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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164
성명
한자 權重爀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건국포장
학도병(學徒兵)으로 징집된 후 1944년 8월 8일 일본군(日本軍) 대구(大邱)24부대(部隊)를 탈출하였으나 일본군(日本軍) 수색대(搜索隊)체포(逮捕)되어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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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재학 중 1944년 1월 20일 일본군(日本軍) 대구(大邱) 24부대에 학도병(學徒兵)으로 강제 징병되었다. 이 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이른바 조선인학도(朝鮮人學徒) 육군특별지원병제도(陸軍特別支援兵制度)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지원으로 실제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대구 24부대에 모집된 600여 명의 학병은 입대한 지 10여 일 후 3대대 3중대 소속의 27명만 남기고 북중국(北中國)으로 보내졌다. 27명 속에 잔류하게 된 그는 김이현(金而鉉)·문한우(文漢雨)·권혁조(權赫朝) 등과 함께 탈출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먼저 탄약고 폭파 및 무기탈취와 독극물에 의한 일본군의 몰살, 그리고 집단 탈출 후 국외로 나가 독립투쟁의 대열에 참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같은 무력항쟁 및 독살계획은 실행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으므로 이들은 일단 집단탈출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거사일인 동년 8월 8일 동지 6인은 하수구를 통하여 탈출에 성공한 뒤 대구 팔공산(八公山)에 숨었다. 그러나 이들의 탈출을 탐지한 일군경의 추격으로 그는 신녕(新寧) 뒷산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후 3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2월 일본군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고쿠라[小倉]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在所證明書(日本 北九州小倉刑務所長, 1989), 제2권 359면
  • 1·20學兵史記(1·20同志會) 제1권 428·429면
  • 靑春挽章(1·20同志會, 1973) 42-43·51·90면
  • 大邱每日新聞(1982. 8. 17)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중혁 - 경상북도 영일(迎日) 학도병 탈출
본문
1921년 12월 18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현 포항시) 죽장면(竹長面) 입암리(立岩里)에서 태어났다. 1936년 대구공립수창보통학교(大丘公立壽昌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41년 김천고등보통학교(金泉高等普通學校)를 나왔다. 이 시절 류흥우(柳興佑) 등과 함께 임동회(壬同會)를 조직하였다. 조직의 목적은 한국사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는 데 있었다. 1943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상과(商科)에 입학하였다. 10월 20일 일제는 소위 「조선인 학도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를 공표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지원병 제도였지만, 사실상 강제징집에 가까웠다. 친일 인사의 입대 권유, 일제 관헌의 공갈 및 협박 등으로 입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3년 11월 20일 이전 강제징집되었다. 입대 전 보성전문학교 상과 동창이자 징집 대상자인 서재균(徐載均)·최이권(崔二權) 등과 함께 징집 항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군 입대가 한국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나아가 일본을 위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항의 행동으로 동료들과 함께 일제 폭압의 상징인 파출소를 파괴하고 순사들을 폭행하였다고 한다. 징집을 피하지 못하고, 1944년 1월 20일 대구 24부대(대구80연대)에 배치되었다. 여기에는 경상남북도 출신의 학병들이 있었다. 학병들 사이에서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강제로 끌려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무의미하며, 민족적 비극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학병 의거로 이어졌으며, 그 중심에는 주오대학(中央大學) 출신 권혁조(權赫朝),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한우(文漢雨), 메이지학원(明治學園) 김이현(金而鉉) 등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집단 탈출 계획을 세웠다. 탈출 계획에 동참한 인사들은 집단 탈출하여 지리산으로 이동한 후 국외로 가서 일본을 대상으로 독립 투쟁을 전개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8월 8일 오후 9시 반, 문한우·김이현·권혁조·김복현(金福顯) 등과 함께 하수구 근처에 모였다. 당일 불침번이었던 허상도(許相燾)의 도움으로 일본인 보초병의 눈을 피해가며 한 명씩 하수구로 빠져나왔다. 대구 24부대를 탈출하자 당초 지리산으로 간다는 계획을 수정하였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일본군에게 체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팔공산에 들어간 후 진불암(眞佛庵)으로 피신하기로 하였으나, 주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학병들의 집단 탈출 사실을 알게 된 24부대는 경찰, 경방단(警防團), 면서기 등을 총동원하여 팔공산을 포위하였다. 이를 감지한 탈출 학병들은 개별적으로 팔공산을 탈출하기로 뜻을 모았다. 문학우와 권혁조는 경북 안동군(安東郡)에 잠입한 후 서울로 가기 위해 역으로 갔으나 체포되었다. 권태용(權泰鏞)과 함께 신녕(新寧) 뒷산에 숨었으나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에 회부되어 1944년 12월 15일 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아 일본 고쿠라(小倉)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어야만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어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출옥 이후 대구공립여자중학교(大丘公立女子中學校), 영남중학교(嶺南中學校), 구룡포중학교(九龍浦中學校),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大丘女子商業高等學校) 등에서 교육자로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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