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박민영은 1920년, 수찬시 부근 아르군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1924, 5년경 블라디보스톡에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25년 7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 후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로 들어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박민영은 국내에서는 화요회에 가입해 프랙션활동을 하였다. 1926년 1월경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비서부에 배속되었고, 2월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김철수와 함께 국제 혁명자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경성부 제1구 제7야체이카 책임을 맡았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맞이하여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격문과 선언서 등을 인쇄하고, 중국 상해에서 적화선전문을 서울로 들여오다 거사 전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6월 6일부터 관계자 및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 관련자들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모두 101명이 검거되었는데, 박민영은 본 사건의 주요인물 17명에 포함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어가 취조를 받았고,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년 9개월 여의 심리를 걸쳐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조선공산당사건 판결공판이 열렸다. 여기서 박민영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9년 9월 16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박민영은 1929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해 연락부를 담당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무렵 광주사건 이래 전국적으로 학생소요가 일어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1930년 2월 초, 일제의 검거를 피해 김단야(金丹冶)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박민영은 1938년 3월 13일 러시아에서 반혁명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5월 9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 협의회에 의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57년 4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 협의회의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興南7·5第1事件: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全政琯 訊問調書(第八回)(1926.7.20)
- 朝鮮共産黨事件 檢擧에 關한 件(朝保秘 第1019號, 1926.9.1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 7
- 東亞日報(1926. 7. 2·13·14·1927. 4. 3, 9. 13·1929. 8. 17)
- 스탈린 시대(1934~38년) 정치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 1권·5권, москва, 2000·2004, 126면·161~168면
- 身分帳指文原紙(警察廳)
- 興南7·5第1事件: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朴珉英 訊問調書(第二回)(1926.8.16)
- 朝鮮共産黨事件 檢擧에 關한 件(朝 第2155號, 1926.9.16), 朝鮮共産黨事件關係者 住所氏名 제1차사건
- 朝鮮共産黨員 檢擧에 關한 件(京東警高秘 第850號, 1930.4.12), 思想에 關한 書類 1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제2권 384~387·395·402·432·434면
-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역사비평사)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19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