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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740
성명
한자 金龍煥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911년 김상태 의진(金尙台義陣)에서 활동(活動)한 이래 만주(滿洲)에 거액의 군자금(軍資金)을 제공했다 하며 활동 내용(活動內容)미상(未詳)이나 3번 피체(被逮)사실(事實)이 있고 1922. 10월 (頃)에는 의용단(義勇團)입단(入團)하여 경북(慶北) 서기(書記)로 임명된 후 경상도(慶尙道) 일대(一帶)에서 군자금 모집(軍資金募集)동지 포섭(同志包攝) 등의 활동(活動)을 계속하다가 체포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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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08년 이강년(李康秊) 의병장의 의진에 참가하여 김현동(金賢東)과 함께 적정(敵情) 탐지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1911년에는 김상태(金尙台) 의진(義陣)에 참가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는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해 도만(渡滿)한 독립운동자들과 연결되어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가,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세 번이나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

그럼에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오히려 독립운동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3·1운동 이후 조직된 의용단(義勇團)에 가입하여 경북 지단(支團)의 서기(書記)로 활약하였다.

의용단은 김찬규(金燦奎) 등이 만주 길림(吉林)의 군정서(軍政署)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군 지원단체였다. 주로 경상북도와 남도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용단은 경북 안동을 비롯하여 영천(永川)·군위(軍威)·영일(迎日)과 경남 창녕(昌寧)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들은 독립운동자금요구서 및 시국에 대한 경고문, 길림군정서 발행의 사형 선고서와 같은 문서들을 각처의 부호들에 우편으로 우송하였으나 친일부호들의 외면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일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22년 12월 28일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08·211면
  • 회문 김현동선생 약사(1984) 5면
  • 안동판독립사(김을동편저, 1985) 115면
  • 동아일보(1922. 12. 20, 12. 22, 12. 23, 12. 30)
  • 형사사건부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6권 934·938면
  • 매일신보(1922. 12. 21, 12. 3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용환 자: 여현(汝見) 경상북도 안동(安東)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사건
본문
1887년 (음)2월 27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鷄里, 속칭 금계마을)에서 아버지 김응모(金應模)와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 權氏)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여현(汝見)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13대 종손이며 1896년 안동에서 의병을 주도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손자이다.전통 유림 가문의 분위기에서 김흥락의 문인인 숙도(叔度) 최환(崔桓)에게 수학하였다. 1896년 예안의병장으로 활동하고 일제의 강제병합 후 자결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손녀이며, 파리장서 의거를 추진한 기암(起巖) 이중업(李中業)의 장녀인 진성 이씨(眞城, 李氏)와 결혼하였다. 다시 안동 권씨(安東, 權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고 김시인(金時寅)을 양자로 들였다.할아버지 김흥락과 문중의 항일투쟁에서 영향을 받아 1907년~1908년 무렵 금계마을의 김현동(金賢東)과 함께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와 김상태(金尙台)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1919년 만세운동 후 금계마을에서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광동학술강습소(廣東學術講習所)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1920년 무렵에는 김원식(金元植)과 함께 만주로 가는 도중 신의주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까닭을 알 수 없으나 1921년까지 세 번이나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1921년에는 항일비밀결사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에 가입하였다. 의용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계를 가지고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경북 영주 출신의 김찬규(金燦奎)가 만주에서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李相龍)의 밀명을 받아 국내 군자금 모집자의 임명을 위하여 서로군정서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이 발급한 자금모집 사령서(辭令書) 와 사형선언서(死刑宣言書), 기타 다수의 문서와 권총, 탄환 등을 받았다. 조직은 경북과 경남으로 이원화하여 경북단장은 신태식(申泰植), 경남단장은 김찬규가 맡았으며, 경북 지단(支團)의 서기를 담당하였다. 단원은 영남지방 인사들이었다.의용단은 경북 안동을 비롯하여 경산·청송·영천·군위·영일과 경남 창녕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자금 모금은 대상자에게 사령서를 발송하여 자발적으로 모금하는 방식, 단원이 대상자를 찾아가 요구하는 방식, 단원이 갹출하는 방식, 약품 판매를 가장한 방식, 종교단체의 포교 활동을 활용한 방식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하였다. 이 무렵 종가 재산의 대부분이 처분된 사실을 볼 때 상당한 규모의 군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1922년 11월에 의용단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2월 붙잡혀 대구감옥에 갇혔다. 의용단 서기를 맡아 군자금 모금 활동과 서로군정서로 송금한 내역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안동지역의 대표적인 문중의 종손이라는 지역 유력 인사들의 청원과 당시 일제가 민족분열정책의 일환으로 회유하려는 의도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하여 풀려났다.19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가하였다. 안동 출신으로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朝鮮民立大學設立期成會)의 집행위원이자 지방부의 경북 담당위원인 유인식(柳寅植)이 안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자, 안동·예안·풍산 지역과 우리청년회도 호응하였다. 7월 11일에 안동청년회(安東靑年會) 회관에서 4개 청년회가 공동 주최한 ‘민립대학 지방부 창립준비위원회’에 이운호(李雲鎬)·권영일(權寧一)·허억(許億)·이재교(李在敎)·유주희(柳周熙)·유동저(柳東著) 등과 함께 준비위원(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준비위원회는 8월 10일에 창립총회를 가지기로 결정하였지만, 이후 활동이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안동지방부는 창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6년 7월 10일 안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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