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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292
성명
한자 李吉用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관련정보


2021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년 만철 경성관리국(滿鐵京城管理局)근무(勤務)하며 철도 수송업무(鐵道輸送業務)를 맡아보는 것을 이용(利用)하여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 보내오는 반일 격문(反日檄文)수송(輸送)하며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을 받았으며 1936. 8.25 제11회 베르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優勝者)손기정(孫基禎)사진(寫眞)동아일보(東亞日報)게재(揭載)할 때 손선수(孫選手)사진(寫眞)에서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보도(報道)함으로써 민족정신(民族精神)을 일깨운 (後) 일제(日帝)강제(强制)(依)하여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에서 해직 당(解職當)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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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9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南滿洲鐵道株式會社 京城管理局)에 근무하며 철도수송업무를 맡아 보는 것을 이용하여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인쇄되어 온 반일(反日) 격문을 수송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근무하던 1936년 8월 25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孫其禎) 선수의 사진을 동아일보에 게재함에 있어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보도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일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1개월여의 조사를 받고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1936년 9월 25일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日報(1988. 4. 14)
  • 記者協會報(1968. 8. 12)
  •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16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679面
  • 東亞日報(1956. 8. 9, 8. 17∼8. 22, 1972. 9. 11, 1976. 1. 24, 1. 26, 1984. 8. 16)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길용 - 경기 인천(仁川)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본문
1899년 8월 15일 경기도 인천부(仁川府) 부내면(府內面) 우각리(牛角里, 현 인천광역시 동구 창영동)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다. 사립 영화학교(永化學校)와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에 진학하였으나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철도원으로 근무하였다.1920년 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반일 격문을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1921년에 풀려난 후 대전(大田)에서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8월 10일 대전청년구락부(大田靑年俱樂部) 제3회 정기총회에서 문예부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대전청년회(大田靑年會) 문예단 단장으로 10여 명의 단원과 함께 남부 지방을 순회하며 각 지역 청년회와 교류하였으며, 대전에서 「운강명월」이라는 극을 공연하였다.1923년 2월 대전소작인상조회(大田小作人相助會) 총회에 대전물산장려회(大田物産獎勵會) 회장으로 참석하여 소작인들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열변을 토하였다. 또한 그 해 3월 대전체육회(大田體育會) 창립총회에서 서무 겸 연구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근무하였다.1923년 인천으로 지역을 옮겨 청년운동을 지속하였다. 같은 해 9월 인천지역 배재학당 졸업생 모임인 인배회(仁培會)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1월 제물포청년회(濟物浦靑年會)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이 무렵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총회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인천지역의 정구 경기에서 심판을 보고, 빙상경기대회 개최를 주도하여 스포츠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활동하며, 1923년 8월 굴업도(堀業島) 태풍 피해 당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르포 기사를 전달하였으며, 이후에도 각종 재난 현장에서 신속히 소식을 전하였다.1924년 『조선일보』로 옮겼으나, 1927년 다시 『동아일보』 기자로 복귀하였다. 이 무렵 체육 전문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이유는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한국의 혼을 찾고자 한다면 체육을 중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 경기 현장을 취재하면서 한국인 선수들의 활약상을 보도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또한 1927년 8월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조선운동기자단(朝鮮運動記者團)을 조직하여 스포츠보도 전문화에 기여하였다.1936년 8월 25일 손기정(孫基禎)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소식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말소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미술담당 기자였던 화가 이상범(李象範)에게 일장기 말소를 요청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창당에 참여하여 조직부 차장을 맡았다. 1945년 『동아일보』 복간과 더불어 사업부 차장으로 복귀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정치범 처벌령위반,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을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20-12-2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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