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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애라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0년

주요공적

개성에서 3·1만세운동 주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선고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수감(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중국 소주에 유학하며 여성지위 향상과 독립운동에 전념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권애라 / 심영식 / 임명애 / 신관빈

권애라 , 1897 ~1973 , 애국장 (1990) 심영식 , 1887 ~1983 , 애족장 (1990) 임명애 , 1886 ~1938 , 애족장 (1990) 신관빈 , 1885 ~미상 , 애족장 (2011)
서대문감옥 여옥사 8호 감방의 여성독립운동가들

1. 1919년 3월, 여성 시위대가 등장하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 행진 모습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 행진 모습

1919년 3월 1일 서울 한복판에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대를 이뤄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도쿄 아사히〉 신문 1919년 3월 5일 자에 실린 이 사진은 3.1운동 첫날 시위대가 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유일본이다. 일본 기자의 눈에도 여학생 시위대의 등장이 충격적이었기에 촬영한 듯하다.

3.1운동 첫날, 서울에서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만이 아니라 이화학당, 배화학당, 정신여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또한 평양의 숭현여학교, 숭의여학교, 선천의 보성여학교 학생들도 시위대를 이뤄 만세시위에 나섰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3월 3일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가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났다.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오후 2시 기도회를 마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 행진에 나섰다. 여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명은 물론 군중이 가세하면서 만세시위는 밤 12시까지 이어졌다. 3월 10일 전남 광주 최초의 시위가 일어났을 때 수피아여학교 학생들도 시위대를 이뤄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했다. 3월 11일에는 경남 최초의 시위가 부산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의 주도로 일어났다. 그날 밤 9시에 고등과 학생 11명이 교사인 주경애, 박시연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를 나와 좌천동 거리까지 행진했다. 여기에 군중이 가세하면서 수백 명에 이른 시위대는 2시간 동안 만세시위를 벌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서울, 평양, 선천, 개성, 광주, 부산 등지에서 여학생을 필두로 여성들이 시위대를 이뤄 만세시위를 벌이는 장면을 보며 강렬한 시대 변화를 절감했다. 또한 여성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다 검거되고 투옥되어 재판받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3.1운동 내내 만세시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윤치호마저“경찰서에서 구치소로 이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조선인들의 가슴 속에 증오와 분노의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보았다. 여성, 특히 여학생들의 활약과 고초가 사람들을 시위에 나서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3.1운동에서 만세 시위가 절정에 이른 것은 3월 말 4월 초였다. 이화학당을 다니던 여학생 유관순도 3월 1일 첫날 서울 시위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가 임시휴교령을 내리자 독립선언서를 들고 귀향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그리고 3.1운동 역사상 가장 많은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4월 1일에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그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은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했다. 그리고 재판을 받기 위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유관순은 서대문감옥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만세시위를 이끌다 체포되어 투옥된 이들이 그를 맞이했다. 그들 중에는 경기 북부 지역인 개성과 파주의 만세시위를 이끌다가 체포되어 투옥된 사람들이 있었다. 어윤희, 권애라, 심영식, 신관빈은 3월 1일 개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만세시위를 모의하고 다음날까지 이어진 만세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임명애는 구세군으로 3월 10일 파주 최초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2. 개성의 첫 번째 만세시위를 촉발한 권애라, 심영식, 신관빈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진 데는 독립선언서의 조직적인 배포가 큰 역할을 했다. 천도교계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21,000매가 1919년 2월 28일에 전국에 배포되었다. 그날 곧바로 개성에 독립선언서를 전한 사람은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오화영 목사였다. 그는 개성에 사는 동생 오은영을 통해 강조원 목사에게 독립선언서 200매를 보냈다. 강조원은 그날 밤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 이만규, 호수돈여학교 서기 신공량 등과 남부예배당에 모여 독립선언서 배포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독립선언서 배포에 합의하지 못했다. 결국 강조원의 지시로 신공량은 독립선언서를 북부 예배당 지하실 석탄창고에 숨겼다.

마침내 3월 1일 아침이 밝았다. 그날 오전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의 교사로 있던 권애라는 독립선언서 도착 소식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신공량에게 그 이유를 따졌다. 그리고 신공량을 앞세워 북부 예배당 지하실에 들어가 독립선언서를 들고 나와 곧바로 어윤희를 찾아갔다. 어윤희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한 후 호수돈여학교 기숙사에 기거하며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2011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애라와 어윤희, 두 사람은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로 모의했다.

3월 1월 오후 2시경, 서울, 평양, 진남포(평남), 의주, 선천(평북), 원산(함남)은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로 들썩이고 있었다. 이 무렵 개성에서는 권애라, 어윤희와 함께 전도사인 신관빈, 심영식 등이 개성 시내에서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호수돈여학교 전경
호수돈여학교 전경

다음날인 3월 2일 권애라는 호수돈여학교 기도실에서 이경신, 류정희, 조화벽, 김낸시, 이봉근, 조숙경, 김신렬, 최옥순 등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다음날인 3월 3일 오후 2시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기도회를 마치고 거리시위에 나섰다.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호수돈여학교를 출발한 여성들은 시내를 돌며 ‘찬미가’와 ‘독립가’를 부르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중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남본정 경찰관파출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훼손했다. 송도고등보통학교생 200여명은 태극기를 들고 합류해 자정 무렵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1) 권애라, 만세시위의 불씨를 살리다.

1897년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동산리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자랐다. 1914년 호수돈여학교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이화학당 유치원사범과에 입학해 1918년에 졸업했다. 유관순이 1916년에 이화학당에 입학했으니 2년 동안 둘은 동문수학을 한 셈이었다. 이화학당 졸업 후에는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의 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3월 1일 북부 예배당에 은닉되어 있던 독립선언서를 직접 꺼내 와 어윤희, 심영식, 신관빈과 함께 개성 시내에 배포하고 3월 2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모의했다. 독립선언서 배포 혐의로 체포되어 1919년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했으나 1919년 7월 4일 형이 그대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0월에 출옥한 후 1920년 7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조직원으로서 독립 자금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해 가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애국부인회와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서 활동을 하면서 쑤저우의 감리교계 여학교인 징하이 여숙을 다녔다.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 위임장을 갖고 참석해 상해애국부인회 대표로 활동했다. 이때 의열단원 김시현을 만나 결혼했다.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는 여성 웅변계를 대표하는 명망가로 자유연애를 실천하고 여성의 단발을 주장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1940년에는 항일 독립운동을 참여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아들 김봉년과 함께 지린성 스자툰의 영신농장을 거점으로 독립군 병력 충원을 위한 활동을 했다. 1943년 3월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만주국고등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장춘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 심영식,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다.

1887년 개성의 목재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심명철(沈明哲)이었다. 1900년 열병을 앓은 뒤 시력을 잃어 시각 장애를 갖게 되었다. 평양맹아학교, 호수돈여학교를 거쳐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1919년 무렵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과 함께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3월 4일에 개성 시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19년 10월에 가출옥했다. 투옥 중 간수에게 뺨을 맞아 고막이 터져 평생 한쪽 귀에서 고름이 나오는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1920년에는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개성 미리흠여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6개월 만에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신관빈, 3.1운동의 교훈으로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주장하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신관빈)ⓒ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신관빈)ⓒ국사편찬위원회

1885년 황해도 봉산군 서종면 동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는 경기도 장연군 대남면 장좌리 706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지만 호수돈여학교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기독교 전도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어윤희의 권유에 따라 오후 2시경 어윤희, 권애라, 심영식과 함께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다음날인 3월 2일 교회에서 체포되어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11일 만기출옥한 직후《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8일자에 실린 〈출옥자 감상문〉에 따르면 그는 감옥생활에 대해 “사람으로는 받지 못할 만큼 망측한 대접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리고‘우리의 할 일은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 청년남녀에게 교육을 많이 시키고 해외로 유학을 보내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파주 최초의 시위를 이끈 구세군, 임명애

1886년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57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남편 염규호와 함께 구세군으로 활동 중이었다.

1919년 3월 10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에 있는 교하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 1백여명을 이끌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는 파주의 첫 만세시위였다. 3월 25일에는 자신의 집에서 남편 염규호, 그리고 16세의 학생 김수덕, 24세의 청년 김선명과 함께‘3월 28일 만세시위를 일으킬 테니 모두 둥글봉으로 모이라, 만약 이에 불응하면 방화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격문 60여 매를 인쇄했다. 염규호가 격문 내용을 작성했고 김수덕이 등사판을 가져와서 인쇄했다. 염규호·김선명·김창실은 격문을 당하리 일대의 주민에게 배포했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임명애)ⓒ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임명애)ⓒ국사편찬위원회

거사 예정일 이틀 전인 3월 26일 염규호·김창실·김수덕과 함께 교하리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주동자들과 함께 7백여 명의 시위대는 와석면사무소로 가서 유리창을 깨부수고, 면서기들에게 휴무하라고 압박했다. 이어 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헌병의 발포로 당하리에 사는 최홍주가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투옥 당시 임신한 상태로 출산을 위해 잠시 가출옥했다가 1919년 11월에 재입감되었다. 1920년 9월 25일에 만기출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탄생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내부(8호감방)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내부(8호감방)

권애라, 심영식, 신관빈, 임명애. 유관순과 함께 서대문감옥 여옥사 8호 감방에서 투옥 생활을 함께 했던 4명은 기독교인이었다. 3월 초순에 여성 시위대를 이룬 여학생 대부분도 기독교계 여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19세기부터 기독교 선교의 일환으로 여성 교육을 위해 세워진 여학교의 학생들과 교회 활동을 펼치던 여성 기독교인을 주축으로 여성들은 3.1운동을 통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들은 신여성으로서 3.1운동 이후에도 활발한 현실 참여로 여성운동이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으로 자리 잡도록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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