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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784
성명
한자 尹炳球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77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9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주지역에서 1903~1945.8.15 해방시까지 신민회를 조직하는데 주동하고 일로(日露)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로 외교활동을 하였으며 영국과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외교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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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멀리 이역 땅에 있으면서도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며 구국운동을 벌여 교포들 간의 친목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1903년 8월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이곳의 예수교 감리교도인 홍승하·박윤섭(朴允燮)·문홍섭·임치성·임형주·김정극·안정수·이교담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홍승하가 회장에 추대되어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고 동족간의 단결, 민지(民智)의 계발(啓發), 국정쇄신을 부르짖으며 행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듬해에 일부 미국인 협잡배들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우리 이민 교포들을 상대로 당치도 않은 이민 경비를 받으려는 데 대하여 전면적으로 반대 투쟁을 전개, 이주 동포들의 권익 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신민회의 뒤를 이어서 하와이 오아후섬의 에와농장에서 그는 다시 정원명·김성구·이만춘·김규섭·강영소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에와친목회를 발족시키고 정원명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친목을 도모하였다. 그 중에도 1905년 7월에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 일본간의 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에와친목회에서는 로스앤젤레스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한국대표를 파견키로 하였는데 이때 그가 선발되어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잡다한 군소단체로는 큰 힘을 낼 수 없고 또 대외적인 위신을 세울 필요도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됨에 따라 각 단체의 지도자들은 군소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결국 재미 한인단체의 통합을 보게 되어, 1910년 2월 1일에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이 모여 재미 한인교포 자치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중앙총회 사무소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각지에 지방총회와 지방회를 두었다. 이 국민회는 지방분권제인 대의원제를 택하여 각 지방에서 선출한 대표의 회의인 중앙총회에서 국민회 전체를 운영케 하였으며, 부속기관으로 경찰도 두었다. 이 당시 그는 박상하·정원명(鄭元明)과 함께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0년에는 그가 대한인국민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어 부회장으로 당선된 백일규(白一圭)와 함께 국민회를 이끌었다. 이 당시의 회원은 약 4천명 가량이었으며, 이들이 의무적으로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국민회를 운영하였으며 상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에서 매년 2천불 내지 3천불을 지원하였다.

1919년 4월에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가 열렸는데,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비롯하여 송헌수(宋憲澍)·김 호(金乎) 등 재미인사 9명을 연합국회의에 참가할 대표로 지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이 되자 국민회는 경비난을 겪게 되어 회장직에 있던 그는 사임하였으며 국민회는 자동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미주지역에서 목사로 재직하면서 활동하다가 1945년 4월에는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이승만·임병직 등과 함께 선발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년감 119·12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00·401·40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3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38·739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27·85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8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21·122·12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60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8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8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2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6·21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윤병구 우병길(禹炳吉) 경기 양주 러일강화회의,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 샌프란시스코 국제연합창설대회
본문
경기도 양주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77년생으로 추정된다. 하와이 이민 전까지는 우병길(禹炳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이민 후 윤병구로 개명하였다. 1903년 10월 5일 시베리아(Siberia)호를 타고 하와이(Hawaii)로 이민하였다. 하와이로 간 목적은 독실한 기독교 전도사로서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 노동 이민자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함이었다. 초기에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피어슨(George L. Pearson) 감리사를 도와 한인 동포들을 대상으로 전도 활동에 전념하였다.전도 활동을 하면서도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운동도 병행하였다. 이에 1903년 8월 호놀룰루(Honolulu)에서 감리교도인 홍승하(洪承河)·박윤섭(朴允燮)·안정수(安鼎洙)·이교담(李交倓)·문홍섭·임치성·임형주·김정극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는 한인들의 지식을 계발하기 위한 교육과 상업을 촉진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설립된 민족 단체로 미주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이다. 1904년경에는 일부 미국인들이 하와이의 한인 교포들을 상대로 이민 경비를 받으려는 횡포를 부리자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여 동포들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신민회가 1904년 4월 해산되자, 정원명(鄭元明)·강영소(姜英昭)·김성권(金成權)·이만춘(李萬春)·김규섭(金圭燮) 등과 함께 5월 3일 하와이 오아후(O’ahu)섬의 에와농장에서 에와친목회(Ewa(親睦會))를 결성하고 정원명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에와친목회는 항일운동을 위한 일화(日貨)배척과 한민족간의 친목과 권익보호를 설립목적으로 하였다. 이후 1905년 7월에 미국 뉴햄프셔(New Hampshire)주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일전쟁의 종식을 위한 러시아·일본 간의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일본에 의한 한반도에서의 불법행위에 대비하기 위해 에와친목회는 로스앤젤레스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연합하여 한국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때 미국 전쟁 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가 하와이에 잠깐 기항할 때 와드만(John Wadman)과 하와이 총독의 도움으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를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아냈다.이와 함께 미국대통령을 만날 한국 전권대표로 선발되어 같은 해 8월 4일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뉴욕주 새거모어 힐(Sagamore Hill)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새거모어 힐은 뉴욕주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에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여름 별장으로, 이곳에서 미국 대통령과 30분 간 회담하면서 미국의 거중조정(Good Offices)을 요청하였다. 자주 독립의 내용을 담은 청원서를 직접 제출하여 자주 독립을 위한 한국인들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이 청원서를 주미한국공사관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 제출하라며 청원서를 돌려보냈다.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네덜란드 헤이그(Hague)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 당시인 국제기자협회를 상대로 일본의 침략 야욕과 한국인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다룬 연설을 하였다. 이러한 한국의 상황에 대한 연설에서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하기 전 한국의 독립과 개혁을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인에 대한 무참한 강탈이 시작되었다고 폭로하여 장내에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켰다.1910년 7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합방반대’를 위한 특별회를 개최할 때 ‘합방반대회의’ 임시의장이 되어 본회를 주도하고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이어서 애국동맹단을 결성하자 의장 최정익(崔楨翊), 서기 이원익(李元翊), 재무원 황사용(黃士容), 번역원 이대위(李大爲), 회계원 허승원·조성학(趙聖學) 등과 함께 외교원에 피선되었다. 새로 결성한 애국동맹단은 ‘합방반대’를 위한 「취지서」와 「청원서」를 대한제국의 황제와 일본 왕, 그리고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9개국의 정부에 발송하였다.1910년 11월에는 샌프란시스코한인연합감리교회(桑港韓人聯合監理敎會) 안에 대한소학교를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가르쳐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정체성 유지 도모를 위해 애썼다. 또한 1914년 1월 워싱턴주로 이주하였을 때도 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한인 청년들에게 실용 학문을 장려하였다.1909년 2월 하와이에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와 북미에 공립협회(共立協會)가 통합하여 국민회(國民會)를 결성하였다. 국민회의 탄생으로 한인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되었다. 1910년 2월 북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국민회로 합류하면서 1910년 5월 대한인국민회가 미주 한인의 최고 통일기관으로 출범하였다. 1911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건립하기 위해 대표원들이 모였을 때, 박상하·정원명과 함께 하와이 지방총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가 개최되었을 때, 제2대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1919년 4월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한인자유대회가 열렸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송헌수(宋憲澍)·김호(金乎) 등 9명과 함께 대표로 지명되었다. 이 대회에서 일본 국민에게 보낼 메시지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담은 청원서를 작성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1920년 대한인국민회 회장으로 당선되어 부회장으로 당선된 백일규(白一圭)와 함께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당시의 회원은 약 4천 여 명이었으며, 이들이 의무적으로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국민회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1921년경부터 대한인국민회가 재정난을 겪게 되어 회장직을 사임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의 활동도 일시적으로 미약하게 되기도 하였다.이후 캘리포니아 리들리(Reedley)에 정착하여 250에이커의 땅에 수박 농사를 지으며 대한인국민회 다뉴바(Dinuba)지방회에 참여해 활동하였고 송헌주(宋憲澍)와 함께 지방외교원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내에서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고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조직해 국민대표회 개최를 준비할 때 1921년 12월 17일 42명의 한인들과 함께 다뉴바 한인교회에서 시사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조직 목적은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국민대표회 개최를 반대하고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1925년 2월 국내 한인들이 기근으로 아사 지경에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한인기근구제회를 조직하였다. 한인기근구제회는 리들리에 거주하는 이치원·마주흥·강화중·오대도·최영기 등과 함께 한시적으로 결성한 단체로, 의연금을 모금해 2월 13일자로 조선일보사 사장 이상재 앞으로 400원을 전달하였다.1929년 9월경 뉴욕한인교회의 청빙(請聘)을 받아 리들리를 떠나 뉴욕한인교회 제3대 목회자로 부임하여 1936년 사임할 때까지 교회 목회활동과 대외 활동을 병행하였다. 1931년 12월 13일 뉴욕한인교회 출신의 컬럼비아대학교 한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사회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연구 자료를 제공할 목적으로 한 재미조선문화회(在美朝鮮文化會)를 설립되었을 때 이사로 참여하여 적극 후원하였다.1943년 1월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결성하였다. 한족출정군인친족회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한인 청년들과 전사자·부상자 및 미군출정 가족을 후원하는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과 미국 사이의 우호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또 영문 월간지 『The Star Exponent』를 발간하여 한인 2세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국 사회에 한국 문화와 역사를 알렸다. 1945년 4월 25일부터 전세계 50여 개 국이 참가하는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샌프란시스코회의)는 국제연합 결성을 위해 조직되었는데 이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이승만·임병직 등과 함께 선발되기도 하였다.광복 후 1949년 3월 14일 귀국하여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확립하고 미국 사회에 한국 문화와 역사를 알렸다. 1945년 4월 25일부터 전 세계 50여 개 국이 참가하는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는 국제연합(UN) 결성을 위해 조직되었는데 이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이승만·임병직(林炳稷) 등과 함께 선발되기도 하였다.광복 후 1949년 3월 14일 귀국하여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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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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