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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670
성명
한자 金乎
이명 金庭鎭, 金廷鎭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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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7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3년 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4년 미국(美國)으로 건너가 1919.3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의 파견원으로서 미국(美國) 서부(西部) 10여개 주를 역방하며 독립 의연금(獨立義捐金) 1만불을 모금하였고 동년(同年) 12월 조소앙(趙素昻)의 외교활동 후원을 목적으로 노동사회개진당(勞動社會改進黨)을 조직하여 2천 5백불을 지원하였으며 1936년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부흥에 힘써 제1차 중앙집행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으로 회관(會館) 건축을 주도하였고 1937년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을 조직한 후 중국(中國) 지역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등 8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으며 1941.4월 재미한인단체(在美韓人團體)가 연합한 재미한족연합회(在美韓族聯合會) 위원회(委員會)집행부(執行部) 위원장(委員長)에 선임되어 동년 12월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맹호군(猛虎軍) 창설을 주도하고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토록 하였으며 재미교포의 인구세(人口稅)애국 의연금(愛國義捐金)을 모아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지원하는 한편 1944.11월 임시정부(臨時政府) 주미외무위원회(駐美外務委員會)위원(委員)에 선임되는 등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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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4년 이래 대한인국민회 등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호는 망국의 현실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세우고 1912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4년 상해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노동에 종사하며 대한인국민회에 참가하여 재미 한인사회의 규합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주지역에서는 이에 호응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때 그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중앙총회의 특파위원이 되어 미주 서부지역을 2개월 동안 순회하면서 10,000원 이상의 독립자금을 수집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무렵 그는 독립 달성을 위해서 국제적 외교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9년 12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사회개진당(勞動社會改進黨)을 조직하였다. 노동사회개진당은 파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외교활동을 벌이던 조소앙(趙素昻)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후원단체로, 김호는 노동사회개진당의 선포문을 낭독하는 등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의 재정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1920년 회사를 설립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으로 대일투쟁의 전선이 중국 관내지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독립운동세력들이 좌·우의 이념을 초월한 통일전선을 모색하고 있을 때, 그를 비롯한 미주지역 국민회 인사들은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통일전선에 참가하였다.

한편 1936년 로스엔젤레스에서 한인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민회 리들리지방회를 재건할 때, 김호는 대의원에 피선되어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는 1937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5년과 1949년에도 총회장,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1941년 4월 20일 미국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될 때 김호는 한시대(韓始大)·송종익(宋鍾翊) 등과 북미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에 적극 참가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호놀롤루에 동위원회의 의사부(議事部)를, 로스엔젤레스에는 집행부(執行部)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가운데 1941년 말 일제가 하와이를 기습 침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호 등은 조국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력 양성을 위한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하고, 로스엔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로서 맹호군(猛虎軍)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계획을 중경의 임시정부에 알려 1942년 2월 정식 인준을 받아낼 수 있었다.

1942년 5월 태평양전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독립 달성의 구체적 방도를 모색하고자, 중경의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중국에 특파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김호는 중경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김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장으로 1942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한 일환으로 미국 당국과 협의하여 로스엔젤레스 시청에 헌기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국기가 1910년 망국 이후 32년만에 외국 관청에 게양될 수 있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는 가운데 이들은 종전 후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하여 국제외교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도 그와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1944년 8월 종래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로 개조하고, 같은 해 11월 이승만·김원용·김호 등을 위원으로 선임하였다.

1945년 3월 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연합국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재미 인사 가운데 김호·한시대·송헌수 등을 대표로 선임하였다.

김호는 광복 후 1945년 10월 재미한족의 국내파견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1946년 12월 남한과도입법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0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80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635, 671, 102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148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8輯 513, 680, 684, 685, 721, 754, 755, 770, 778, 814, 830, 834, 838, 839, 840, 841, 843, 847, 848, 850, 851面
  • 新韓民報(1915. 4. 22, 1917. 9. 13, 1918. 1. 3, 1. 31, 4. 2, 5. 16, 9. 24, 11. 5, 1919. 3. 25, 6. 14, 9. 18, 12. 9, 1920. 2. 24, 1931. 4. 1, 11. 5, 12. 4, 1932. 3. 24, 4. 6, 4. 13, 1936. 5. 21, 6. 4, 7. 30, 10. 1, 1938. 4. 21, 1941. 1. 9, 1. 16, 1942. 1. 1, 1. 8, 2. 12, 2. 19, 2. 26, 3. 19, 4. 23, 5. 7, 5. 14, 6. 18, 9. 3, 10. 15, 1943. 1. 14, 3. 11, 4. 22, 6. 17, 6. 24, 9. 2, 11. 4, 1944. 11. 22)
  • 東亞日報(1968. 2. 22)
  • 朝鮮日報(1968. 2. 18, 2. 20)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3卷 530·795·817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2輯 293·294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843面
  • 在美韓人史略(盧載淵, 1951) 144·145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2卷 666·671·672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輯 539面
  •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827·850·851·858面
  • 구미위원부 재정보고 -대한민국 8년 9월로 11년 10월까지-(1930. 9月) 8, 38, 39面
  • 在美韓人50年史(金元容, 1959) 255, 256, 303~305, 368, 410, 412, 420~425, 427~429, 433, 439, 441面
  • 白凡逸志(金九, 敎文社) 232面
  •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독립운동의연록(1918. 11~1919. 12月)
  • 독립금을 부담 이행한 국민회원의 명부록(1943)
  • 군사운동금 허락한 분의 금액과 씨명(1944)
  • 명단(1944. 5. 16, 캘리포니아 리들리)
  • 書翰(1941. 6. 30, 10. 5, 12. 22, 1942. 3. 16, 4. 6, 4. 11, 6. 10, 6. 18, 8. 28, 12. 8, 12. 25)
  • 公文(1941. 11. 29, 12. 7, 12. 18, 12. 31, 1942. 1. 2, 2. 4, 11. 20, 12. 6, 12. 17, 1943. 2. 9, 6. 4, 6. 5, 6. 7, 6. 11, 6. 12)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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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호 본명 : 김정진(金廷鎭·金庭鎭), 호 : 한사(漢槎), 미국명 : Charles Ho Kim 서울 -
본문
1884년 5월 25일 서울 소안동(小安洞,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아버지 김후규(金厚圭)와 어머니 권낙결(權樂玦)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한사(漢槎)이다. 족보에는 본명이 김정진(金廷鎭)으로 되어 있고, 김정진(金庭鎭)을 쓰기도 하였다. 미국식 이름으로는 Charles Ho Kim를 사용했다.4살 때 과천에서 2년간 거주했고 경기도 광주군(廣州郡)(현 경기도 광주시)에서도 2년간 지냈다. 9살 때인 1893년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연이어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과천의 큰 집에서 살았다. 1900년 이숙종(李淑鍾)과 결혼 해 큰아들 영한(瑛漢), 딸 한숙(漢淑), 작은아들 경한(景漢)을 두었다.1900년 상경하여 10월 한성중학교(漢城中學校, 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04년 6월 23일 심상과(尋常科)를 제1회로 졸업하고 학부(學部)의 주임관 6등 교관에 임명되어, 교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로 올라온 뒤 정동교회에 다니면서 선진 외국사상과 문물에 접하였고, 이는 도미 유학을 결심하는 배경이 되었다.1904년 11월부터 3년간 북감리교 선교사 존스(G. H. Jones, 趙元始)가 설립한 영화학교(永化學校)에서 근무하고, 서울로 올라와 상동청년학원(尙同靑年學院), 기호학교(畿湖學校), 융희학교(隆熙學校)에서 수학을 가르쳤다.1908년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사로 근무하던 중 2개월 만에 신병으로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당(培材學堂)과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이후 국어강습소에서 우리말과 한글을 공부하였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회관에서 영어를 배웠다. 주로 기독교계 학교와 민족주의계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고, 각 방면의 민족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민족의식을 배양하였다.1912년 11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전차회사에 취직해 차장감독(검표원)으로 2년간 근무하였다. 이때 미국행을 준비하기 위해 외국인이 설립한 기독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당시 상하이에서 영어를 공부한 기독학교는 조지 피치(George Ashmore Fitch)가 운영하던 상하이 YMCA로 추정된다.1914년 7월 초 몽골리아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7월 25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였다. 당시 도미 유학 시에는 정식 여권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지 않아 신원보증인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당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李大爲) 목사의 주선으로 해결되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철도공사장·탄광·농장 노동을 하면서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가입해 의무금과 특별의연금을 납부하였다. 또 병자를 위한 의연금 모금이나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장례 봉사 등에도 빠지지 않았다.1917년 8월 미국 콜로라도주 중남부에 위치한 푸에블로(Pueblo) 탄광지대에서 일하며 본격적인 대외활동에 나섰다. 8월 29일 국치기념일 행사를 거행하며 한인들의 애국심과 단결심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大韓人國民會) (北美地方總會) 총회관 구입을 위해 빌린 3,500달러 상환 후원 활동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후원 활동에 참여한 24명을 규합해 1918년 4월 14일 대한인국민회 푸에블로 지방회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함께 탄광에서 일하며 지방회 재무로 활동한 김원용(金元容)과는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1918년 6월 와이오밍주 록스프링스(Rock Springs) 인근의 탄광지대 슈페리어(Superior)로 옮겨, 한인들을 규합해 한인친목회를 결성하고 매주 시국토론회를 개최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7월 8일 재류 한인 23명과 와이오밍 지방회 설립을 의결하고, 7월 19일 인준을 받아 총무로 활동하였다. 와이오밍 지방회 설립 시 신한민보 식자기계(植字機械) 설치비용 150달러를 모금해 보냈고, 특별의연금 1,320달러도 모금해 미주 한인사회의 모범이 되었다.1919년 고국에서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와이오밍 지방회 회원 15명과 독립의연동맹회를 결성하였다. 독립이 승인되는 날까지 매월 10달러 또는 5달러를 의연금으로 모금하여 독립운동에 사용토록 하자는 취지였다. 이는 3월 1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독립의연금 모금활동을 선포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이런 연유로 3월 17일 미국 중·서부 지역 독립의연금 모금 특파위원에 임명되었다.1919년 3월 17일부터 5월 23일까지 미국 중·서부의 10개 주 63개 지방을 순회하며 한인 327명을 만나 모금활동을 펼쳐, 1만 달러에 이르는 의연금 약정을 받아냈다. 이 일로 『신한민보』의 ‘가장 모범적인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모금활동을 통해 한인사회에 대한 안목을 넓힌 것은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자산이 되었다.1919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23명의 청년들과 청년혈성단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를 지원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상, 학술상 기예를 배우기로 다짐하였다. 8월 17일 다뉴바(Dinuba)에서 열린 청년혈성단대회의 의장이 되어 청년혈성단의 목적·강령 등을 소개하고 ‘한국혁명’이란 연극회를 개최하는 등 대회를 주관하였다.청년혈성단대회 직전인 6월에는 미국 동부로 가서 이승만(李承晩)을 만나 시국문제를 협의하였다. 1919년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거행된 다뉴바한인대회에서는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취임 축하식’을 거행하여 이승만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다. 1919년 8월 이승만이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립하자 지방위원이 되었고, 1929년 리들리(Reedley)에 동지회(同志會) 지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는 등 이승만을 도왔다.이와 같은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1918년과 1919년, 그리고 1922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후보에 올랐다. 미국에 온 지 5, 6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높은 지명도를 보여주었다. 1921년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에 선임되자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고통 받고 있는 간도지역 한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국내구제금으로 거둔 1,200달러에서 1,000달러를 북간도에 보냈고, 다시 1,000달러의 구제금과 수천 벌의 의복을 모아 보냈다.1919년 말 유럽에서 외교활동을 하던 조소앙(趙素昻)이 이살음(李薩音)을 통해 후원을 요청하자, 1919년 12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사회개진당 창립총회를 열고 당수 이살음과 함께 총무에 선임되었다. 조소앙의 외교활동을 위해 2,500달러를 지원하였고, 1920년 7월에는 기관지 『동무』를 발간하였다. 노동사회개진당은 대한인국민회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유명무실해졌다.구미위원부 다뉴바 지방회 총무로 활동하던 1921년 6월 5일 한인공동회를 개최해 동맹원조금이란 명목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구미위원부 활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8월 27일에도 한인공동회를 열어 2,360달러를 모아 워싱턴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구미위원부에 대한 지원 활동은 이승만에 대한 지지 활동으로 이어져, 1922년 다뉴바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에 이승만을 초빙하는 등, 북미 대한인국민회가 재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1920년 9월 10일 단순 노동만으로 경제 자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김종림(金宗林)·오충국(吳忠國)·송헌주(宋憲澍) 등과 리들리 건재회사Reedley Dehydrted Products Co.를 설립했다. 1922년에는 리들리에 김형순(金衡珣)·한덕세(韓德世)와 함께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설립했다. 과일농장과 묘목사업, 과일포장업을 운영한 김형제상회는 한인 노동자와 유학생들에게 노동 기회를 제공하였고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안정적인 사업 운영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기반이 되었다.1929년 12월 리들리 동지회 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고, 1930년 3월 8일 다뉴바 한인교회에서 중가주(中加州, 캘리포니아 중부) 한인공동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부터 회장이 되어 공동회를 이끌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11월 2일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 대표와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의 한인사회 단합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에 합의하였다. 1931년 12월 7일 중가주공동회·대한인국민회·나성(羅城, Los Angeles, 로스앤젤레스)한인공동회·묵경(墨京, 멕시코시티)자성단 4개 단체가 ‘임시정부로 집중하자’는 결의안 채택과 함께 미주한인연합회를 결성하였는데, 이때 백일규(白一圭)와 함께 재무를 담당하였다. 미주한인연합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인구세 모금운동을 벌여 1년 동안 677달러를 모금하여 송금하였다.이후 미주한인연합회에는 뉴욕한인공동회와 나성한인공동회가 동참해 조직을 크게 확장시켰으나, 1933년 4월 2일 북미 대한인국민회가 탈퇴하였다. 또 4월 16일 중가주한인공동회와 나성한인공동회가 리들리에서 대한독립당을 설립함에 따라 와해되었다.1936년 5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최진하(崔鎭河)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유지 인사 간담회를 개최할 때, 중가주 지역을 대표해 참석하였고, 이를 계기로 1936년 5월 31일 중가주에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신설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심의 활동을 펼쳤다. 1937년 1월 위원회제로 개편한 대한인국민회의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미주 한인사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38년 4월 17일에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낙성식을 거행함으로써 대한인국민회를 북미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만들었다. 또 중국항일동정금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특별의연금, 인구세 모금운동을 벌여, 인구세 외에 1937년 1,769달러, 1938년 1,650달러 등의 후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활동 강화와 한인단체의 통합 요구 등을 배경으로 1941년 4월 19일부터 29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 한시대(韓始大)·송종익(宋鐘翊)과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의 봉대’ 등 주요 활동 방침을 정하고 통일된 기구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설립, 주미외교위원부의 설치, 독립금으로의 재정 통일 등을 의결하였다.재미한족연합위원회 초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1941년 5월부터 1944년 4월까지 3년간 독립금 모금활동, 한인신분증 발급을 통한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 한인경위대(일명 ‘맹호군’) 조직, 미국 국방 후원을 위한 공채 발매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Washington) D.C.의 라파예트 호텔에서 이승만이 주최한 한인자유대회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1차 전체위원회(1942.4.3.~7; 5.4~7)에서 전경무(田耕武)와 충칭(重慶)특파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1945년 4월 25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창설대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재미한족연합회를 중심으로 해외한족대표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이승만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과 통합을 중재하여 ‘한인대표단’을 새로 구성했으나, 이승만이 얄타밀약설을 제기하고 독자활동에 나서면서 무산되었다.1945년 11월 4일 ‘해방된 조국 건설을 도울’ 목적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국파견대표단(단장 한시대) 제1진으로 서울에 왔다. 이후 1948년 1월 1일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중간파 세력의 통일정부 수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김원용에게 미주 한인의 이민과 독립운동의 역사 정리를 의뢰하여 『해방조선』(1948. 12)과 『재미한인오십년사』(1959. 3)를 발간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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