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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15
성명
한자 宋文根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4.2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성주읍(星州邑)에서 이기정(李基定), 송인집(宋寅輯)등과 함께 성주읍(星州邑) 장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한 후 이날 모인 700~800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일경들의 발포로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렵게 되자 산상(山上)에 올라가서 불((火))을 피워놓고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1월 18일간의 옥고를 치른 주동자로서의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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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성주군 초전면(草田面)에 살고 있었으며 서울에서의 3·1독립운동에 이어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적으로 펴져 우렁찬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이곳 유림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3월 28일 성주읍 장날에 선남면(船南面)에 사는 이현호(李玄琥) 등이 독립만세를 부른 일이 있으나 큰 운동으로 확대되지는 못하였고, 4월 2일 유림측과 기독교측이 연합전선을 펴 봉기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때 월항면(月恒面)의 유생 이기정(李基定)은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봉기상황을 알게 되어, 동지 송인집(宋寅輯)과 더불어 군내 양반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들은 그후 송씨문중(宋氏門中)에서 유력한 수 명을 불러 협의한 후 성주읍 장날을 기하여 궐기할 것을 계획하고 군내 유림에게 연락하여 규합체를 형성하여 의거준비를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모여든 700∼800명의 장꾼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나 일경의 발포로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는 산위로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고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7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66∼468面
  • 判決文(1919. 8. 21 大邱覆審法院)
  • 3·1運動實錄(李龍洛) 791·1051·1053·1056·1057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송문근 자 : 회부(會夫) 경북 성주(星州) 성주군 성주면 만세운동
본문
1895년 9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고산동(高山洞)에서 송준복(宋浚福)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야성(冶城)이며, 자는 회부(會夫)이다. 일찍이 삼종숙(三從叔)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가세가 곤란하여 중도에 그만두고 집에서 주경야독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1919년 성주군 성주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1919년 만세운동 이후 유림단의 독립청원 운동을 주도했던 송준필을 후원하였다. 유림단의 독립청원서를 휴대하고 김창숙(金昌淑)이 상하이(上海)로 떠난 뒤, 삼종숙 송준필, 사종형 송회근(宋晦根), 그리고 족친 송규선(宋圭善)·송우선(宋祐善)·송수근(宋壽根) 등과 함께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高山里)에 있는 백세각(百世閣)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통고문을 각처로 배포하는 등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듣게 된 성주면(星州面) 용산동(龍山洞, 현 성주읍 용산리)의 김희규(金熙奎)가 대가면(大家面) 옥화리(玉花里)의 교회 조사(助事) 유진성(兪鎭成), 초전면(草田面) 동포동(東浦洞, 현 동포리)의 기독교인 오임오(吳任吾) 등을 규합하여 4월 2일 만세시위에 함께 참여하기로 하였다.4월 2일 오후 1시 성주면 경산동(京山洞, 현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시장 중앙에 모였던 유림 측의 일원으로 송우선(宋祐善)·송회근(宋晦根)의 주도 하에 송수근·송훈익(宋勳翼)·송규선·이봉희(李鳳熙) 등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 만세시위에서 일제 경찰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의 2명이 현장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으며,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제 경찰이 주도 인물 체포에 나선 후, 붙잡혀 모진 조사를 거친 후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받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0월 대구지방법원 1919-05-2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소 기각 대구복심법원 1919-08-2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백세각 항일의적비 경상북도 성주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생가 백세각 경상북도 성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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