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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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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哲勳
이명 金哲勳, 金轍壎, 金喆薰, 金喆訓, 金喆薰, 金喆勳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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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2006 훈격 애국장
1911년 노령으로 이주하여 권업회(勸業會) 회원, 한민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부의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1919년 9월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1921년 5월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그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8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고려부 비서, 1924년 오르그뷰로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7월 안도(安圖)에서 조직된 대한군민부(大韓軍民府)의 외교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5월 하얼빈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결성에 참여하고 그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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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김철훈은 1911년 노령에서 권업회(勸業會) 회원, 한민학교(韓民學校) 교사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3월 17일에 불라디보스톡 총영사관에 3.1운동과 관련하여 한글로 된 선언서와 러시아어로된 선언서를 전달하는 한편, 우리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에는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최재형(崔在享),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권업회 연론부장(演論部長), 한민학교 조선어 교사, 한민신보(韓民新報)의 심사부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각지를 순회하며 교민사회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1921년 5월 김철훈은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실제로 이 시기 일제도 김철훈을 하바로프스크, 블라고베스첸스크, 치타, 이르크츠크, 옴스크, 모스크바 등 중요 도시를 내왕하며 선전사무에 관계하고 있는 중요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 1923년 8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고려부 비서, 1924년 오르그뷰로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7월 안도(安圖)에서 조직된 대한군민부(大韓軍民府)의 외교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장단 병력이 약 100명에 달하였으며, 간도와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모연(募捐)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5월 하얼빈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에 선임되었다. 김철훈은 1925년 4월 경성에서 조선공산당 조직된 후, 동당의 만주지부의 필요에 따라 만주에 파견된 최원택(崔元澤)과 조봉암(曺奉岩)을 위시하여, 동지연선(東支沿線) 일면파에서 김하구(金河球), 윤자영(尹慈英) 등과 함께 1926년 5월 만주총국의 조직을 완료하였다.

1933년 하바로프스크 공산주의 고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김철훈은 1938년 10월 9일 알마아타주 내무인민위원부 산하 3인 위원회가 일본 조사기관과 협력하였다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선고하여 10월 10일에 집행되었다. 1964년 복권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亞三 機密送 제178호:1921.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 在西比利亞(11)
  • 在露 共産黨 활동에 관한 보고(1921년 7월 초순) 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의 部-鮮人과 과격파(1)
  • 高麗共産黨 및 全露共産黨에 관한 건(機密 제18호, 1922. 12.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
  • 間島 및 接壤地方 不逞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機密受제199호-機密제191호:1924. 7. 1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9)
  • 國外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72면
  • 朝鮮民族運動年鑑(1946)
  •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35권 83~89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2권 762, 765면, 3권 437, 485, 493, 494면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政二機密送 제6호:1920. 6. 2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 在西比利亞(10)
  • 高麗共産黨 重要人物 調査의 件 1(機密 제103호:1922. 6. 20) 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의 部-鮮人과 과격파(3)
  • 不逞鮮人의 行動에 관한 件 1(公 제250호, 1923. 11.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5)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35·139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4권 469면, 6권 332~337면
  • 스탈린시대-1934~38년- 정치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구 스베뜰라나·이형근) 2권 6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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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철훈 이명 : 김철훈(金轍壎, 金喆薰, 金喆訓, 金喆勳) 함경북도 명천(明川) -
본문
1885년 8월에 태어났으며, 출신지는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하우면(下雩面)이다. 이명으로 모두 한자가 다른 김철훈(金轍壎)·(金喆薰)·(金喆訓)·(金喆勳)을 사용하였다. 일찍이 러시아 노령으로 건너가 신한촌(新韓村) 부근에서 거주하였다.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권업회(勸業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2년 3월 권업회 교육부와 신한촌 한민회가 공동으로 신한촌에 4년제 한인학교인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에서 조선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8년 3월 하바로프스크에서 개최된 조선혁명가대회에 참석하였고, 5월 한인사회당 창당을 결의하는 데도 참여하였다.1919년 3월 17일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대표 파견과 대내외 활동을 위해 전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명칭을 가진 기구가 필요함을 깨닫고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편하였다. 당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한글과 러시아어로 된 선언서를 전달하였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은 문창범(文昌範), 서기는 오창환(吳昌煥)이었다. 이때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대한국민의회에 이어 중국 상하이(上海)와 서울에서도 각각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세 단체의 통합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29일 최재형, 문창범 등 20여 명과 한민학교에 모여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를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노령에 조선임시공화정부를 세울 계획을 취소하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한민학교 교사뿐만 아니라, 권업회에서 연론부장(演論部長), 한민신보(韓民新報)의 심사부장 등을 겸임하였다.1920년 9월 5일 이르쿠츠크 러시아 공산당 한인 지부를 ‘전러한인공산당’으로 확대시킬 때 고문으로 보리스 슈먀츠키(Б. Щумяцкий)를 추대하고, 군정부장 최고려(崔高麗), 오하묵(吳夏默)을 선임하였다. 이때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21년 1월에는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로, 7월에는 ‘전로고려공산당중앙총회’로,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1919년 12월에는 국제연맹회의에 제출할 조선독립청원서의 작성을 위해 주영섭(朱永涉)·오창환(吳昌煥)·김영학(金永學) 등과 함께 재해삼위국민회(在海蔘威國民會)를 중심으로 한국인 백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1921년 5월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면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러시아의 여러 중요 도시를 다니면서 선전 사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1922년 12월 코민테른 본부에서 상하이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해체를 명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하지만 국내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라는 지령을 받아 12월 중순부터는 이성(李成)·채성룡(蔡成龍) 등과 협의한 후 전한공산당대표회(全韓共産黨代表會) 소집발기회(召集發起會)를 조직하고 여러 민족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8월에는 코민테론 동양비서부 고려부 비서, 1924년 오르그뷰로 위원으로 활동하였다.이후 만주로 이주하여 1924년 7월 안투현(安圖縣)에서 조직된 대한군민부(大韓軍民府)에 가입하여 외교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는 대원들 사이의 노선상의 차이, 이념적인 문제와 함께 요직안배와 군권쟁탈을 둘러싼 갈등 등으로 해체되면서 유응하(劉應夏)·여순근(呂淳根) 등 전 한교회(韓僑會) 인사들과 같이 “통의부는 내분이 야기되고 신·구파의 대립중이므로 통일의 실현을 거둘 수 없기 때문에 태도를 선명히 하여 탈퇴한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따로 대한군민부(大韓軍民部)를 조직하였다. 군민부의 병력은 약 100명에 달하였으며, 국경 지대에서 군자금 모금과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1926년 5월에는 김하구(金河球)·윤자영(尹慈英) 등과 같이 하얼빈(哈爾濱)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3년 하바로프스크 공산주의 고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10월 9일 일본 조사기관과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받았고, 이튿날에 집행되어 1938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 1964년 복권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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