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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월 27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숙천면(肅川面) 도덕리(道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여방(汝舫)으로, 이명으로 신용재(申用才)를 사용하였다. 1915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펑톈(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8년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합류하였으며, 1929년 이후 중국항공서, 충칭(重慶)경비사령부 의무주임 등으로 재직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1931년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대독립당’ 결성에 참여하여 대일전선 통일운동에 나섰다. 1932년에는 난징(南京)에서 윤기섭(尹琦燮)·신익희(申翼熙) 등과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창당하고 일제의 중국 침략에 맞서기 위해 본격적으로 통일동맹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에 ‘통일대당’으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었는데, 창당 시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937년 12월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쓰촨성(四川省) 완현(萬縣)에서 전기물리치료원[(電療院)]을 운영하였으며,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될 때, 기밀주임(機密主任)에 임명되었다.1942년 10월 25일 개원한 제34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 진영의 인사를 포함하여 새롭게 23명의 의원이 선출되어 최대의 성황을 이루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된 직후 손두환(孫斗煥)·송욱동(宋旭東)과 연명으로 ‘독립운동자 생활비 지급안’을 제의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 소재지 즉 충칭(重慶)에 거주하는 직업적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의 생활비를 임시정부에서 지급하도록 하자는 내용으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 해 10월 28일에는 최동오(崔東旿)를 비롯한 27인의 의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국 정부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안에 참여하였다. 10월 29일에는 “국가의 입국정신(立國精神)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은 국가이며, 군(軍)의 정신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은 군가이므로, 본원에서 제정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문일민(文一民)·왕통(王通)·한지성(韓志成) 의원과 ‘국가(國歌)와 군가(軍歌) 제정’안을 제안하였다. 10월 30일에는 상임위원회 제2분과 위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내무·외무·교통·실업에 관한 정무를 감독하였다.1942년 11월 27일부터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車利錫)·(安勳)(조경한 (趙擎韓))·최석순(崔錫淳)·김상덕(金尙德)·박건웅(朴建雄)·유자명(柳子明)과 약헌수개위원(約憲修改委員)(임시헌법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좌익 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면서,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후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그 해 10월에 제정한 「대한민국임시약헌」을 개정하기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대한민국건국강령’에 기반한 임시헌법 내용의 개정 문제를 심의하였다.1942년 12월 5일 회의에서 첫째, ‘인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하였으나 주권의 내용이 없으니, ‘권리’의 항목이 제시되었으면 좋겠다. 둘째, 정부와 의정원에 ‘임시’ 두 글자를 없앴으면 좋겠다. 셋째, 국무위원과 의원의 임기가 있으면 좋겠다. 넷째, 선거구역을 확대하고 신축성 있게 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12월 26일 회의에서는 토지국유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43년 1월 19일 회의에서는 첫째, 정부 명칭을 ‘혁명정부’로 하자. 둘째, 정부제도의 민주화를 위해 행정 각부를 행정위원회로 하자. 셋째, 정부위원회는 위원회와 상임위원회를 두자. 넷째, 각부 위원장은 의정원에서 선출하자. 다섯째, 각부 위원은 ‘사무인재(事務人才)(‘행정 실무능력을 갖춘 인물’의 의미)’ 위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약헌수개위원회 위원들은 총 22차례에 걸쳐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43년 6월 28일 임시약헌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임시약헌 개정은 이때 이루어지지 않고, 1944년 4월에 열린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통과되었다.한편 1943년 2월에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7차 대표대회에서 김원봉(金元鳳)·(成周寔)·손두환(孫斗煥)·(金仁哲)과 함께 중앙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제7차 대표대회는 광복을 내다보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을 이루는데 조선민족혁명당도 동참하기 위한 인적 개편을 단행한 것인데, 당의 주석으로 김규식(金奎植)을 선출하고 김원봉은 총서기를 맡았다. 이 시기 정당 활동을 주도하면서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였다. 1943년 5월 29일 열린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조완구(趙琬九)·박찬익(朴贊翊)·김순애(金淳愛) 생계부(生計部) 생활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어서 1944년 5월 6일 국무회의에서는 임시기구로 생계설계위원회의 설치를 의결하였는데, 황학수(黃學秀)·차리석·김붕준(金朋濬)과 설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충칭의 독립운동가와 교민들의 활동과 안전을 위해 힘썼다.1945년 2월 7일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한 유동열(柳東說)·신공제(申公濟)(이광제 (李光濟))·강창제(姜昌濟) 등과 신한민주당(新漢民主黨)을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과 경제위원회 주임위원에 선임되었다. 신한민주당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갈등을 “중간에서 조정 역할을 맡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1945년 4월 11일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상임위원회 제5분과(청원·징계·교육·실업) 위원에 선임되었고, 5월 8일 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 제2과(내무·외무·교육·산업)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8월 13일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세서는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고 김원봉·손두환(孫斗煥)·김상덕(金尙德) 등 20명의 의원들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돌려주기로 하고,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의안 제안에 참여하였다.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1945년 8월 23일 열린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손두환을 비롯한 16명의 의원들과 연명으로 “국내 및 국제적 정세에 비추어 현 내각은 즉시 총사직하고 간수내각(看守內閣)을 조직하여 시의(時宜)에 필요한 일체 시급한 사무를 처리토록” 하자고 제안하였다.1946년 1월 4일에는 ‘충칭거주 한국독립운동자대회 대표’의 일원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반대 의사를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에게 발송하여, 즉각 독립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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