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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89
성명
한자 李範寧
이명 Philip Young Lee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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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1 훈격 건국포장
1919년 3월 미주(美洲)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다뉴바지방회 회장(會長)으로 3․1 독립선언(獨立宣言)을 지지하는 전문(電文)을 발표하고, 1919~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등에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을 지속적으로 전달하였으며, 1919년 12월 미국(美國) 캘리포니아에서 조소앙(趙素昻)의 외교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노동사회개진당(勞動社會改進黨)을 조직해 활동하고, 1929년 나성지방동지회 회원(會員)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후원활동을 전개하고, 1943년 9월 북미시보 주필(主筆)에 임명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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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이범영은 서울 서대문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월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다뉴바 지방회 회장으로 3,1독립선언을 지지하는 전문을 발표하고, 1919년부터 1944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을 지속적으로 전달하였다.

1919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조소앙(趙素昻)의 외교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노동사회개진당(勞動社會改進黨)을 조직해 활동하고, 1929년 나성지방동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박사 환영회의 개회사를 맡기도 했다. 193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후원활동을 전개하고, 1943년 9월 북미시보(北美時報)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民報(1919. 3. 13, 1919. 8. 2)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8집 721~72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범영 이범녕·이범령, 영어명 : Philip Young Lee 경기 김포 -
본문
1892년 5월 23일 경기도 김포(金浦)에서 부농인 아버지 이병대와 어머니 정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北阿峴洞)이다. 1919년 9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State of California) 다뉴바(Dinuba)에서 김호순과 결혼하였다. 장남 리오 조지는 1942년 미 육군 동원령으로 종군하였고, 차남 에드워드는 1940년 12월 11일 사고로 사망하였다.1895년 콜레라로 부모가 사망하자, 숙부 이병천 집에서 자라며 한문을 배웠다. 1904년에는 할아버지를 따라 인천(仁川)에서 살다가 이병천이 서울로 이사함에 따라 함께 상경하였다. 그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하였다. 이때 신정균·이기붕과 함께 영어학교에 다녔다 한다. 이후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영어교사와 인천의 중화학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서울 배재학당을 다니기도 하였다.1913년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중국 안둥(安東, 지금의 단둥)을 거쳐 상하이(上海)에서 몽골리아(Mongolia) 호를 타고 7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였다. 그후 약 1년 동안 캘리포니아주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노동하였다. 1913년 10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새크라멘토지방회(朔都地方會) 회원으로 활동하며 3달러를 후원하였다. 1914년 4월 30일과 5월 7일에는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에 「마땅히 힘써 속히 고칠 큰 병」이란 글을 게재하였다. 그해 6월 새크라멘토에서 서간도(西間島) 한인의 기황(饑荒) 구휼금 5달러, 9월 새크라멘토 지방회관 유지 의연금으로 1달러를 기부하였다. 9월 8일에는 캘리포니아주 세인트 헬리나(St. Helena)에 있는 패시픽 유니온 대학(Pacific Union Collage) 예비과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였다.1916년 2월 국민회의 클래몬트 학생양성소 중수(重修) 의연금으로 1달러를 기부하였고, 1917년 8월 국민회의 은행채 보상 제2회 발기자로 가입하였다. 이후 1917년부터 중부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에 자리잡고 포도농장에서 노동을 하다 포도를 말려 파는 건포도 사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해 10월 다뉴바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8년 8월 3일 다뉴바지방회 재무에 선임되었다. 그해 9월 신한민보사 식자기계채 청장 동맹자를 모집할 때, 제24회 동맹자로 서약하였다.1919년에도 다뉴바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1월에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주최 장인환(張仁煥) 의사 환영회에서 다뉴바지방회 대표로 축사를 하였다. 2월 다뉴바지방회 주최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개최하였고,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로부터 국내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3월 10일 다뉴바 한인 250여 명과 ‘대한독립선언’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4월 15일에는 다뉴바지방회에서 ‘대한공화국 건설과 신정부 조직’을 축하하는 경축식을 거행하고 개회사를 하였다.같은 해 5월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인구등록 규정을 공고하고 이를 위해 인구등록 총부 위원과 파출소 위원을 임명하자, 이순기·김관유·김진규와 다뉴바파출소 위원으로 독립의연금·사례금 등을 모집하였다. 그해 8월 다뉴바한인교회 목사, 대한여자애국단 단장과 연서하여 한국을 위해 애쓰는 미국 상원의원 스미스(Smith)와 맥코믹(McCormick)에게 감사 전보를 보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적십자회 본부에서 미주에 적십자회 조직과 회비 모집을 명령하자, 적십자회 미주지부 회원으로 가입하였다.1919년 12월 2~3일, 국제사회당대회에 참가한 조소앙(趙素昻)의 외교 활동 후원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살음(李薩音)·이순기·임일·김호·김여식 등과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大韓人勞動社會改進黨) 창립대회를 개최하였고, 같은 달 17일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12차 대의원회에 다뉴바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정인과(鄭仁果)와 대의원회 존발위원(存拔委員)으로 선임되었다.1920년 6월에는 김호(金乎) 등 노동사회개진당 당원들과 조소앙의 국제연맹회의 참가 후원금을 모집 송금하였다. 1921년도 다뉴바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21년 3월에는 일본군이 간도 한인을 대량 학살하는 이른바 ‘간도참변(間島慘變)이 발생하자, 구제금을 기부하였다. 1924년 6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학생회가 독일 거주 한인 고학생을 위한 동정금을 모집하자, 로스앤젤레스 한인들과 162달러 20센트를 모아 신한민보사를 통해 전달하였다. 같은 달 윤필건·오임하·변기현 등과 700달러씩 출자하여 양찬관(서양음식점)을 설립하였다.1925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탄핵되어 면직되자, 5월 노동사회개진당의 이살음·정지영·이순기 등과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 성토문을 보내고 임시정부를 반대하였다. 1928년 9월 로스앤젤레스 한인 2세의 한글 교육을 위해 설립된 국어학교에 20달러를 기부하였다. 1929년 1월 27일 한인공동회를 조직하고 기념식 행사를 공동으로 운영하기로 하자, 김종림·곽임대·최능익 등과 3·1절 기념식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1930년 1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쳐 광주학생운동 후원을 위한 특별후원금으로 26달러를 기부하였다. 1932년 8월 29일 중가주(中加州, 중부 캘리포니아주) 한인공동회 주최로 열린 국치기념식에서 임시정부 후원금 36달러 25센트를 모집하여 송금하였다. 그해 10월 27일 중가주 한인공동회에서 개최한 이봉창 의사 추도회에서 김형순·박희성 등과 추도사를 하였다. 11월에는 구미위원부 후원을 위한 자금 마련차 김형순(金� 珣)과 함께 스탁톤(Stockton) 등 중가주 각지를 순행하였다. 11월 하순 중가주 한인들과 이봉창·윤봉길 의사 가족을 위한 위로금을 모집하였고, 12월에는 리들리(Reedly)한인교회에서 주최한 윤봉길 의사 추도회에서 추도사를 하였다. 1933년 1월 버지니아에 있는 이승만의 여비를 위해 리들리 한인들로부터 235달러 50센트를 거둬 송금하였다. 1935년 1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이주 30년을 기념하여 조직된 ’교미(僑美)30년 기념회‘에 참석하였다.1943년 9월에는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북미총회 기관지 『북미시보(北美時報)』 주필로 선임되어 이듬해까지 활동하였다. 1944년 9월 살음(李薩音)·송헌영(宋憲榮)과 동지회 북미총회 대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제7차 특별회에 이참석하였다. 1945년 6월 한족출정군인친족회에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다 순국·귀환한 한인2세들 기념비 등을 세우기로 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1913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의무금, 국민회 보조금, 국민회 특별의연금, 구미위원부, 독립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이외에도 1919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거의 30년 동안 홀로 독립금을 거둬 구미위원부와 이승만에게 송금하는 일에 전념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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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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