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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871
성명
한자 李剛
이명 호:吾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4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미국에서 안창호(安昌浩)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
2. 해삼위(海蔘威)에서는 대동공보(大同共報) 주필로 조국의 독립을 고취하고
3.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이등(伊藤) 살해에 협조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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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평안남도 용강(龍岡)군 봉산(鳳山)면 황산(黃山)동에서 태어났다.

1902년 미주개발회사(美洲開發會社)에서 모집하는 이민에 들어서 하와이로 건너가 1년간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유학을 하려다가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그의 권고로 이를 단념하고 안창호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교민단체로서 1904년에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설했으며, 1905년 11월에 동지들과 함께 기관지인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07년초에는 안창호와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기로 하고 안창호를 먼저 귀국시킨 후 뒤이어 이강도 귀국하여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이 강은 몇 달 후에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신민회 블라디보스톡 지회를 설치하였다.

1909년 2월에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단체로서 미주에서 종래의 공립협회를 확대개편하여 재미주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조직되자 정재관 등과 함께 이에 보조를 맞추어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과 지회를 설치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창간하여 편집 논설기자로 활동했으며, 이 신문이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이름을 고친 후에도 그 편집책임을 맡았다.

1909년 10월 이등박문(伊藤博文) 처단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이에 참석하였으며, 안중근(安重根)이 이등박문 포살의 특공대로 하얼빈에 나갔을 때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의 의거가 성공한 후에는 안중근 의사를 위한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하여 북경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대동공보』가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정간 당하자 시베리아의 치타로 가서 다시 『정교보(正敎報)』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9년 9월에 노령에서 파견한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일제총독 재등(齋藤)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에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약 50일간 구금되었다.

1919년 말에 석방되자 바로 상해로 탈출하여 안창호를 만나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했으며 흥사단(興士團) 운동에 진력하여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興士團遠東地方委員會)를 설치하였다. 일제의 세력이 장강(長江) 일대에까지 뻗치게 되자 상해를 떠나 남중국 방면으로 갔다. 1928년에 하문(廈門)에서 강연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납치되어 평양으로 호송되었으며 징역 3년형의 선고를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자 다시 고국을 탈출하여 중국 복건성(福建城)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대만에 있는 한국 동포들에 대한 선무단(宣撫團) 단장이 되어 대만으로 갔다가 1946년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5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47 7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19 23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55 66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04 66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88 399 44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19면
  • 기려수필 24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343 345 786 829 831 867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2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36 82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27 58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211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44면
  • 고등경찰요사 96 12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667 698 69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66 45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18 92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6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강 본명 : 이정래(李正來), 호 : 오산(吾山·鰲山), 이명 : 이필례(李弼來) 평남 용강(龍岡) 하얼빈의거
본문
1878년 4월 18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산남면(山南面) 의방리(義方里, 현 봉산면 의산리)에서 아버지 이병훈(李秉勳)과 어머니 박성심(朴誠心)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본명은 이정래(李正來) 또는 이필례(李弼來)라고도 하였다. 호는 오산(吾山)·(鰲山)이다. 연해주로 이주한 뒤에 이강(李剛)으로 불렸다. 부인 안혜반(安惠盤)은 1893년생으로 함경북도 경흥(慶興) 출신이다. 1909년 내지 1910년 연해주에서 만나 결혼해 슬하에는 딸 이신애(李新愛)와 아들 이숙(李肅)을 두었다.어린 시절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용강에 온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래되자 집안이 모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2년에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1903년 홀로 이민을 결행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근 1년간 노동에 종사하였다. 노동 계약이 끝나자 1904년 3월에, 북미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건너갔으며 이곳에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상항(桑港)한인친목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안정적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Riverside)로 이주하였는데, 당시 리버사이드는 오렌지농업이 크게 번성해 값싼 노동력을 구하는 수요가 많았다. 리버사이드로 모인 한인들은 파차파(Pachappa)에 캠프를 만들어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기독교 미이미교회(미국 북감리회) 전도사로 활약하였다.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가 출범하면서 공립협회 리버사이드 지방회장에 선임되었다. 노동소개소를 열어 철로공사장과 오렌지 농장 등지에서 노동일을 주선해주고 리버사이드 한인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1907년 1월 초순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임준기(林俊基)·박영순(朴榮淳)·이재수(李在洙) 등과 함께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발기하였다. 1907년 6월 30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려다 실패한 정재홍(鄭在洪)을 비롯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인 이준(李儁)과 박승환(朴昇煥) 등의 사망 소식이 연이어 전달되자 공립협회가 열은 추도대회에서 정재홍의 사적과 애국정신을 연설해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1907년 공립협회 원동위원으로 임명되자 제1차 원동위원으로 파견된 김성무(金成武)에 이어 아세아선박 편으로 9월 중순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제대로 된 언론이 없었던 상황에서 언론 활동을 전개할 생각으로 귀국 도중 일본 도쿄(東京)에서 신문발간을 위한 주자(鑄字)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초등학교 교과서류를 구입해 귀국하였다. 이들 교과서는 연해주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할 때 사용되었다.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에서 구국계몽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1908년 3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1908년 2월에 창간된 『해조신문(海潮新聞)』 편집인으로 참여하고 배일성향이 강한 인물들로 구성된 재러 한인거류민회와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 등 기존 조직의 유력인사들과 민족운동의 방향을 함께 하기로 의기투합하였다.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이를 계승해 1908년 11월 18일에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창간하고 주필이 되어 활발한 항일 언론투쟁을 펼침과 동시에 기독교회를 설립해 직접 설교를 담당하였으며 1년 과정의 사범학교를 신설해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였다.1909년 10월에 들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동공보사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 이토를 처단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여러 지원자 중에 안중근(安重根)이 적임자로 추천되자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 와줄 것을 청하였다. 하얼빈의거는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다. 하얼빈으로 떠나는 안중근 일행을 유진률(兪鎭律)과 함께 환송하며 “지금 삼천리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며 격려하였다.안중근이 사망하자 고향에 남은 유족들을 러시아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안중근의 의로운 의열투쟁의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살아있는 민족정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안중근기념사업을 일으켰다. 대동공보사를 반일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라 여긴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폐간을 종용하며 압력을 가해 대동공보사 주필을 사퇴하였고 『대동공보』는 1910년 9월 1일자(지령 135호)의 종간호를 발행한 후 폐간되었다.또한 공화주의를 전파하는 친미 세력이라는 혐의를 받고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이에 시베리아 지방총회를 자바이칼주 치타(Chita)로 이전하고 안정된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러시아정교로 개종하고 1912년 1월 『대한인정교보』를 발간하였다. 『대한인정교보』는 종교 신문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일제의 학정과 탄압을 강도있게 비판하는 논설을 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일 간에 동맹관계가 형성되면서 독립운동은 침체상태에 빠졌다. 일제는 『대한인정교보』의 폐간을 러시아 당국에 계속 요구하였다. 러시아 당국에서도 “가장 위험한 반일 선동 요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치타주 한국인 정교선교사단 산하에서 교리문답을 담당하는 이강”이라고 확신하였다.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혁명의 정세를 이용해 재러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부흥시키고자 가장 발 빠르게 행동하였다. 1918년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였을 때, 치타에서 니콜스크(현 우수리스크)로 이주해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에 적극 가담해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을 방해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무기제공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였다.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성립되자, 서파 대표로서 참석하였으며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 결성 때에도 참여하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끊어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도 조직적 연계를 시도하였다.블라디보스토크 해성병원 안에 기독청년회를 설치하고 총무로 활동 중에 1919년 9월 일제 영사관 경찰에 붙잡혔으며, 서울로 압송되어 종로경찰서에서 1개월 17일 동안 구금당해 취조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약 8개월간 국내에 체류하며 상태를 관망하다가 또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였다. 1920년 8월 재러 한인 독립운동가와 북간도지역 한인들의 주도로 결성된 신민단(新民團)의 부단장으로 임명되어 항일 무장투쟁 전면에 나섰다.한편 기독교청년회를 통해 한국과의 관계를 유지해 1921년 5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생 음악단 일행 10인을 이끌고 단장으로서 한국을 방문해 마산(馬山)·군산(群山)·이리(裡里)(현 익산)·광주(光州)·목포(木浦) 등지에서도 연주회를 개최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기도 하였다.연해주 지역까지 소비에트화하는데 성공한 노농정부는 러시아 영내에서 일체의 독립운동은 물론 민족운동마저도 불허하자 러시아 영내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45세 되던 해인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이주하였다. 상하이에서 안창호를 만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하여 독립군의 양성과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는 등 행보를 함께 하였으며 1925년 1월 28일에 흥사단(興士團) 원동임시위원부(遠東臨時委員部) 통상단원으로 입단하였다.1926년 중반에 흥사단의 이상촌 건설을 위해 셔먼(廈門)을 방문하였다가 그곳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서 국내로 압송되었으며, 재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30년 8월 만기로 풀려났다.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시 망명길에 올라 1933년 장쑤성(江蘇省) 진장(鎭江)으로 이동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당시 임시의정원에 복귀해 제12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8년 이후 장시성(江西省) 진장(晉江)(현 푸젠성)에서 사립 초급농업 직업학교에서 영어교사, 숭문(崇文) 중학교 강서분교의 교원으로 복무하며 교육에 종사하였다.1941년 임시정부 산하 군대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충칭(重慶)에서 결성되고 중국 각지에서 특무활동을 전개할 때, 중국 학교에 교원으로 복무하며 장시성 옌산(鉛山)에 주둔한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의 모병 활동과 함께 닝안(永安)·난핑(南平)·젠양(建陽) 등지에서도 광복군 징모 활동에 전력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임시정부는 중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조사, 구제하기 위해 중국 외교부 주대만(駐臺灣)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1946년 8월 타이완(臺灣)으로 갔다. 귀국을 미루고 이곳에서 선무단(宣撫團) 단장으로 임명되어 타이완에 있는 한국 동포의 안전 귀환을 위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무사히 임무를 마친 후 1947년 1월 22일에야 고국을 떠난 지 45년 만에 인천항을 통해 귀국하였다.귀국 후 한국독립당 고문으로 활약하였으며 1947년 안창호 서거 9주기를 맞이해서 설립된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상무위원으로 안창호 기념사업에 착수하였다. 한중협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흥사단 심사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광복회 초대 회장에 임명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이 수복되자 육영사업에 투신해 서울 남산고등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교육에 종사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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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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