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멀리 이역 땅에 있으면서도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며 구국운동을 벌여 교포들 간의 친목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1903년 8월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이곳의 예수교 감리교도인 홍승하·박윤섭(朴允燮)·문홍섭·임치성·임형주·김정극·안정수·이교담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홍승하가 회장에 추대되어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고 동족간의 단결, 민지(民智)의 계발(啓發), 국정쇄신을 부르짖으며 행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듬해에 일부 미국인 협잡배들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우리 이민 교포들을 상대로 당치도 않은 이민 경비를 받으려는 데 대하여 전면적으로 반대 투쟁을 전개, 이주 동포들의 권익 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신민회의 뒤를 이어서 하와이 오아후섬의 에와농장에서 그는 다시 정원명·김성구·이만춘·김규섭·강영소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에와친목회를 발족시키고 정원명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친목을 도모하였다. 그 중에도 1905년 7월에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 일본간의 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에와친목회에서는 로스앤젤레스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한국대표를 파견키로 하였는데 이때 그가 선발되어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잡다한 군소단체로는 큰 힘을 낼 수 없고 또 대외적인 위신을 세울 필요도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됨에 따라 각 단체의 지도자들은 군소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결국 재미 한인단체의 통합을 보게 되어, 1910년 2월 1일에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이 모여 재미 한인교포 자치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중앙총회 사무소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각지에 지방총회와 지방회를 두었다. 이 국민회는 지방분권제인 대의원제를 택하여 각 지방에서 선출한 대표의 회의인 중앙총회에서 국민회 전체를 운영케 하였으며, 부속기관으로 경찰도 두었다. 이 당시 그는 박상하·정원명(鄭元明)과 함께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0년에는 그가 대한인국민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어 부회장으로 당선된 백일규(白一圭)와 함께 국민회를 이끌었다. 이 당시의 회원은 약 4천명 가량이었으며, 이들이 의무적으로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국민회를 운영하였으며 상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에서 매년 2천불 내지 3천불을 지원하였다.
1919년 4월에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가 열렸는데,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비롯하여 송헌수(宋憲澍)·김 호(金乎) 등 재미인사 9명을 연합국회의에 참가할 대표로 지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이 되자 국민회는 경비난을 겪게 되어 회장직에 있던 그는 사임하였으며 국민회는 자동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미주지역에서 목사로 재직하면서 활동하다가 1945년 4월에는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이승만·임병직 등과 함께 선발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년감 119·12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00·401·40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3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38·739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27·85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8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21·122·12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60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8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8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2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6·21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