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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80
성명
한자 申杜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2001 훈격 대통령표창
1944. 4월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에 재학 중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학생들이 조직한 독립운동(獨立運動) 비밀 결사(秘密結社)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한 후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과 연계하여 기관지(機關紙) ‘새벽’을 발간 배포하여 항일사상(抗日思想)고취하는 등 활동하다가 1945. 3월초 피체(被逮)되어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광복(光復)으로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을 받고 출옥(出獄)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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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에 재학 중이던 1944년 4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하였다. 명성회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개탄하고 이정선(李貞善)·권태염(權泰琰)·정현모(鄭賢模)와 함께 정세를 틈타 무장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지하결사이다. 신두수는 명성회의 기관지 '새벽'지를 일문(日文)과 국문(國文)으로 간행하여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경주중학교·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등의 학생들에게 배포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는 '새벽'지의 논설주필로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군에 의하여 곧 패망한다는 논조를 펼쳐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명성회는 1944년 11월 조선회복연구단(朝鮮恢復硏究團)과 연합하여 1945년 2월 17일 무장봉기를 결행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조달과 동지규합에 진력하였다. 신두수는 중경의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지령에 따라 밀파한 이회술(李會述)과 안동농림학교 학생 손성한(孫聖漢) 등과 학병징용을 거부하고 돌격대를 조직하여 후방교란 작전으로 일본군 무기고 기습작전 등을 계획하던 중에 3월 초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신두수는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구속되어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8월 1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해방후 의성의 봉양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刑事事件簿(朝鮮總督府裁判所, 1945)
  • 安東版獨立史(明文社, 1985) 333·336·337面
  • 安東鄕土誌(宋志香, 1983) 436∼438面
  • 安東農林學生抗日略傳(安東農林高等學校同窓會, 1978) 17·18·21面
  • 大邱慶北抗日獨立運動史(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1991) 304∼306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신두수 자 : 성여(聖汝), 창씨명 : 죽산두수(竹山杜洙) 경북 의성(義城) -
본문
1927년 12월 15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봉양면(鳳陽面) 구미리(龜尾里)에서 아버지 신종철(申鍾哲)과 어머니 배옥이(裵玉伊)·(盆城裵氏) 사이에서 5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성여(聖汝)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죽산두수(竹山杜洙)를 썼다.1941년 경북 봉양국민학교(鳳陽國民學校)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주공립중학교(慶州公立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44년 경주중학교 4학년 재학 중, 같은 학교 선배 정현모(鄭賢模)의 권유로 경북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학생들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하였다. 명성회는 안동농림학교 재학 중 사상 불온의 이유로 퇴학당한 이정선(李貞善)이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였다. 이정선은 일본 유학 중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파견한 공작원을 만나 일제가 곧 패망하므로 귀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고, 1944년 안동농림학교의 권태염(權泰琰)을 비롯하여 경주중학교의 정현모 등과 함께 무장 봉기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적을 갖고 명성회를 결성하였다.명성회에 가입한 후 회원들과 월 1회 또는 2회의 모임을 가지면서 역사와 사상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활동성과를 바탕으로 1944년 이정선과 함께 회지 『새벽あけぼの』을 발간하였다. 회지는 한글과 일본어를 혼용하였고, 민족 자각을 일깨우는 문학 작품과 감상문, 농촌 계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학병의 탈주 소식, 태평양전쟁의 전황 등의 내용을 담았다. 한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경주중학교·안동농림학교에 국한하지 않고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 학생들에게도 회지를 배포하였다. 같은 해 경주중학교 후배 채순봉(蔡順奉)에게 회지를 탐독케 하고 명성회에 가입시키는 등 조직 확대에도 힘썼다.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수세에 몰리자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수업 연한을 1년 단축시키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명성회 회원 중 졸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명성회는 회원들이 졸업할 경우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 동안 교류하고 있던 안동농림학교의 또 다른 항일비밀결사 조선회복연구단도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 조직이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실행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1945년 2월 두 비밀결사는 안동농림학교의 무기고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한 뒤 안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고 인근의 의성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대구에서 출동하는 일본군 제24부대와 결전을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거사를 추진하던 중 조선회복연구단 단원들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의 문제로 단원 일부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자 계획을 연기하였다.1945년 3월 10일 일제의 육군 기념일에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일제가 기념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를 치르기 때문에 경비가 허술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왔다. 하지만 붙잡히는 학생들이 계속 많아지고 조사 과정에서 단원 명단 등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 1945년 3월 1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 미결 상태에서 옥고를 겪다가 8월 15일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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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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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항일 기념비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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