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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1143
성명
한자 朴珉英
이명 朴니키포르, 알렉산드로 비치, 朴니끼뽀르, 박니키포르, 박니끼뽀르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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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6 훈격 애족장
블라디보스톡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으로 1925년 7월 조선으로 건너와 1926년 3월 권오설(權五卨)의 권유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당 청년회에 가입하여 6·10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가 체포되어 1928년 2월 13일부터 14일 사이에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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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박민영은 1920년, 수찬시 부근 아르군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1924, 5년경 블라디보스톡에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25년 7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 후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로 들어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박민영은 국내에서는 화요회에 가입해 프랙션활동을 하였다. 1926년 1월경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비서부에 배속되었고, 2월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김철수와 함께 국제 혁명자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경성부 제1구 제7야체이카 책임을 맡았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맞이하여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격문과 선언서 등을 인쇄하고, 중국 상해에서 적화선전문을 서울로 들여오다 거사 전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6월 6일부터 관계자 및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 관련자들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모두 101명이 검거되었는데, 박민영은 본 사건의 주요인물 17명에 포함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어가 취조를 받았고,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년 9개월 여의 심리를 걸쳐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조선공산당사건 판결공판이 열렸다. 여기서 박민영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9년 9월 16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박민영은 1929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해 연락부를 담당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무렵 광주사건 이래 전국적으로 학생소요가 일어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1930년 2월 초, 일제의 검거를 피해 김단야(金丹冶)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박민영은 1938년 3월 13일 러시아에서 반혁명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5월 9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 협의회에 의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57년 4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 협의회의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興南7·5第1事件: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全政琯 訊問調書(第八回)(1926.7.20)
  • 朝鮮共産黨事件 檢擧에 關한 件(朝保秘 第1019號, 1926.9.1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 7
  • 東亞日報(1926. 7. 2·13·14·1927. 4. 3, 9. 13·1929. 8. 17)
  • 스탈린 시대(1934~38년) 정치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 1권·5권, москва, 2000·2004, 126면·161~168면
  • 身分帳指文原紙(警察廳)
  • 興南7·5第1事件:治安維持法違反被疑事件(朴珉英 訊問調書(第二回)(1926.8.16)
  • 朝鮮共産黨事件 檢擧에 關한 件(朝 第2155號, 1926.9.16), 朝鮮共産黨事件關係者 住所氏名 제1차사건
  • 朝鮮共産黨員 檢擧에 關한 件(京東警高秘 第850號, 1930.4.12), 思想에 關한 書類 1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제2권 384~387·395·402·432·434면
  •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역사비평사)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19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민영 朴니키포르(朴니끼뽀르, 박니키포르, 박니끼뽀르), 알렉산드로 비치 중국 고려공산청년회, 조선공산당
본문
1904년 2월 9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소영자촌(小營子村)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박(朴)니키포르 알렉산드로비치(Пак Никиф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를 사용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고,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1926년 3월 권오설(權五卨)로부터 권유를 받아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각각 입회·입당하여, 경성부 제2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1926년 5월 3일에는 권오설·이지탁李(智鐸)과 함께 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여기에서 6월 10일 순종(純宗)의 장례에 동지들과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권오설에게 총책을 맡겼다.하지만 종로경찰서에서는 이전부터 의심되는 인물에 대한 조사와 검거를 하고 있었다. 결국 6월 6일 숨겨두었던 선전문이 발각되어 본격적으로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시작되자 붙잡혔다. 6월 19일 권오설 등 동지 13명과 함께 피의자로 지목되어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7월 2일 오후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고, 7월 12일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었다.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9월 16일 출옥하였다.1929년 11월 초순 김단야(金丹冶,본명 김태연(金泰淵))·김한(金翰)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1월 27~28일 해외에서 입국한 인물들이 장기간 국내에 있는 것은 발각될 위험성이 크니, 당재건운동과 조직 활동은 이전부터 국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에게 인계하고 계속 국외에서 운동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김단야로부터 책임비서 자리를 넘겨받았다.이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 하던 중 1930년 2월 김단야와 함께 러시아로 출국하였다. 일본 경찰 측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계속 수색하였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3월 13일 ‘반혁명 활동’ 혐의로 붙잡혀 총살형을 받았다. 같은 해 5월 9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경성지방법원 1928-02-13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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