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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0787
성명
한자 李大爲
이명 李大夏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8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도항하여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 등과 친목회(親睦會)를 결성하였고 1908년 말에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共立協會)의 합동문제를 논의하여 1909. 2월 국민회(國民會)를 결성하였으며 1910년 이 단체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재편되자 1910년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부회장(副會長), 1913-1915년, 1918년에는 동회의 총회장(總會長)으로 활동하였으며, 1913년에는『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취임하여 재정의 지원과 한국어 타이프라이터의 개발 등으로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속간(續刊)에 기여하였으며 1919년 8월부터 1921년 경까지 필라델피아 및 워싱턴에서 구미주차위원부(歐美駐箚委員部)위원(委員)으로 외교 및 기타 방면에서 기여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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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평남 강서(江西) 사람이다.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후,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190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장경(張景) 등과 함께 미주 한인단체의 효시인 친목회(親睦會)를 결성하고 동포간 연락과 친목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5년 4월 동지(同地)에서 안창호등과 함께 미주 최초의 민족운동기관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06년 4월에는 상항(桑港)한인감리교회를 창립하여 한인 동포들의 구호사업과 교육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1908년 6월 오레곤주 포트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동년 12월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미국내 한국어 출판의 효시인 『대도보』라는 주보를 발행하여 매부 본국과 세계의 정세를 전달하는 한편, 기독교의 복음 전도 및 교포 교양에 공헌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부터 최정익(崔正益)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 있는 한인단체를 통일할 것을 논의한 뒤 1909년 2월 미주 공립협회 대표로 참석하여 미주 유일의 통일적 한인민족운동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uc버클리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부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그 해 7월 일제의 한국 강점이 현실화되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명의로 각 지방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애국동맹단(愛國同盟團)을 조직하고, 번역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지방총회와 연서로 일본 왕에게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미국으로 망명해오는 애국지사와 신도(新渡) 유학생들을 위해 신원보증을 서거나 이민국 수속을 위해 대변인으로 헌신을 다하였다.

1911년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초청으로 담임목사로 취임한 그는 예배친교봉사회를 조직하여 교포들의 애국운동과 정치활동의 중심지로 변모시키는 동시에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가 결성되자,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표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노력하였다.

1913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 6월에는 「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로 선임된 그는 언론을 통한 한인교포의 계몽운동과 항일독립운동, 민족교육운동 등에 힘쓰며 한인사회의 결속을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동년 6월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지역에서 한인노동자들이 영국인 농장으로 일하러 갔다가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쫓겨난 사건이 발생하자 주미일본공사(駐美日本公使)가 한인들의 노동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해외 한인들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에 총회장이었던 그는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서한을 보내어 일본공사의 간섭행위를 강력히 항의하고 한인사회에 대한 간섭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여 이를 인정한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이에 따라 1914년 4월 미국무장관은 물론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정받음으로써 재미한인의 대표기관으로 대우를 받음과 동시에 미주내 망명자치정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15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재선된 그는 동년 3월 국문자모를 몸소 만들고, 독창적인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문선을 통해 만들던 기존 신문에 활자의 혁명을 일으켰다. 이 기계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는 1915년부터 1970년까지 「신한민보」를 제작하였다. 또한 망명객을 위한 숙식과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한편, 70여 명의 사진결혼 신부들의 결혼식 주례를 몸소 서 주기도 하였던 그는 1916년 한인 최초로 uc버클리대학을 졸업한 뒤 산앤젤모에 소재한 태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8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한편, 1919년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19년 8월 워싱턴으로 가서 이승만(李承晩)을 만나 구미주차외교위원회(歐美駐箚外交委員會)의 설립문제를 논의한 그는, 1921년 3월 김규식(金奎植)·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동 위원회의 사무장으로 임명되어 외교와 독립 선전활동에 주력하다가 과로로 인해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미주이민100년(민병용) 21~2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21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500․501․659․660․684․81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12면
  • 동아일보(1928. 7. 27)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0․1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694․8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22․124․12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87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31·73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2권 184․92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대위 호 : 애산(愛山), 초명 : 태화(泰化) 평남 강서(江西) 헤미트사건, 호프만호텔 태극기 게양사건
본문
1878년 12월 28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태화(李泰化)였으나, 미주에 건너간 뒤 이대위(李大爲)로 개명하였다. 대위는 영어 이름 데이빗David의 한문 표기였다. 애산(愛山)이라는 호가 있었다.1890년대 후반 안창호(安昌浩)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숭실학당(崇實學堂)에서 공부하다가 1903년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당시 결혼하여 자녀 2명을 둔 상태였다. 1903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9월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에 참여하였다. 1905년 9월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중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6월 졸업하고, 캘리포니아대학교에 진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샌프란스시코한인교회(桑港韓人敎會)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공립협회(共立協會)와 국민회(國民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09년 6월 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 회장을 맡았다.1910년 1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에 당선되었으며, 2월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겸 총무를 맡아 총회장 사무를 대리하였으나 학업을 이유로 그만두었다. 1911년 2월부터 양주삼(梁柱三)과 윤병구(尹炳球)에 이어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의 제3대 전도사로 교회를 담임하여 1912년 목사(Deacon) 안수를 받았고, 1928년 사망시까지 목사로 시무하였다.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에서 발행하다가 1910년 11월호로 정간되었던『대도(大道)』를 1911년 8월호부터 복간하였다. 『대도』는 1912년 7월호로 폐간되었는데, 매호 여러 편의 글을 게재하였다. 대한인국민회의 여러 직임을 맡았으며, 1912년 9월에는 부인 손대안(孫大安)과 딸·아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1913년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이래 1916년을 제외하고는 1914년부터 1919년까지 계속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3년 5월 14일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학 전공으로 문학사(Bachelor of Letter) 학위를 받았다.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취임한 뒤 재정 부족으로 정간 중이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복간하였고, 주필직도 맡았다.1913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남부 리버사이드 근처의 헤미트(Hemet)에 한인들이 살구따는 작업에 동원되었다가 그 지역 백인노동자들에게 축출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두고 미국 정부와 일본공사관 사이의 교섭이 진행되자,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자격으로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William J. Bryan)에게 전보를 보냈다. 전보 내용은 “재미한인은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에 미국에 입국하였으므로 일본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전보를 받은 미국 정부는 이대위의 의견을 수용하여 재미 한인을 일본인과는 별개로 처리하여 국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1914년에는 북미지방총회가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법인으로 인가받아 한인 보호와 단체조직, 그리고 비영리적인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신한민보』의 주필을 겸하면서 인터타이프를 이용한 한글식자기를 개발하여 1915년 3월 11일자부터 『신한민보』는 174자의 인터타이프 신식활자로 발간되었다.1914년에는 샌프란시스코 항구선교사로도 활동하면서 한인 입국에 기여하였다. 1914년 12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관으로 건물에 교회를 입주하여 대한인국민회 건물대금 상환에도 기여하였다. 한인 신자가 증가하자 미국 남감리회에서는 한인교회를 일본교회와 분리하여 단독 지방회로 삼았다. 1915년 10월에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in San Anselmo)에 편입하였다. 1916년 총회장직을 강영소(姜永韶)에게 넘겼으나 1917년에는 다시 총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에 북미지방총회관 대금이 완납되었고, 북미지방총회는 1917년 6·7월 샌프란시스코 미국인상업회의소에 입회하였다. 상업회의소 측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호프만호텔에 각국 상업가들을 초대하면서 이대위도 초청하자, 상업회의소 회장에게 청하여 태극기를 게양토록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대표가 항의하자 적극 반론하여 태극기 게양을 관철시켰다.인터타이프 국문식자기에 이어 1917년 4월 모노식 활자를 개발하였다. 이 활자는 기계로뿐만 아니라 개개의 활자를 문선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모두 196자였다. 1917년 미국 정부가 농업노동자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멕시코 이민을 허용하자, 멕시코 한인의 미주 노동이민을 추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18년 4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10월 남감리교 지방연회에서 장로목사로 승임하였다.1919년 2월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는 국외 독립운동계의 지도급 인물 39명이 참여하였는데, 미주에서는 그와 이승만·안창호·박용만(朴容萬) 4명이 서명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외교문제를 맡고 북미지방총회는 재정지원을 맡게 되면서, 북미지방총회장을 사임하고 중앙총회 사무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7월에는 워싱턴에 가서 이승만과 서재필을 만나 시국문제 등을 협의하였다.당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지시로 대한인국민회가 모집하고 있던 애국금을 국채표공채로 대체하여 미주에서의 외교 활동에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이 미주에서 애국금을 폐지하고 공채를 발행하여 재정을 장악하고자 하는 데 반발하였다. 공채 판매가를 모두 워싱턴으로 보낸다면, 대한인국민회의 존재가 유명무실하게 될 상황이었다. 대한인국민회는 공채표 판매에 반대하며 임시정부의 지시를 기다리자는 입장이었다. 1920년 2월 24일자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의 「재무부 포고 제1호」가 발표될 때까지 갈등은 계속되었다. 8월 5일 대한인국민회에서 애국금과 공채표를 함께 시행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이승만은 ‘임시집정관 총재’ 명의로 8월 13일 「국채표에 대한 포고문」을 포고하였다. 주요 내용은 국채표를 발매하며 재무위원부를 설치하고 원동(遠東)에서 온 김규식(金奎植), 하와이의 송헌주(宋憲澍), 미주의 이대위를 위원으로 선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직은 ‘한국위원회’라는 이름을 거쳐 ‘구미주차위원회’(구미위원부)로 변경되었고, 구미위원부는 9월 8일 애국금을 폐지하고, 9월 12일 자로 「공고서」를 공포하여 공채 발행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임시의정원에서 구미위원부에 관한 사항이 통과되지 않음’을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다.결국 이승만과 대한인국민회의 갈등 속에서 9월 23일 구미위원부 위원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고, 대한인국민회와도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이후 대한인국민회의 직임을 맡기도 하지만 원로 역할에 국한하였다.1920년대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28년 1월 말 샌프란시스코 병원에 입원하여 일시 차도가 있었으나, 6월 17일 오후 7시 50분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인국민회와 한인 남감리교회, 스탁톤 공제회 등이 공동으로 주관한 사회장의 형태로 거행되어 6월 22일 사이프러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5년 10월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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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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