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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5월 16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창원면(昌原面) 중동리(中洞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설관수(薛灌銖)를 사용하였다. 창원면 읍내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창원군 만세운동은 총 8차례 발생한 것이 자료로 확인된다. 계획부터 직접 주도한 창원면 읍내 만세시위는 창원 시장 장날을 계기로 전개된 군내 최초의 만세시위였다. 3월 23일 1차 만세시위가 일어난 이후, 4월 2일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2차 만세시위가 전개된 특징이 있다. 참가한 군중도 1차 시위 5,000명, 2차 시위 6,000명으로 군내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 중 가장 큰 규모였다.만세운동을 계획한 계기는 배중세(裵重世)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것이었다. 즉시 공도수(孔道守)·조윤호(曺潤鎬)·조희순(曺喜舜) 등 군내 민족주의 인사들과 중동리 청년회관에서 회합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거사를 제의하였다. 회합에 참가한 인사들은 즉석에서 찬동하고 이후 비밀 회동을 거듭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군중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군중동원을 위한 연락 분담 등을 나누어 준비하였다.2차에 걸친 대규모 만세시위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선창, 그리고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창원 시장과 읍내 중심가를 행진 할 때에도 시위대의 맨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군내 중심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제 군경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총력을 기울여 진압에 나섰다. 군내 주재소 경찰과 헌병을 모두 출동시켰음은 물론 인근 마산의 중포병대대와 진해요항부 해군 육전대(陸戰隊) 병력까지 지원 받아 시위대 진압에 투입하였다. 일본군이 직접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대를 향해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고, 비무장 군중들을 ‘폭민(暴民)’으로 규정하고 닥치는 대로 체포하였다. 3월 23일 1차 시위에서만 중상자를 포함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50여 명의 인사들이 붙잡혔다.분노한 군중들은 4월 2일 2차 만세시위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차 때보다 많은 6,0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시위 양상도 보다 격렬해져서 물리력을 동반하였다. 일제 군경은 훗날 관련 보고서에서 열광적인 소요를 겨우 해산시켰다고 기록하였다.가장 핵심적인 만세시위 주도자였지만, 1차 시위 때에는 붙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시위에서는 일제 군경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피하지 못하고 붙잡혔다.이 일로 고문을 동반한 혹독한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부산감옥 마산분감에서 옥고를 겪었고, 1919년 11월 9일 출옥하였다.이후 일본 도쿄(東京)의 와세다대(早稲田大) 정경과(政經科)에 유학하였다. 1923년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때 일본인에 의한 한국인 학살이 발생하자 창원 자신의 집에서 창원유학생향우회 모임을 갖고, 재일창원학생상황조사회(在日昌原學生狀况調查會) 발기를 주도하였다. 자신의 집을 본부로 삼아 동정금 모금과 창원 출신 유학생들의 상황 조사를 실시하였다. 1924년 3월 와세다대를 졸업하였다.1927년 10월 20일 신간회(新幹會) 창원지회 설립대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황금찬(黃金燦)·배종인(裵鐘仁)과 함께 정치문화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31일 마산·창원 사회단체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임시집행부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이외에도 창원 지역에서 양조업, 화물자동차운송업, 정미업, 한약건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이끄는 사업가로 활약하였다. 그 과정에서 창원군 조선주(朝鮮酒) 주조조합(酒造組合) 조합장, 창원국자주식회사(昌原麯子株式會社) 취체역 등을 역임하였다. 1937년 5월 10일 진행된 경상남도 도회 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그 해 8월 23일 사임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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