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 전남 완도군 완도면 읍내에서 예수교와 천도교도를 규합하여 송내호(宋乃浩)·최형천(崔亨天)·신준희(申俊熙)·김경천(金景天)·강정태(姜正泰)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폈다. 1924년 전남 완도군 소안면(所安面)에서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를 개최하여 입회경찰을 퇴장시키고 악질지주 이강채(李康彩)가 노농회를 반대하고 있으므로 절교할 것을 선언하는 등 항일세력의 결집에 힘쓰다가 일경에 붙잡혀 1925년 5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공무집행방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월 전남 완도군에서 조직된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에 가입하여 부회장이 되어 박흥곤(朴興坤)·송기호(宋琪浩) 등과 함께 사립소안학교(私立所安學校)내에 병설된 중학강습소(中學講習所)를 비롯하여 면에서 개최되는 강연회와 배달청년회·독서회 등을 이용하여 항일의식과 사회주의 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1926년 7월 13일 완도군 소안 면민들의 갹출금(醵出金)으로 설립된 소안학교를, 일제가 강제로 폐교시켜 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하려는데 반대하는 면민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사회를 맡아 진행하고, 면민이 원하지 않는 공립보통학교를 강제 설립하려는 이유를 알기 위하여 김사홍(金仕홍)외 1명을 선발하여 전남도청(全南道廳)에 파견하기로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5월 10일 일본 대판(大阪)에서 완도향우회(莞島鄕友會)·동경향우회(東京鄕友會)와 협동하여 재일본노동총동맹(在日本勞動總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완도사립학교의 강제 폐쇄에 대항하여 조선총독부 실정반대실행위원회(失政反對實行委員會)를 조직하고 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7년 6월 재일조선노동총동맹(在日朝鮮勞動總同盟) 위원장으로 대판(大阪) 항구에서 4개단체 의원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대회를 열 때 축사를 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7년 8월 7일 전남 완도 소안학교의 강제폐교에 반대하여 복교운동이 맹렬하게 일어나 동경과 대판 재류 완도향우회에서 복교동맹(復校同盟)을 조직할 때 대표가 되어 동경으로 파견되었으며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東京支會) 강소천(姜小泉)과 함께 일본내각 문부대신과 학무국에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1928년 5월 재일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국내에서 급파된 형사대에게 동경에서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후 제4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조직에 연루, 1929년 7월 18일 일경에 붙잡혀 동년 9월 8일 신의주지방법원을 거쳐 1930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415·537面
- 朝鮮獨立思想運動의 變遷(朝鮮總督府 法務局) 73面
- 莞島郡誌(莞島郡) 25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22∼625面
- 朝鮮日報(1924. 10. 28, 11. 2, 1925. 2. 9, 1926. 7. 20, 1927. 6. 6, 6. 24, 8. 7, 9. 24, 1928. 5. 3, 1929. 7. 18, 1930. 5. 16)
- 判決文(1930. 3. 31 大邱覆審法院)
- 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360∼364面
- 全羅南道誌(全羅南道誌編纂委員會) 第1卷 854面
- 東亞日報(1924. 10. 27, 1925. 2. 9, 4. 2, 5. 26, 1927. 3. 13, 1928. 6. 5, 7. 8, 1929. 12. 8, 12.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