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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건병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3년

주요공적

1920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선출

1921년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

1927년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동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박건병 / 강경선 / 배천택

박건병 , (1892) ~1932 , 독립장 (1993) 강경선 , 1891 ~1930 , 독립장 (1995) 배천택 , (1892) ~미상 , 애국장 (1991)
좌우를 넘어 민족유일당을 만들려고 한 사람들

1. 독립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한 대독립당 촉성회운동

3.1운동의 열기를 흡수하며 차분하게 독립운동의 진로를 새롭게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등장도 새로운 진로 모색이 낳은 대표적의 결과였다. 하지만 점차 뜨거웠던 열기가 식어 가는 가운데 1921년경에 이르면 많은 이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임시정부에 대해 여러 목소리가 나왔다. 그 중 하나가 임시정부가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 같이 모여 논의하자는 목소리였다.

1923년 1월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여들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3월 들어 임시정부의 최대 쟁점인 시국문제를 둘러싼 토론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크게 보면 두 갈래 의견이 제기되었다. 임시정부에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개조하여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개조파가 있었다. 이와 달리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다른 곳에 세우자는 창조파의 주장이 있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가운데 참가자들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5월 들어 개조파가 국민대표회의를 집단으로 탈퇴하면서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회의는 독립운동의 분산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가속화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퍼지고 있는 가운데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 이념의 분화까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두 흐름을 넘어서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있었지만 아직은 하나로 모아지고 있지 않았다.

국내외 독립운동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큰 줄기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사건이 있었다. 1926년 6월 장제스의 북벌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국민당은 중국공산당과 이미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을 한 상태였다. 장제스는 국공합작을 바탕으로 반제반군벌을 내세우며 국민혁명을 추진하고자 광저우에서 군대를 일으켜 베이징을 향해 진군을 선언한 것이다.

중국에 있던 많은 독립운동가는 장제스의 북벌선언을 주시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광저우에서 첫 발을 떼고 베이징을 거처 만주로 이어진다면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립투쟁을 구체화할 원동력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북벌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국민혁명군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국민혁명군이 승승장구하는데 보조를 맞추며 “화북으로! 조선으로!”를 외쳤고 환희를 느끼며 열광하였다.

혁명군의 일원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북벌에 대한 기대가 컸다. 기대를 현실의 움직임으로 만드는데 불쏘시개 역할을 한 사람이 안창호(安昌浩)였다. 안창호는 2년 여 만인 1926년 5월 미국에서 상하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북벌선언을 접하자마자 상하이의 삼일당(三一堂)에서 ‘우리의 革命運動과 臨時政府問題’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그는 강연에서 조선 독립운동이 “민족혁명”이라며 그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대혁명당을 조직하는데 진력하고 우선은 임시정부를 유지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革命이란 무엇인고? 나는 말하기를 民族革命이라 하오. 그러면 민족혁명이란 무엇인가? 비민족주의자를 민족주의자 되도록 하자는 것인가? 아니오. 우에 말한바 革命은 곳 在來의 舊現狀을 업시하고 새로운 他現狀을 박고아 세우는 것인 즉 민족혁명이란 곳 우리 민족의 현상을 업시하고 새로운 타현상으로 박고아 놋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일본에 압박밧는 상태로 잇는 현재 현상을 업시하고 한인으로 자유스럽게 살수 잇는 타현상을 박고아 세우자는 것이오. 그럼으로 이것은 당연히 민족혁명이라 일흠할 것이오. 이것은 곳 우리 민족이 저의 민족감정과 이해타산과 사활문제 등을 합하야 이러나는 전민족의 운동이오. 결코 한 부분의 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혁명의 뜻이 우에 말한바와 갓은 즉 제일로 일본의 압박 받는 상태를 업시 한다함에는 조금도 문제됨이 없는 것이나……(『獨立新聞』 1926.9.3.)

안창호, 오늘의 우리 혁명(革命)(독립신문 1926년 9월 3일자ⓒ독립기념관)
안창호, 오늘의 우리 혁명(革命)(독립신문 1926년 9월 3일자ⓒ독립기념관)

안창호는 민족혁명을 수행할 조직체로 ‘대혁명당’을 조직하기 위해 적극 움직였다. 그는 1926년 8~9월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베이징에 가서 창조파 지도자의 한 사람인 원세훈(元世勳)을 비롯해 여러 사람을 만나 토론하였다. 이들은 중국 각지의 세력을 모아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베이징의 운동가들은 1926년 10월 28일 장건상(張建相) 원세훈(元世勳) 조성환(曺成煥) 박건병(朴建秉) 배천택(裵天澤) 조남승(趙南升) 김광천(金光泉)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23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의 창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북경촉성회의 취지에 동조하는 회원은 꾸준히 늘어 73명에 달하였다.

북경촉성회는 자금 사정으로 곧 중지되었지만, 『독립당촉성보(獨立黨促成報)』를 기관지로 발행하였다. 집행위원의 면면을 보건데 대부분 원세훈과 같은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창조파 성원들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북경촉성회는 <선언서>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깃발 아래 단결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조직적인 대안으로 “한국 혁명 동지는 당적(黨的)으로 결합하자!”라는 슬로건에서처럼 정당 형태의 민족혁명 지도조직을 구상하였다.

대독립당에 관한 구상은 1927년 5월에 결성된 ‘대독립당 조직 광동촉성회’의 결성을 알리는 <선언>에 확인할 수 있다. 광동촉성회는 “독립운동의 통일과 통일적 당조직의 유일한 방법은 먼저 통일적 당조직의 방법에 대한 촉성운동을 각 지역에서 일으킴과 동시에 촉성회를 조직하여 각지에 산재한 각 단체원과 각 개인을 일정한 목표 아래 결합하여 잘못된 견해를 근절하고 민족혁명에 대한 정확한 이론 아래 집중하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항일운동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고자 개별 가입을 원칙으로 각 지역에 결성된 촉성회가 연합하여 정당 형태의 통일조직인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총지도기관”을 결성한다는 구상이었다. 달리 말하면 광동촉성회는 특정 단체나 지도자를 중심으로 독립당을 창립하거나 기존의 단체들을 연결하는 형식으로 ‘대독립당’을 결성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광동촉성회는 각지의 촉성회에 개별 가입한 사람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목표를 합의하고 이론을 일치시키며 대독립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동촉성회가 지향한 독립당은 개인본위를 원칙으로 조직원을 모으는 과정에서 통일된 이론과 책략을 확립하는 중앙집권 조직이었다. 단체간 연합체가 아니었다. 실제 광동촉성회는 이를 위해 독립당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키자고 결의하였다.

선언

  • 1

    일절 혁명적인 타협운동자 및 그 운동을 절대 배척한다.

  • 2

    조선 혁명적 총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일절 혁명세력 특히 공산주의운동과 연합할 것.

  • 3

    조선 혁명전선의 괴물이고 최대의 죄악이며 전민족운동의 內敵인 재래의 파벌주의 및 그 화신의 철저적 박멸을 도모할 것.

(「대독립당 광동촉성회 선언」(大獨立黨 廣東促成會)宣言)

결국 광동촉성회가 지향하는 민족혁명의 지도조직인 대독립당은 개별가입을 원칙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단체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중국 관내지역의 상하이(1927. 3. 21), 광둥(5. 8), 우한(7. 초), 난징(9. 27)에서 촉성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마침내 5개 촉성회는 1927년 11월 9일부터 상하이 침회당(浸會黨)에 모여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 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촉성회연합회는 11월 22일 본회의를 열고 각지에 촉성회 주비회(促成會 籌備會)를 우선 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독립당을 결성한다는 조직 건설 전망을 강령에 명시하였다. 촉성회연합회는 주비(籌備)→준비(準備)→완성(完成)이란 단계를 계획하고 움직였던 것이다.

한국독립당 남경 촉성회 선언문
한국독립당 남경 촉성회 선언문

이에 따라 안창호는 1928년 1월 지린성(吉林省) 지린에 가서 대독립당 결성을 촉성하는 연설을 하였다. 상하이와 베이징의 촉성회연합회 조직에서도 대표자 한 사람씩을 만주로 보내 1928년 5월 화톈현(樺甸縣)과 판스현(盤石縣)에서 열린 만주지역의 ‘전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중국지역에서 민족유일당은 결성되지 못하였다. 개별가입이란 모든 독립운동 단체의 해산을 전제로 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안창호처럼 당분간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더더욱 수용하기 쉽지 않은 주장이었다. 더구나 대독립당 결성운동을 촉발하는 직접적 계기였던 중국정세가 1927년 들어 급변해 가기 시작하였다. 4월에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반공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국민당 내에서 좌파와 우파 사이에 대결이 더욱 격화하는 데다,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의 적대적 대결도 날카롭고 강력해져 갔다. 마침내 7월이 지나면서 국공합작은 와해되었다. 중국에서 반공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전개된 국민혁명군의 북벌은 1928년 6월에 이르러 베이징에서 멈추었다. 만주로까지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개별가입을 원칙으로 하는 대독립당을 추진할 외부적 환경이 부정적인 데다 독립운동 내에서의 이념대결도 고조되어 갔으니 1928년 하반기 들어 대독립당 촉성운동의 추진력이 급속히 떨어져 갔다. 결국 1929년 10월 상하이의 상해촉성회가 해체를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이념의 차이에 따른 대결과 경쟁만 남았다.

상하이의 촉성회가 해체를 선언한 바로 다음 달인 11월경부터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사람들만의 정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물이 1930년 1월 25일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이다. 한국독립당은 중국 관내지역의 민족주의운동 계열만이라도 결집한 대독립당이며, 민족균등주의를 표방하였다.

이처럼 대독립당 촉성운동은 1920년대 중후반 관내지역 독립운동의 화두였다. 운동공간과 이념 및 단체를 불문하고 중국지역에서 항일에 동조하는 모든 희망을 모아 민족혁명을 지도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었다. 새로운 움직임 속에서 강경선과 박건병 지사는 베이징에서, 배천택 지사는 상하이에서 대독립당 촉성운동에 적극 동참하며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록 관내지역의 독립운동계가 결과적으로 좌우로 나뉘었지만 민족주의운동 계열은 대독립당 촉성운동 과정에서 자신의 이념을 새롭게 정립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안창호는 이때 대공주의를 제창했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이때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 흐름을 반영한 첫 번째 결정물이 1930년의 상하이 한국독립당이다.

2. 대독립당 촉성운동을 주도한 박건병

1892년생인 박건병은 강원도 김화군 김화면(金化面) 읍내리(邑內里) 673번지가 본적이다. 아호는 맹천(孟泉)이다. 미주지역 독립운동계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을 역임한 박용만(朴容萬)의 5촌 조카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 되던 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에서 첫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지원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에서 파견한 김상덕(金相德)이 철원군 동송면(東松面)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지역의 교육계와 기독교계 사람을 만나 애국단 소속 강원도 철원군단(鐵源群團, 일명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자 참가하였다. 이후 철원군단이 애국단의 강원도 조직을 관리하는 강원도단으로 위상이 높아졌고 그때 학무국장을 맡았다. 강원도단은 임시정부를 선전하고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벌였다. 임시정부 파견원인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철원면 사요리(四要里) 소시장에서 임시정부를 축하하는 연설회를 열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때 표면에 나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했고, 그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0년 1월 2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 때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2개월 정도 활동하다 베이징으로 갔다. 8월에 외교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판하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베이징군사통일촉성회가 결성되자 합류하였다. 이듬해 4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가 열리자 참가하여 의안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회의에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불승인하는 안건이 제출되자 찬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군사통일회의측의 요구로 촉발된 국민대표회의 소집 여론은 1923년 1월 현실화하였다. 회의는 5월까지 지속되었다. 회의 기간 동안 김갑(金甲)과 함께 베이징 대표로 참석하여 ‘선서 및 선언서’를 작성할 3인의 기초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 등으로 나뉘어 의견을 대립할 때 창조파를 대표하여 임시정부는 정부가 아니라며 임시정부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단체의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모두 무효로 간주하고 새로운 기관을 조직하자고 주장하였다. 외교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혈정주의’를 내세우며 폭력적 방법으로 투쟁을 전개하자고도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창조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국민위원회에 참가하여 집행위원 비서로 선출되었다. 소련은 일본과의 긴장관계를 원하지 않는 데다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국민위원회의 신정부 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국민위원회는 신정부를 세우는 대신 정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박건병 사망 기사(동아일보 1932년 1월 31일자)ⓒ국사편찬위원회
박건병 사망 기사(동아일보 1932년 1월 31일자)ⓒ국사편찬위원회

1924년 8월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 결성에 참가하였다. 북경한교동지회는 1925년 3월 1일자로 기관지 『도보(導報)』(조선어 : 『앞잡이』)를 창간하였다. 잡지를 순간(旬刊) 또는 월간으로 발행하여 노령, 서간도, 길림, 일본, 국내 등지에 보냈다. 무장투쟁을 수단으로 절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대독립당을 결성해야 하며 일제와 타협하는 자치운동도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잡지를 통해 국내외에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그도 이를 뒷받침하고자 창간호에 <혁명운동상 조직의 여하>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이듬 해 7월 이후 관내지역에서 대독립당 촉성운동이 시작되자 북경촉성회 결성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5월 만주에서 전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가 열렸을 때 베이징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길현(延吉縣) 동향수하자(東珦水河子)에 있는 계림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10일 동네를 침입한 강도에게 피살당하였다. 한창 활약할 나이인 41세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다양한 방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한 강경선

1891년 8월 15일 평북 정주군(定州郡) 대전면(大田面) 운전리(雲田里)에서 태어난 강경선은 아호가 극재(克齋), 이명이 원경(元景, 元卿)이었다.

1920년 12월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의 간사로 활약하였다. 이후 재건된 대한적십자회에서 1921년 11월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었고, 상해한인구락부 창립에 관여하여 사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선우섭(鮮于涉)과 같이 요녕성(遼寧省) 안동현(安東縣)에 있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거점으로 국내에서 획득된 정보를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연락과 정보 수집 및 전달에 관여하였다.

1923년 1월부터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태극단(太極團)의 대표로 참가하여 개조파 입장에서 활동하였다. 회의가 결렬된 이후에도 상하이에서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 의원으로 활동하며 인성학교(仁成學校) 유지에 노력하다 1926년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3월 여러 의원과 함께 임시의정원에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결의안>을 상정하여 18일 이승만을 탄핵하고 면직시키는데 앞장섰다. 임시의정원은 면직과 동시에 박은식(朴殷植)을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선언서
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선언서

1926년 7월 임시정부가 재정에 어려움을 겪자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만들어 지원하고자 하였다. 국내에서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연설회를 조직하고 운동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때마침 안창호가 제창한 대독립당 촉성운동에 호응 하면서 6.10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민족적 통일기관을 세우자고도 주장하였다. 자신의 주장을 실천에 옮기고자 1927년 임시정부의 홍진(洪鎭)과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홍남표(洪南杓) 등 4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인은 단체를, 단체는 유일당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도록 하자’고 주창하며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할 때 25명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난징에서 활동하다 1930년 8월 18일 피살되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대독립당 결성운동과 무장투쟁 준비에 노력한 배천택

1892년 경북 대구 견(堅) 254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성산(星山)이며, 본명은 배병현(裵炳鉉)이고, 독립운동하며 배달무(裵達武)라는 다른 이름도 사용하였다. 석정(石亭)이란 별호가 있다.

경북 성주(星州)에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여 1907년 5월 1냥(兩)을 의연금으로 납부하였다. 1909년 김동삼(金東三) 등과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 응용화학과에 입학하여 이듬해 12월 졸업하였다. 이때의 명부에 배병현이라고 나온다. 1916년 중국 북경공업대학에 입학했다가 중퇴했고, 청 말 쿤밍(昆明)에 세워진 군사학교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을 1919년에 졸업했다는 말이 있다.

1919년 랴오닝성(遼寧省) 류허현(柳河縣)에 있는 군정부(軍政府)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될 때 동참했으며, 1920년 9월 박용만이 주도하는 북경군사통일촉성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921년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성토하며 11월 박용만이 주도한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의 군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국민대표회 비서장 선출 관련 기사(동아일보 1923년 2월 17일자)ⓒ국사편찬위원회
국민대표회 비서장 선출 관련 기사(동아일보 1923년 2월 17일자)ⓒ국사편찬위원회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의 3인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비서장(秘書長)에 선출되었다. 군사분과 위원으로 활약하며 개조파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후 베이징으로 가서 활동하다 1924년 1월 친일분자와 밀정, 부정행위자 등 독립운동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파악하기 위해 결성된 한교구락부에 참여하여 조사위원,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8월에는 창조파 인사를 중심으로 북경한교동지회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실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창조파의 기관지로 1925년 1월 창간된 『도보(導報)』(조선어 : 『앞잡이』)의 발행에도 한진산(韓震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절대 독립과 무장투쟁 그리고 대독립당 결성을 주장하였다. 음력 1월 대구에서 온 이정기(李定基)를 접견하고 폭탄제조법을 가르쳐주었다. 이후 귀국한 이정기가 암살단을 조직한 사실을 1926년 7월 이육사(李陸史, 본명 李源祿)에게서 보고 받았다. 1925년 4월 도보사의 사무실에서 밀정 등을 처단하는 비밀결사로 다물단(多勿團)을 결성했고, 5월 조직의 이름으로 <악분자 소탕선언(惡分子 掃蕩宣言)>을 배포하였다.

1926년 7월 안창호가 대독립당 촉성운동을 촉구하자 베이징의 인사들도 여기에 적극 호응하여 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창립선언서와 간장(簡章)을 기초하였다. 이듬해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의 결성에 참여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을 뿐 아니라 5인의 상무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30년 2월 조성환(曺成煥) 등과 같이 베이징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결성하여 상하이의 한국독립당에 가지 않았다. 1932년 상하이에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창당했다가, 1934년 난징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중국 관내지역에서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정당통일운동의 결과 1935년 7월 난징에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결성될 때 신한독립당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행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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