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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상태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1907년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경북 각지에서 활약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단양일대에서 활약 하였으나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단식 투쟁중 1911년 9월 순절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김상태 / 신태식 / 김동신

김상태 , (1862) ~1911 , 독립장 (1963) 신태식 , 1864 ~1932 , 독립장 (1968) 김동신 , 1871 ~1933 , 독립장 (1977)

1. 일제의 한국 침략과 정미의병의 항쟁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고 일제는 의병항쟁을 적극적으로 진압하며 탄압하였다. 군대 해산 이후 각 지역에 분산되어 항쟁하던 의병들은 해산군인이 합류하면서 주변의 의진과 연합하는 차원을 넘어 도의 경계를 넘어서 의병부대간의 연합과 연계를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평안·황해·경기·강원·충북 등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서로 연락하며 연합항쟁을 시도하였다.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의병부대들을 결집하여 통일된 부대를 갖추고 일제에 체계적으로 항전하고자 한 것이었다.

연합의진 결성은 주로 삼남지방을 제외한 중북부 지역에서 항쟁을 이어가던 의병 부대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시도되었다. 연합의진의 결성은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이인영을 중심으로 결성되기 시작하였다.이인영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에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모여들어 이인영의 관동창의군이 연합의진의 체제를 갖추면서 13도창의군을 결성하게 된다.

13도 창의군은 의병항쟁기 최초로 시도된 전국적 규모의 연합 의진이었다. 이들은 전기의병기 척사론에 기반한 의병들과는 달리 한일간에 체결된 여러 조약들의 불법성을 인식하고 이를 성토하는 공문을 보내고, 서울인근까지 진격하며 저항하였지만 결국 의진은 해산되었다. 하지만 의진 해산 이후 항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강원지역 의병은 13도 창의군 결성 과정에서 중소규모 의진간에 연합이 추진된 경험이 있어서 상호간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부터 강점 이전까지 강원도에서 활동한 의진은 52개 정도였고 연기우 채응언·이태영 부대가 주로 활동했다. 경기지역에서 중기의병기 활동한 의병장급은 약 20여 명 정도였다. 하지만 후기의병기가 되면 그 수는 224명으로 증가하였고 1909년 후반까지 약 400여 명의 의병장들이 경기 지역에서 의진을 이끌며 항쟁하였다. 경상지역의 의병은 크게 이강년 의병부대·신돌석 의병부대·남부지역의 산남의진이 중심이되어 활동하였다. 전라지역 의병은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김동신 의병부대·심남일 의병부대·안규홍 의병부대가 중심이 되어 적극적인 항쟁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의병들은 일본군의 강경 진압과 군수품 부족으로 지속적 항쟁에 어려움이 있었고, 일제는 의병근거지로 지목된 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여 의진의 세력은 점점 약해졌다. 또한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호남지역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고자 했다. 이에 1909년 8월말 전라지역의 주요 의병장들이 모여 대응책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의병 부대를 해산하였다. 남한대토벌 작전 이후 주요 의병 세력은 사실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일제 강점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은 계속 이어졌고 일부는 해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2. 이강년의 영원한 동지, 의병장 김상태

김상태는 이강년과 뜻을 함께한 의병장이다. 김상태와 함께 활동한 의병들은“기골이 장대하고, 검붉은 얼굴, 광대뼈는 높고, 붉은 기운을 띄고 있는 수염, 위엄있는 눈빛에 호걸형의 풍모를 가진 인물”로 기억하였다. 김상태는 1862년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삼척, 본명은 상호(相鎬)이고 자는 상태(相台), 경륙(景六), 정륙(正陸) 이다. 김상태의 집안은 몰락한 향반이었기 때문에 유생과 평민이라는 정체성을 함께 가지고 성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선포되자 이에 항거하여 경상북도 문경에서 이강년 의진 중군장으로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였고, 이후에도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의 제자가 되어 백두산 일대 및 무송, 임강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상태 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상태 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귀국 후 남천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상태는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인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가 해산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의병 재기를 준비한다. 이강년이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후 의림지에서 전열을 정비할 때 제천, 청풍, 단양, 영춘 일대의 의병을 규합하여 합류하였다. 김상태는 이강년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한 후 자신은 중군장이 되었고 이중봉이 우군장, 백남규가 우선봉장, 이용로가 좌군장, 하한서가 좌선봉장, 윤기영이 전군장이 되어 함께 활동하였다. 9월 10일 문경 갈평을 시작으로 9월 16일 싸릿재, 9월 27일 죽령, 10월 5일 고리평, 10월 23일 백자동 전투에 참여하여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12월 중순 복상골전투에서 패전하고 의진이 와해되면서 이강년 의진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이강년 의진과 합류하여 서벽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지만 이후 별도로 영남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고 10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의병항쟁은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1909년 재기를 도모하였다. 자신이 거느리던 의병에 이강년 의진의 잔여병력까지 규합하여 의진을 강화한 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가 만나는 요충지이자 산악지역인 의풍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분자를 처단하고 일본군을 공격하는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밀정을 활용하여 정보를 수집하였고 김상태는 결국 1911년 6월 14일 일제의 회유에 넘어간 우정웅 등에게 속아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김상태의진의 규모는 900여명에 700여정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무장 상태에서 체포된 김상태는 대구로 압송되었다. 이후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진행된 재판결과 사형을 선고받고 9월 21일 순국하였다. 조사과정에서 조사관이 “너는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자 “나쁜 놈들은 모두 죽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죽이지 않았다”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의병활동이 정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순국 전 아들 원기(源基)에게 이강년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3. 의병에서 서로군정서까지 이어진 독립운동, 신태식

신태식은 1864년 11월 22일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철회(哲會)‚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도암(島菴)이며‚ 신철회(申哲會)라는 이명이 있다. 1895년 을미의병이 봉기하자 합세하여 농암(籠岩)장터에서 문경 가은면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尙州)의 강용이(姜龍伊) 등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한 혐의가 있는 이들을 처단하였다.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와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9월 10일 문경과 단양 등지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도대장에 취임하고 문경으로 이동하여 이강년 의진과 합류하여 갈평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어 죽령을 넘어 울진과 평해 지역으로 이동하여 신돌석과 조우한 후 의진을 삼척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이후에도 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신태식 생가
신태식 생가

1908년 9월 홍주전투에 참여한 후 횡성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楊州) 산안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사로잡아 총살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12월 14일 영평 이동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결국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1909년 벌어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였고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복역 후 1918년 출소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신태식의 저항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출소 후에도 저항은 계속되었다. 조선독립운동 후원 의용단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1910년대 만주 지역 곳곳에 세워진 독립군 기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적·물적지원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활동은 매우 중요했다. 주요 활동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로군정서는 신흥중학교를 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삼수·강계 등지에서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군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재정 후원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으로 조선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이 1920년 9월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경남단장 김찬규(金燦圭), 경북총무 이응수(李應洙) 등이 참여했고 신태식은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하지만 1922년 11월 28일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이대기(李大基), 김사묵(金思黙) 등 4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힘에 따라 의용단의 조직이 발각되었다. 결국 100여 명이 붙잡혔고 42명이 대구 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로인해 신태식은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12월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6월 출옥했고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1932년 69세로 서거하였다.

4.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넘나들며 활동한 삼남의병대장 김동신

김동신은 자는 원표(元表), 호는 청암(淸菴)으로 충남 회덕(懷德) 출신이다. 몰락한 양반 집안이었기 때문에 의원(醫員) 생활을 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1906년 음력 3월 민종식을 찾아가 의병에 합류할 뜻을 밝혔다. 신태식은 민종식으로부터 승지(承旨) 사령서(辭令書)를 받고 의병을 일으켜 국가에 보답해야한다고 생각하게된다. 결국 민종식에게 자신이 선봉장으로 전라북도에서 거병하기로 약속하고 30여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덕유산(德裕山) 자원암(紫原庵)에서 거사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홍주성에 입성한 민종식 의진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와해되면서 합류하지 못했다. 최익현 의거 당시 종사관으로 각지를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최익현 의진이 해산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김동신 의병 창의사적
김동신 의병 창의사적

전라도 지역은 이미 최익현의 격문이 곳곳에 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의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김동신의 고향은 충청도였지만 전라도와 경상도를 자주 왕래하였고 무주와 용담 등에는 아는 사람이 많아 영호남 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김동신은 내장산 인근에서 모집한 8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기우만, 고광순과 함께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김동신은 자신의 부대 구성원 대부분이 농민과 산포수로 실전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강원도에서 활동하던 민긍호를 찾아가 자신의 의병이 대부분 산포수라 전술이 없고 화기가 부족하다며 지원을 요청했고, 해산군인 출신 의병을 지원받았다.

김동신 의진의 전투력이 강화되자 남원 사장(沙場)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구례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9월 10일 순창 우편취급소와 분파소를 공격하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김동신 의진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각지에서 의병들이 합류하여 약 1,000여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규모가 확대되었고, 김동신은 삼남의병대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김동신 의진은 지리산을 기반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전라도는 물론 경상 서부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의병을 빙자해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를 근절시켰기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이는 지속적인 항쟁의 원동력이었다.

일제는 1908년 2월 남원, 광주, 구례, 진주, 하동 등지의 수비대를 동원하여 김동신을 체포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펼쳤고, 4월에는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변장한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으나 지리산 산악지대를 기반으로 활동한 김동신 의진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이후 김동신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908년 6월 6일 체포되었고 1908년 8월 15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진행된 재판결과 내란죄로 종신 유형을 선고받았다. 대장을 잃은 김동신 의진은 지리산에서 저항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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