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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645
성명
한자 李範敎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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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월 중국(中國) 상해(上海)망명(亡命)하여 임시정부 수립(臨時政府樹立)참여(參與)하고 교통위원(交通委員)임명(任命)되어 활동(活動)하다 임정(臨政) 경북특파원(慶北特派員)으로 임명(任命)되어 경북지방(慶北地方)중심(中心)으로 항일 선전(抗日宣傳), 군자금 모집(軍資金募集), 임정 연락 임무(臨政連絡任務)수행(遂行)하는 등 공적(功績)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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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대구에서 동산병원(東山病院)을 개업하여 의료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일경의 지명수배를 피하여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에 임시정부에서 국내외를 연결시키며 통제하기 위하여 설립한 교통부(交通部)의 교통위원(交通委員)으로 피선되었다.

교통부에서는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업무에 치중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의 수집 업무도 겸하고 있었다. 또한 그 주요 임무로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할 의식있는 인물을 발굴하여 양성, 교육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임무를 띠고 그는 1919년 7월에 임시정부 경북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항일선전 및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의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국내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체포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한 뒤 만주(滿洲), 봉천(奉天)으로 가서 국내 출입 안내역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12월에는 노령(露領) 니코리스크시에 배영학교(培英學校)와 병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계몽사상을 교육시켰다.

또한 1921년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이만시를 탈출한 이범석(李範奭)이 약 6개월간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훈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2세 교육에 전념하고, 독립운동을 보다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연감 7 9 6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03 34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 3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30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7권 1139 120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467 1468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범교 이상백(李相伯) 경북 대구 3.1운동
본문
1888년 7월 27일 경상도 대구부(大邱府)에서 아버지 이종하(李淙夏)와 어머니 김정원(金正元)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과전(果田)으로 옮겨와 살았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명은 이상백(李相伯)이다.1908년 3월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동산병원(東山病院) 의학강습소에 입학하여 1912년 9월 수료하였다. 1913년 6월 대구 명치정(明治町) 소재 의원에 들어가 수련하면서 1914년 2월 의사면허 시험에 합격하여 의사로 활동하였다.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구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붙잡혔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넘어갔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여 선우혁(鮮于爀) 등 9명과 같이 임시정부 교통국(交通局) 교통위원(交通委員)에 임명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정부 수립에 대한 선전, 국내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정세 파악 등의 다양한 임무를 맡은 특파원을 국내에 파견하고 있었다. 1919년 7월 16일 임명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선전 및 시위 활동을 목적으로 경상북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일제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같은 해 11월경 다시 중국 펑텐(奉天)으로 건너가 국내 출입 안내역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12월에는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키로 옮겨가 배영학교를 설립하여 3년간 교장을 맡아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22년 학교 업무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제의 감시를 받아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영천읍 과전동에서 의원을 개설하여 생활하였다.1927년 2월 좌우합작을 표방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고 그 지부가 전국적으로 설치되어가자 그해 9월 신간회 영천지회가 창설되었다. 이듬해 1월 제2회 정기대회에서 회장단 및 부서를 결정할 때 조사연구부(調査硏究部) 총간사를 맡았다. 한편 영천청년동맹(永川靑年同盟)의 간부급 지도자들이 1928년 대부분 검거되어 사실상 해체된 상태로 지속되다가 1933년 4월 완전히 해체될 때 단체 소유 재산의 정리위원(整理委員)으로 활동하기도 했다.1941년 4월 영천군 청통면(淸通面) 원촌리(院村里)로 옮겨가 새롭게 동광의원을 개설하여 의사로 생활하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그 해 11월 미군정청 관할 영천군수의 고문을 맡았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도지부(大韓獨立促成國民會) (淸道支部) 위원장을 맡았으며,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총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천군 을선거구(乙選擧區)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로 제헌의원(制憲議員)에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의원들이 정계 개편 등의 이유로 다른 당이나 무소속으로 이탈할 때 일민구락부(一民俱樂部)로 옮겨 활동하였다. 제헌의회에서 산업노농위원회의 상임위원 등을 맡았으며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에는 건강 악화로 출마하지 않았다. 1969년 12월 제헌국회의원 자격으로 국민훈장 무궁화 훈장을 받았다.대한민국 정부는 199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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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이범교 애국지사 추모비 경상북도 영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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