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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367
성명
한자 高瀛豪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3. 3. 대판중학교(大阪中學校) 졸업후(卒業後) 동지(同志)들과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堂)조직(組織)하여, 일본(日本) 대판지방(大阪地方)에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다 일경(日警)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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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일본 대판(大阪)중학 졸업 후 1943년 동지 윤병윤(尹炳允)·김규성(金奎成) 등과 민족의식 고취, 독립국가 건설을 서약하고 "조선독립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4월 명치(明治)대학 재학중 이러한 활동내용이 일경에 탐지되어 붙잡혔으며, 1944년 1월 28일 대판(大阪)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44. 1. 28 일본대판지방재판소)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고영호 창씨명 : 고원방웅(高原房雄) 제주 -
본문
1920년 12월 16일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한림면(翰林面) 한림리(翰林里)에서 제주목(濟州牧) 주사(主事)였던 고성현(高成鉉)의 셋째아들으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고원방웅(高原房雄)이 있다. 1934년 구우공립보통학교(舊右公立普通學校, 현 한림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구우공립보통학교 6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장 나카야마(中山重義)가 한국어 사용을 억제하는 데에 항의하였다가, 정학(停學) 처분을 받을 상황에 처하자 맏형이 살던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오사카심상고등소학교(大阪尋常高等小學校)를 거쳐 오사카중학(大阪中學) 2부에 다니면서 노동을 병행하는 등 고학생(苦學生)으로 생활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진학하였다. 일본에서 노동을 하던 때부터 한국인에 대한 극심한 멸시와 민족 차별을 경험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5월 9일 일제 당국이 한국인에 대한 징병제도 실시를 발표하자, 오사카중학 동창이던 마산 출신의 윤병윤(尹炳允)이 적극적으로 동료 학우들을 규합해 나가자 이에 참여하였다. 이후 5월 중순경 윤병윤·이형휘(李炯徽)·김규성(金奎成)·한종치(韓宗治)·정진환(鄭鎭煥)·하백문(河伯文) 등 여러 명의 동지와 함께 오사카 히가시나리구(東成區)의 한 주택에 모여 비밀결사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정식으로 조직을 결성하기에 앞서 당면한 정세 인식 등에 대해서도 서로 합의하였다. 일본이 5년에 걸친 중국과의 전쟁에 이어 다시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치르게 되어 여러 면에서 전력(戰力) 소모가 심각하다고 보았다. 특히 1942년 4월 18일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일본 내에서 반전주의(反戰主義)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어서 결국 일본은 경제적으로 패전할 것은 필연적이니, 이 기회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호기(好期)라고 합의하였다. 따라서,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즉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서울에 운동본부를 설치하고, 도별로 유력자, 청년층, 종교단체 등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을 완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독립청년당의 강령으로는, “① 우리는 한국 남아(男兒)다(한국인으로서 자각할 것), ② 신념의 피력(자기 의견을 기탄없이 서로 말하되 가급적 한국말을 사용할 것), ③ 정신력의 양성(항상 태연자약하도록 수양할 것), ④ 지식의 흡수(중등학교에서도 철학이나 사회학을 연구하고 전문학교나 대학에 진출하는 것은 더 의의가 있다는 것), ⑤ 인격의 향상(항상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타인의 의견을 정청(靜聽)할 것), ⑥ 신의(이러한 석상에서의 회합 내용은 아무리 조그마한 것이라도 발설하지 말 것)”로 정하였다. 그해 6월 말경 조선독립청년당원들이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착수하는 시기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전문학교나 대학에 진학하여 좀 더 지식을 쌓은 후 귀국하여 본격적인 운동에 착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따라서, 이후 당원의 자질을 연마하고 동지를 계몽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정하고, 40여 회에 걸쳐 회합하며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43년 2월 고베시(神戶市) 한 집에서 만난 것을 마지막으로, 경남 출신 장학윤(張學潤)의 밀고로 그해 3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은 후 같은 해 10~11월 사이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월 28일 오사카지방재판소(大阪地方裁判所)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도받았으며, 5월 3일에 형이 확정되었다. 오사카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45년 7월 6일에 형 집행 만기로 출옥하였다. 8·15 광복 이후인 1945년 10월 초, 제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송성철(宋性徹)을 중심으로 하여 오사카공회당(大阪公會堂)에서 개최된 한민족 궐기대회에 참석하였다. 일본에 남아 메이지대학에 복학하였으며 1947년 봄에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무역업과 운수업 등에 종사하던 중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전란 중 몸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았다. 완쾌 후 도쿄 아라카와구(荒川區) 닛보리(日幕里)에 있는 평화화공주식회사(平和化工株式會社)의 상무, 신광상사(新光商社) 전무 등으로 일하다가 1984년에 영구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당시 주일대사(駐日大使) 최경록(崔慶祿)을 통해 받음])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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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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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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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3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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