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재학 중 1944년 1월 20일 일본군(日本軍) 대구(大邱) 24부대에 학도병(學徒兵)으로 강제 징병되었다. 이 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이른바 조선인학도(朝鮮人學徒) 육군특별지원병제도(陸軍特別支援兵制度)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지원으로 실제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대구 24부대에 모집된 600여 명의 학병은 입대한 지 10여 일 후 3대대 3중대 소속의 27명만 남기고 북중국(北中國)으로 보내졌다. 27명 속에 잔류하게 된 그는 김이현(金而鉉)·문한우(文漢雨)·권혁조(權赫朝) 등과 함께 탈출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먼저 탄약고 폭파 및 무기탈취와 독극물에 의한 일본군의 몰살, 그리고 집단 탈출 후 국외로 나가 독립투쟁의 대열에 참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같은 무력항쟁 및 독살계획은 실행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으므로 이들은 일단 집단탈출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거사일인 동년 8월 8일 동지 6인은 하수구를 통하여 탈출에 성공한 뒤 대구 팔공산(八公山)에 숨었다. 그러나 이들의 탈출을 탐지한 일군경의 추격으로 그는 신녕(新寧) 뒷산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후 3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2월 일본군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고쿠라[小倉]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在所證明書(日本 北九州小倉刑務所長, 1989), 제2권 359면
- 1·20學兵史記(1·20同志會) 제1권 428·429면
- 靑春挽章(1·20同志會, 1973) 42-43·51·90면
- 大邱每日新聞(1982.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