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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안현경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5년

주요공적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장으로 활동

하와이 대한인교민단 총무로 외교활동 지원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안현경 / 이원순

안현경 , 1881 ~1957 , 독립장 (1995) 이원순 , 1893 ~1993 , 애국장 (1991)

1.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총회를 이끈 안현경

(1) 출생

1881년 현재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弼雲洞) 20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송지상(宋之相)이고, 자료에 따라 이름 ‘현경’을 賢慶·玄卿·賢敬 등으로 적고 있다.

(2) 고국에서 미국으로

1905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응모하여 같은 해 5월 8일 사이베리아(Siberia)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그후 카우아이(Kauai) 섬에 신민회(新民會) 지회가 설립되자 참가하였다 한다. 신민회는 1903년 8월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만든 미주 최초의 정치단체였다. 1909년 4월 오아후(Oahu) 섬의 와히아와(Wahiawa)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와히아와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 7월에는 하와이 각 지방 대표자들과 함께 일왕(日王)에게 일본의 한국 강점에 항의하는 전보문을 발송하였다.

(3) 고난의 길, 독립운동의 길

한인교회보 소개 기사(국민보 1914년 4월 4일자 기사)ⓒ독립기념관
한인교회보 소개 기사(국민보 1914년 4월 4일자 기사)ⓒ독립기념관

1913년 2월 이승만(李承晩)이 하와이에 정착한 후 출판 및 종교·교육 사업을 전개하자 이승만을 적극 도와 1913년 9월 1일 창간된 월간 국문잡지인 『태평양잡지』 간사원, 1914년 4월 발간된 『한인교회보』 발행인, 1916년 11월 13일 하와이정부에 등록된 한인여학원 이사, 1918년 12월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치교회로 성립된 한인기독교회 선교부 이사원(재무)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15년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과 박용만(朴容萬) 지지자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이승만을 적극 지지하여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장악하였다. 그 결과 1916년 하와이지방총회 총무, 1917~1918년 총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1917년 총회장 재임시 단 한 차례도 대의회를 열지 않았고, 재정보고 또한 제때 하지 않아 이듬해 국민회 내부에 다시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때 반(反)이승만세력은 국민회 임시연합중앙회를 결성한 뒤 안현경의 ‘불법행위’를 규탄하고 기존 국민회의 재편을 시도하다가 1919년 3월 결성된 박용만의 대조선독립단에 대부분 흡수되었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같은 해 7월 11일 이승만으로부터 원동(遠東) 시찰 겸 통신원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도 하와이 대표위원으로 선임하고 월봉(月俸) 50달러를 지급하기로 결의하였다. 9월 14일 상하이에 도착한 뒤, 이듬해 6월까지 총 28통의 서한을 임시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내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과 주요 인물들의 동정, 국내외 소식과 연락망 구축 등에 대하여 보고하고 정국 대처 방안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통하여 이승만은 미국에 있으면서도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를 원격 통제할 수 있었다. 1919년 11월에는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및 각 부 총장 취임식에 참석했으며, 1920년 미주지역 대표 자격으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여 상임위원회 군무위원(軍務委員) 및 정무조사특별위원회(政務調査特別委員會) 외교분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6월 25일에는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내정된 현순(玄楯)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 유럽을 경유하여 뉴욕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하와이로 돌아왔다. 이때 상하이로 건너가기 위하여 하와이에 체류하고 있던 이승만을 만나 임시정부의 현황과 향후 진로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이후 이승만이 12월 5일 상하이로 건너가 반 년 동안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한 뒤 1921년 6월 29일 하와이로 돌아오자, 민찬호(閔燦鎬)·이종관(李鍾觀)과 더불어 대한인동지회 창립위원을 맡았다. 대한인동지회는 이승만을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절대적으로 지지·옹호하는 결사체였다.

1922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총무로 선임되는 동시에 기관지 『국민보』의 주필을 맡았다. 교민단은 하와이 국민회가 임시정부의 내무부령 제4호 「임시교민단제」에 의거하여 개편된 단체로서, 그 배경에는 미주 본토의 국민회와 분리시켜 조직을 장악하려는 이승만계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였다. 10월 25일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상업대회에 ‘조선대표’로 김윤수(金潤秀)·이정범(李政範)이 참석하자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회를 베풀고 배일연설을 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3년 12월 교민들의 금주·금연을 장려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한인교풍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8년 2월 16일 하와이에서 대한민족통일촉성회가 결성되자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촉성회는 당시 국내외에서 전개되던 민족유일당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대한 민족의 통일을 촉성해 독립운동의 단일기관을 창설함”을 그 목적으로 삼았지만, 5월 21일 개최한 제1차 대회 이후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졌다.

1933년 1월 24일 이원순(李元淳)과 함께 동지회 중앙부 서무대관의 명의로 「요구서」를 발(發)하여 동지회의 절박한 재정 사정을 알리면서 “조선문제와 아세아문제를 들고 제네바에 계시는 본회 총재 이승만 박사에 대한 후원금”을 교민들에게 당부하였다. 이 무렵 이승만은 스위스에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상대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고 만주에 사는 100만 한인의 안전과 자주성에 초점을 맞춘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오랫동안 침체에 빠졌던 미주지역 독립운동이 활기를 되찾으면서 국민회와 동지회의 합작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 이종관(李鍾寬)·차신호(車信浩)와 더불어 동지회측의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국민회는 “순전한 희생적 정신으로 무조건적인 절대합동”을, 동지회는 합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졸연히 하기 어려운 즉 우선 독립운동을 추진할 연합기관을 두자”고 제의하였다. 양측 교섭위원들은 여러 번 회의를 가졌으나 끝내 합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지역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자 이원순과 함께 동지회 중앙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 결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주미외교위원부가 출범하게 됨으로써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전개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때 국민회는 독립운동 자금의 모집과 배분을 관리할 연합위원회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고, 동지회는 대미외교를 전담할 주미위원부에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앉히는 등 재정과 외교의 권한을 양측이 타협하였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교민들로부터 독립금을 더 걷기로 하고 ‘재무부’를 확대하였다. 이때 다섯 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 1943년 동지회 중앙부의 총재무로서 연합위원회의 재무직까지 맡았으나, 그 해 말 동지회가 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자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였다. 이때 동지회 대표로 연합위원회에 참여해 온 김영기(金永基)·도진호(都振鎬)·민함나·정영옥 등과 함께 동지회를 떠나 국민회에 가입하였다.

안현경씨 별세(국민보 1957년 2월 27일자 기사)ⓒ독립기념관
안현경씨 별세(국민보 1957년 2월 27일자 기사)ⓒ독립기념관

(4) 사망

1957년 하와이에서 서거하였다. 이때 『국민보』는 그의 별세 소식을 알리면서 “이승만 박사의 친절한 친구요, 동지회 창설자 중 한 분이요, 한인 기독교 영도 중 한 분이라더라”고 추모하였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해는 1998년에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 재미한족연합회의 한 축을 이끈 이원순

(1) 고국에서 미국으로

1893년(제적부 출생년, 본인 자서전은 1890년) 서울 예지동에서 태어났다. 1914년 보성(普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2) 대조선독립단의 주역

하와이로 가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에 가입하였다. 대조선독립단은 1919년에 박용만(朴容萬)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인 350여 명을 규합하여 만든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출판, 외교사업과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박용만의 비서 겸 재무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8년 박용만이 북경(北京)에서 암살된 뒤에는,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하여 조직한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에 들어가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힘썼다. 또한 동지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던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의 주필을 맡아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의 영문명은 『The Korea Pacific Weekly』이며 1913년 9월 이승만이 발간한 『태평양잡지』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3) 이승만과 손잡고 대한인동지회를 이끌다.

이승만
이승만

1934년 4월 18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주미제2행서(駐美第二行署)의 재무위원에 임명되었다. 재무위원으로서 하와이에서 인구세(人口稅), 애국의연금(愛國義捐金) 등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분산된 독립운동세력의 결집이 요구되었다. 이에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미주(美洲)에 있는 대한독립단, 동지회, 국민회, 애국부인회, 단합회, 애국단 등을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이때 이승만과 함께 동지회의 대표로 참여하여 선전사업에 주력하며 대일전을 준비하였다.

(4) 태평양전쟁 발발, 해외한족대회 의사부 의사를 맡다.

1941년 4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개최되었다. 국민회, 동지회 등 9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중일전쟁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민족대단결과 독립전선에 역량을 집중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대회에 안현경(安顯景)·도진호(都振鎬)와 함께 동지회중앙부(同志會中央部)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때 결의한 내용에 따라서 8월 미주 지역 모든 단체들의 통합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었다. 안원규(安元奎)·차신호(車信浩) 등과 함께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의사부(議事部)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8월 19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워싱턴에 주재하며 대미(對美) 외교활동과 선전활동을 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하였다.

(5) 사망

고국으로 돌아온 이원순은 대한증권을 설립하였다. 이후 한국경제인협회(일명 전경련) 설립에 앞장섰다. 이후 전경련 및 광복회 고문을 맡았다. 그는 1993년 4월 19일 새벽 5시 20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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