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김철훈은 1911년 노령에서 권업회(勸業會) 회원, 한민학교(韓民學校) 교사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3월 17일에 불라디보스톡 총영사관에 3.1운동과 관련하여 한글로 된 선언서와 러시아어로된 선언서를 전달하는 한편, 우리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에는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최재형(崔在享),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권업회 연론부장(演論部長), 한민학교 조선어 교사, 한민신보(韓民新報)의 심사부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각지를 순회하며 교민사회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1921년 5월 김철훈은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실제로 이 시기 일제도 김철훈을 하바로프스크, 블라고베스첸스크, 치타, 이르크츠크, 옴스크, 모스크바 등 중요 도시를 내왕하며 선전사무에 관계하고 있는 중요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 1923년 8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고려부 비서, 1924년 오르그뷰로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7월 안도(安圖)에서 조직된 대한군민부(大韓軍民府)의 외교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장단 병력이 약 100명에 달하였으며, 간도와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모연(募捐)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5월 하얼빈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에 선임되었다. 김철훈은 1925년 4월 경성에서 조선공산당 조직된 후, 동당의 만주지부의 필요에 따라 만주에 파견된 최원택(崔元澤)과 조봉암(曺奉岩)을 위시하여, 동지연선(東支沿線) 일면파에서 김하구(金河球), 윤자영(尹慈英) 등과 함께 1926년 5월 만주총국의 조직을 완료하였다.
1933년 하바로프스크 공산주의 고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김철훈은 1938년 10월 9일 알마아타주 내무인민위원부 산하 3인 위원회가 일본 조사기관과 협력하였다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선고하여 10월 10일에 집행되었다. 1964년 복권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亞三 機密送 제178호:1921.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 在西比利亞(11)
- 在露 共産黨 활동에 관한 보고(1921년 7월 초순) 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의 部-鮮人과 과격파(1)
- 高麗共産黨 및 全露共産黨에 관한 건(機密 제18호, 1922. 12.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
- 間島 및 接壤地方 不逞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機密受제199호-機密제191호:1924. 7. 1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9)
- 國外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72면
- 朝鮮民族運動年鑑(1946)
-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35권 83~89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2권 762, 765면, 3권 437, 485, 493, 494면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政二機密送 제6호:1920. 6. 2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 在西比利亞(10)
- 高麗共産黨 重要人物 調査의 件 1(機密 제103호:1922. 6. 20) 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의 部-鮮人과 과격파(3)
- 不逞鮮人의 行動에 관한 件 1(公 제250호, 1923. 11.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5)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35·139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4권 469면, 6권 332~337면
- 스탈린시대-1934~38년- 정치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구 스베뜰라나·이형근) 2권 6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