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3. 1923년 남만의 군인단체인 1, 2, 3, 5 각 중대를 연합하여 통의부, 의군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충북 충주(忠州) 사람이다.
1905년 이강년(李康秊)을 따라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남만지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후에는 합니하(哈泥河) 산골에서 백서농장(白西農庄)을 만들고 둔전제(屯田制)로 군인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가하여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적기관을 파괴하고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다.
1920년 본부가 길림(吉林)방면으로 이동한 후에는 신용관(申容寬)·김소하(金 夏)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江界郡文玉面)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이덕창(李德昌)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厚昌郡守) 권응규(權應奎)를 사살하게 하였다.
1921년에는 관전현(寬甸縣)에서 공격해오는 일경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전·즙안(楫安)·통화(通化)·임강(臨江)·유하(柳河) 등 각 현에 있는 친일기관인 일민단(日民團)·보민회(保民會)·강립단(强立團) 수십개소를 습격하여 제거하였다.
또 의용단(義勇團)결사대 수백명을 조직하여 강계(江界) 어뢰면(漁雷面)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한편 1921년에는 김승학(金承學) 등과 독립신문의 한문판을 발행하는 자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1922년에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그러나 전덕원(全德元)등과 의견의 마찰로 통의부(統義府)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한 결과 김승학(金承學)·이유필(李裕弼)·이종혁(李鍾赫)·차천리(車千里)·박응백(朴應白)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의 주만참의부(參議府)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참의장(參議長)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이의준(李義俊)·김창균(金昌均)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재등실(齋藤實)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62·263·265·289·359·436·439·461·467·482면
- 기려수필 31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4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93·298·299·429·434·45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414∼423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16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0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25·126·131·13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1012·1086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24·539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