하였다. 이후 1937년 1월부터 1945년 1월까지 주필 겸 편집인으로, 이어서 1951년 2월부터 1952년 1월까지는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7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한 찬무회에 박상하(朴相夏)·김진호·정봉관(鄭鳳觀)과 함께 기밀부원으로 참여하였다.1940년 10월 13일 하와이의 6개 한인단체 대표들이 결성한 연합한인위원회의 관리부 부의장과 조사부 의장에 선임되었다. 1941년 4월 19일부터 29일까지 호놀룰루에서 미주(美洲) 9개 주요 단체 대표들이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가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와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를 설립하였다. 1941년 5월 4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방위원장에 선임되었다.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1951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했고 1962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67년 8월 14일 호놀룰루에서 사망하였다. 『김현구 자서전』, 『우남(雩南)(이승만)약전(略傳)』, 『우성(又醒)(박용만)유전(遺傳)』, 『검은(儉隱)(정순만)유전(遺傳)』, 『옥계(玉溪)(김홍기)약전(略傳)』등을 남겼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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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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