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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11월 23일 캐나다 뉴번즈윅(New Brunswick) 쉐필드(Sheffield)에서 태어났다. 1904년 무렵 뉴번즈윅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토론토(Toronto) 녹스 칼리지(Knox College) 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목회자였던 아버지와 해외여성선교회(Wome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평생 회원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해외선교를 꿈꾸게 되었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05년 대학 기독청년회(YMCA) 수련회에 학교 대표로 참석하여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접하고, 이듬 해 같은 수련회에 다시 참석하여 해외선교를 결심하였다. 1911년 2월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부인(R. W. Barker)과 함께 내한하여 함경북도 성진선교지부에서 어학을 공부하는 등 선교활동 준비를 하였다. 1912년 5월 22일 회령선교지부에 배속되어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들어가 그 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보흥여학교(普興女學校) 설립 준비를 하였다. 그 해 가을 간도지역 개척선교 임무를 맡았다.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하는 북간도 지역에는 1900년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 이주하였던 김약연(金躍淵)‧문치정(文治定)‧김영학(金永學)‧구춘선(具春善)‧마진(馬晉)‧박무림(朴茂林) 등 민족지도자들이 기독교로 집단 개종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운동에 힘쓰고 있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 병탄 이후 급격히 성장하였다. 특히 1911년 2월 성진에서 조사로서 활동하던 이동휘(李東輝)가 이 지역에 파송되어 사경회를 인도하고 이를 계기로 조직된 삼국전도회(三國傳道會)를 중심으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지역의 선교를 맡고 있던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에서는 1912년 가을 캐나다 선교본부에서 파송된 맥퍼슨 스코트(J. Mcpherson Scott) 목사를 대동하고, 맥도날드(Macdonald)‧럽(Robb) 선교사와 함께 북간도 지역을 여행하고, 선교지부 설치 장소를 물색하였다. 이들과 함께 용정에 선교지부를 건설할 것을 본국 선교부에 요청하여 즉시 허가를 받았다. 김약연‧계봉우(桂奉瑀)를 비롯한 북간도 각 교회 대표들도 그해 11월 4일 연명으로 캐나다선교부에 「청원서」를 보내, ① 목사(선교사) 파송, ② 전도인 추가 파송, ③ 중학교 설립, ④ 병원설립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13년 6월 6일 가족을 데리고 용정으로 이주하여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 용정지부를 설립하였다. 국내에는 일제의 병탄과 함께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이 사라졌지만, 간도지역은 일본영사관이 설치되기는 하였지만, 중국 땅이어서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이 인정되었다. 당시 캐나다는 영연방이어서 영일동맹을 맺고 있는 일제로서도 선교사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민족운동에 관여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아 이들을 보호하고 지도할 수 있었다.
이 용정지부에 의료선교사로 마틴(Stanley H. Martin) 부부가 1916년에 부임함으로써 용정지역에서도 의료선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진료소로 시작하였으나, 그해 11월에 착공한 병원건물이 1918년에 완성되어 현대식 병원인 제창병원(濟昌病院, St. Andrew Hospital)으로 발전하였다. 1917년 7월 11일 안식년으로 귀국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있던 신한민보사에 들러 재만 동포들과 용정촌 교회의 소식을 전하였다.
1918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 함경북도 회령선교지부로 전임하였다. 1919년 2월 중순경 간도에서 국내로 들어왔다가 2월 말경 간도로 돌아가는 길에 회령에 있던 그를 찾아온 용정촌 예수교학교 교사 강봉우(姜鳳羽)로부터 독립운동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이번이 절호의 기회이다. 여럿이 의견을 나눈 바 있지만, 나는 찬동한다’고 하며 격려하였다. 강봉우는 그 후 함흥지역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간도지역은 1921년 12월 간도노회가 분립되기 전에는 회령과 같이 함북노회에 소속된 지역이고 인접해 있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1919년에는 함북노회 회계를 맡았고, 1920년에는 함북노회장을 맡고 있어서 이 지역 장로교회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30일자 조선총독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회령에 거주하면서 교인들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1919년 6월 25일부터 원산에서 개최된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 연례회의에서 7월 10일자로 일제의 만행에 대해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항의서를 결의하여 보냈다.
1920년 6월 원산에서 열린 연례회의에서 다시 용정선교지부로 전임하여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 교장을 겸하였다. 그해 10월 일본군의 간도출병으로 경신참변이 자행되면서, 맡았던 교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해 12월 20일 도(陶) 연길 도윤(道允)을 찾아가 일본군의 주둔에 대한 중국의 방침과 경신참변에서 한인들이 입은 피해 조사 결과를 물었고, 국자가 감옥에 구금되어 있던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金躍淵)의 석방을 교섭하였다. 또한 김약연을 일본 측에 넘기지 않겠다는 확인을 받아냈다. 이때 그 지역 기독교 포교에 대한 일본인들의 방해와 중국 군경들의 질시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1923년 건강 문제로 조금 일찍 안식년을 받아 귀국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27년 12월 24일 토론토(Toronto)에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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