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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강제하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5년

주요공적

1919년 평북 창성 3·1운동 참가, 대한독립청년단에 참여하고 부단장 역임

1924~1925년 사이에 대한통의부 재무부장 엮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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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하 / 이웅해 / 백남준 / 최명수

강제하 , 1891 ~미상 , 독립장 (1995) 이웅해 , 1878 ~미상 , 독립장 (2010) 백남준 , 1885 ~미상 , 독립장 (2014) 최명수 , 1881 ~1951 , 애국장 (1991)

1. 남만한족통일회의를 통해 통합된 한국독립군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압록강 넘어 중국 땅 남만주(南滿洲)에서 한국 독립군을 하나로 묶는 회의가 개최되었다. 1922년 8월, 남만한족통일회의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이회의의 목적은 남만주에 흩어져 항일무장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 독립군을 통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해 한국 민족운동가들은 만주지역에 수십 개의 독립군단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독립군을 양성해 최신식 무기로 무장시켜 국내진입 유격전을 펼쳤다. 국내로 들어 온 독립군들은 일제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그 수뇌 일본인과 친일 한국인을 처단하는 무장 활동을 펼쳤다.

독립군의 활동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그 근본을 뿌리 뽑는다는 계획 하에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으로 침입시켰다. 이 침략군은 이듬해 4월까지 약 7개월간 한국 독립군의 근거지가 있는 북간도와 서간도를 대상으로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 독립군을 양성하는 근원이라 하여 이주한인사회에 세워진 학교·교회는 물론이고 가옥·식량마저 보이는 대로 파괴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반일의 기미를 보였다하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총칼을 사용해 살해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수천 채의 가옥·교회·학교가 불타고 수천 명의 한인이 목숨을 잃었다.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가 초토화된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일컫는다.

남만한족통일회의는 이 같은 참변을 극복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다. 1922년 8월 23일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 현 지명 : 향양[响陽])에는 남만주에 있는 17개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 50여 명이 모였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등이 참가했으며,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김승만(金承萬)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통합의 방법을 논의했다. 그리고 7일 후인 8월 30일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대한통의부 발족 보도 기사인 「남만 각 단체 대통일 별보」(『독립신문』 1922.9.30일자)ⓒ독립기념관
대한통의부 발족 보도 기사인 「남만 각 단체 대통일 별보」(『독립신문』 1922.9.30일자)ⓒ독립기념관

통합 독립운동체인 통의부는 두 가지의 임무 달성을 목표로 탄생되었다. 첫째는 경신참변으로 폐허가 된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하루빨리 재건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립군의 근본 목표인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해 이어가는 것이었다. 첫째 목표를 위해 통의부는 김동삼(金東三)을 총장으로 하고 그 밑에 민사·재무·학무·교섭·권업·군사·참모·법무 등 8개 부서를 갖춘 중앙 자치조직을 구성했다. 후자를 위해서는 김창환(金昌煥)을 사령관으로 한 통의부 의용군을 편성했다. 그리하여 이후 통의부는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단체가 되었다.

2022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웅해(李雄海)·백남준(白南俊)·강제하(康濟河)·최명수(崔明洙) 등 네 분은 이 남만주 통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통의부를 이끌어 간 주도적 인물들이다.

2. 재만 항일무장 투쟁의 터전을 만든 이웅해

남만한족통일회의에 대한독립군 대표로 참가한 이웅해는 초기 독립군기지 터전을 다진 독립군 지휘관이었다. 1878년 함경남도 상기천면(上岐川面) 오노동(五老洞)에서 출생한 이웅해는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했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주저하지 않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리고 함께 망명한 동지들과 항일무장의 기반을 조성하다가 1919년 4월 15일 류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대한독립단이라는 독립군단을 성립시켰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 관동의병을 이끌었던 박장호(朴長浩)가 총재로 선임 되었고, 부총재는 백삼규(白三奎), 총단장은 조맹선(趙孟善)이 맡았으며, 그는 사법부장을 맡았다. 이 군단은 설립지인 삼원포에 중앙조직을 편성하고 빠른 시기에 만주와 국내에 많은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해 조직망을 구축했다. 지단과 지부는 이동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거점이 되었기에 대한독립단 소속 독립군들은 활발한 항일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독립단은 설립된 지 얼마 후, 구성원 간에 조국이 광복되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왕정을 세우자는 복벽(復辟)주의자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같이 공화제 국가를 세우자는 공화(共和)주의자들로 나뉘었다. 이 갈등은 결국 복벽파들은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을, 공화파는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을 만들며 분리되었다. 이웅해는 기원독립단을 선택해 부단장을 맡았고, 그 위로는 총재에 박장호, 단장에 조맹선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1920년 초, 조맹선이 관전현(寬甸縣)에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사령부가 성립되어 그 단체의 사령장으로 옮겨가자 이웅해가 기원독립단의 총단장이 되었다.

그가 이끈 기원독립단뿐 만 아니라 적게는 백여 명 많게는 수백 명의 독립군을 보유한 만주의 독립군단들은 1919, 20년 치열하고도 줄기찬 항일무장 전투를 펼쳤다. 따라서 일제는 앞에서 언급했듯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만주로 침입시켜 경신참변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 1922년 봄 남만주지역 독립군단 대표들은 통합 독립군 단체인 대한통의부를 성립시켰다. 이웅해는 통의부를 성립시키기 위한 회의인 남만한족통일회의에 22명의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군 대표로 참가했다. 그리고 통의부가 탄생되고 난 후에는 총장 김동삼 밑에 편성된 8개의 자치조직 중 민사부장에 선임되었다. 민사부는 이주한인과 독립군의 생존을 책임지는 부서였다. 한인사회로 들어오고 나가는 한인들의 호구조사, 적령기 한인청년을 독립군으로 참가시키는 징병활동, 생계가 곤란한 한인을 구제하는 구휼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통의부는 성립 후 자치와 무장활동을 충실히 수행하며 남만주지역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1923년 초, 구성원 중 복벽주의계와 공화주의계 간에 갈등이 일어나 복벽파가 의군부(義軍府)를 만들어 이탈하고, 1924년 초에는 적극적 항일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일부세력이 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해 분리해 나갔다.

대한통의부 발행 어음(1원)
대한통의부 발행 어음(1원)

조직내부에 이 같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웅해는 계속 남아 민사부장에 이어 재무부장을 맡으며 통의부를 이끌었다. 그러다 참의부 세력 이탈 후 남은 인사들이 다시 한국 독립군의 통합을 주장하며 전만통일회의(全滿統一會議)를 개최하자 1924년 6월 하순 통의부의 직책을 사임하였다. 개인의 이념과 노선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를 무시하고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묶는 것은 무리이며 효율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참의부에서도 그와 함께 하기를 원했으나 모든 것을 뿌리치고 북만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그러나 그의 독립군 지도자로서의 행적은 북만주에 들어와 있던 일제 세력에게 포착되고 말았다. 1928년 12월 경 일제 경찰대에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당해 징역 8년을 언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남만주 독립군기지 구축과 통합에 앞장선 백남준

남만한족통일회의 개최 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대표로 참가한 백남준은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 독립군 지휘관 중 한명이다. 1885년 평북 운산군(雲山郡) 성면(城面) 연봉하동(延峯下洞)에서 출생한 백남준은 남만주로 망명하기 이전 국내에서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1년에는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되었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판결 받았다.

석방 후 남만주 흥경현(興京縣)으로 망명했고, 1915년 그곳에 민족학교인 흥동학교(興東學校)를 설립했다. 1910년대 남만주지역은 신민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군기지로 개척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도 기지 개척에 적극 가담했고, 1919년 3월에는 현익철(玄益哲)·김규환(金奎煥) 등과 한교공회(韓僑公會)라는 독립군단을 설립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그와 함께 그 시기 서간도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 한족회(韓族會)의 지단장직도 수행했다.

1920년 초, 서간도 관전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의 광복군이 성립되었다. 광복군은 산하에 참리부·사령부·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무장활동 별동대인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다. 백남준은 오동진(吳東振)이 총영장이 되어 이끈 부대의 군사부장 겸 참모부장에 선임되어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광복군총영의 대원들은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의 한국 방문 시, 국내로 진입해 평남경찰부 청사, 평양부청, 평양경찰서, 선천군청과 경찰서, 신의주역 앞 호텔 등에 폭탄을 투척해 의원들에게 한국독립의 당연성을 알리고 일제를 긴장시켰다.

경신참변 후, 개최된 남만한족통일회의에 백남준은 김창의(金昌義)·장영해(張永海) 등 4명의 동지들과 광복군총영의 대표로 참가해 통의부를 성립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정작 통의부가 성립하자 초기에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이유는 같은 시기 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 움직임이 있자 서간도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백남준은 통의부로 돌아와 1923년부터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24년 11월 24일 통의부에 이은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성립 시까지 이 직책으로 통의부를 이끌어간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정의부 또한 통의부와 마찬가지로 남만주 한인사회를 이끌며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무장활동을 수행한 단체였다. 백남준은 정의부 중앙조직 중 사법기관인 검판청(檢判廳)의 검판장에 선임되었다. 이외에 손정도(孫貞道)·오성백(吳聲伯) 등과 함께 유한농업공사를 설립해 한인사회의 산업발전과 생계를 위해 노력했다. 그런가하면 1925년 8월부터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남만주를 무대로 조국광복을 위해 이 같은 활동을 수행한 백남준은 1930년대 초, 일제가 한국에 이어 만주까지 침략의 마수를 본격적으로 뻗어오자 북만주 액목현(額穆縣) 중가(中街)라는 곳으로 옮겨 정미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1932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성립된 후, 한국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지자 피체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4. 초기 독립군단 성립과 통합의 선봉장으로 활동한 강제하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에서 권업부장으로 활동한 강제하는 정의부에 이어 조선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남만주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1891년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창성읍 평로동(坪路洞)에서 출생했다. 청년이 된 강제하는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1일 창성읍 서문밖에서 2천여 명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일제가 시위 주도인물로 지목해 검거하려하자 압록강을 넘어 남만주로 망명했다.

남만주에 도착해 고향인 평안북도의 인사들과 힘을 합해 안동현(安東縣, 현 단둥[丹東])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만들고 부단장을 맡았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접안지역에서 활동한 대한독립청년단은 수시로 독립군을 국내로 파견해 일제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그 수뇌 및 친일한인들을 처단했다. 또 많은 군자금을 모집해 일부는 청년단의 운영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상하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 활동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1920년 10월경에는 청년단의 단장이 되어 무장활동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가 독립군단의 책임자가 되어 항일무장활동을 지휘하려할 즈음 일제는 독립군기지를 초토화시키고자 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에 강제하는 부하 독립군들을 이끌고 산간오지로 일시 피하는 피전책을 썼다. 그리고 만행을 끝낸 일본군이 철수하자 진영으로 돌아와 파괴된 진지를 재건했다.

1922년 8월 남만한족통일회의가 개최되어 통의부를 탄생시켰다. 통의부 성립초기 강제하는 기존의 독립군세력을 수습하느라 함께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곧 통의부에 가담해 독립군의 모태가 되는 한인사회와 독립군의 생계를 책임지는 권업부장을 맡았다. 독립군 및 이주한인의 생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권업부의 업무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후 강제하는 통의부에서 교통위원, 행정위원, 법무위원장 대리, 선전위원회 부장, 학무위원장, 재무부장 등의 직을 수행하였다.

통의부는 1924년 11월 24일 광정단(光正團)·서로군정서 등 7개 단체와 통합해 정의부를 성립시켰다. 정의부에서 강제하는 중앙행정위원에 선임되고, 산하의 교육기관인 화성의숙(華成義塾)의 재무를 맡았다. 화성의숙은 정의부에서 쓰일 군사와 정치 간부를 양성하기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초기 숙장은 최동오 였으나 강제하는 그의 뒤를 이어 숙장을 맡아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이후 정의부에서 대표회 위원,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단체의 최고위 간부로서 역할을 다했다. 1926년 12월에는 동지들과 조선혁명자 후원회를 만들어 조국광복사업에 매진하다가 피해를 입은 당사자나 그 가족을 후원하는 사업을 펼쳤다.

1927년 한국독립운동계는 전 민족운동자들을 하나로 묶는 민족유일당운동을 일으켰다. 강제하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만주독립운동계를 하나로 통일하는데 앞장섰다. 그 결과 전만주를 통일하지는 못했지만 남만주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이, 북만주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이 성립되어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은 당(黨)이, 항일무장활동은 군(軍)이 추진하게 되었다. 강제하는 조선혁명당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이후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어 갔다. 대한민국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5.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의 선구자 최명수

최명수는 1922년 8월 성립한 대한통의부의 검무국장에 임명되어 통합독립운동 단체 지도부의 일원이 된 인물이다. 그는 통의부 이후부터도 상당한 기간 독립운동에 매진했지만,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개척시기부터 신명을 바쳐 터전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최명수는 1881년 12월 22일 충청북도 청원군 북일면(北一面) 도원리(桃源里)에서 출생했다. 성장해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일시 천안 목천면(木川面)에 있는 교회에서 근무했으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곧바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국내에서 건너 온 신민회(新民會)인사들과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적극 참여했다.

1910년을 전후해 서간도로 망명한 민족운동자들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1911년 4월 류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세웠다. 그런데 이 단체는 설립 되던 해 큰 한파를 만나 이주한인들이 대규모로 희생을 당했다. 이에 지도자들은 이듬해 통화현(通化縣)으로 옮겨 조직의 체계를 새롭게 하고 단명을 부민단(扶民團)으로 바꿨다. 최명수는 단총(團總)에 선임되어 부민단의 실무를 이끌었다.

이후 부민단은 서간도 전지역의 이주한인사회를 총괄해 이끌며, 건실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갔다. 한인마을 곳곳에 민족학교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白西農庄) 같은 무관학교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했다. 독립운동기지가 넓혀지고 건실해가는 만큼 일이 늘어나 최명수는 총단 이외에 검찰부장, 통동지방총관(通東地方總管) 등을 맡아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위해 서간도 지도자들은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변경했다. 한족회는 실질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해 갈 단체로 이탁(李沰)을 총장으로 하고 단체의 최고결정기관인 중앙위원회와 총무·학무·외무·내무·군무사(軍務司) 등의 부서를 편성했다. 최명수는 내무사 소속인 검무국장과 군무사 소속인 헌병과장을 겸임해 맡았다. 이어 한족회는 1919년 11월 무장활동 전담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만들었다. 최명수는 한족회의 일을 계속 이어가면서 이 군단 특무지휘관이 되어 무장활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1920년 10월 이후 서북간도의 독립군기지는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 되는 경신참변을 당했다.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통의부에서 최명수는 검무국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대한통의부 훈련 광경ⓒ독립기념관
대한통의부 훈련 광경ⓒ독립기념관

통의부에 이어 1924년 11월 정의부가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탄생했다. 최명수는 이 단체를 성립시키기 위한 전만통일회(全滿統一會)에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표로 참가했다. 정의부가 성립되고 초기 조직을 정비할 시기 자치분과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조직이 완비되고 난 후에는 검리장(檢理長)에 임명되었다.

1927년 이후 한국 독립운동계는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묶기 위한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만주독립운동계는 완전한 하나를 만드는데 실패하였다. 이에 최명수는 1920년대 후반 만주를 떠나 상하이(上海)로 갔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활동 중 1934년 12월 6일 일제의 상하이영사관 경찰대에 피체되고 말았다. 국내로 압송되어 1935년 6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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