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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갑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86년

주요공적

1912년 상해에서 동제사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

1919~1933년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및 국무원으로 활동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김갑 / 한흥교 / 민제호

김갑 , 1889 ~1933 , 독립장 (1986) 한흥교 , 1885 ~1967 , 애국장 (1990) 민제호 , 1890 ~1932 , 애국장 (1990)

1. 한국 독립운동에 초석을 놓은 동제사

1910년 8월 이후 한민족에게 항일독립은 민족의 지상과제였다.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움직임은 해외에서도 즉각 나타났다. 연해주에서 권업회, 남만주에서 경학사,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이들 단체는 이주한 한인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서로 의지하며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국권회복을 위한 기반을 다져갔다. 1912년 상하이에서 결성된 동제사(同濟社)도 그 중 하나였다.

동제사의 동제란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이르고자 하는 경지에 도달하자’라는 뜻의 동주공제(同舟共濟)를 줄인 말이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동제사는 신규식 이사장을 중심으로 회원 사이의 친목과 융화, 상호구제를 지향하였다. 활동 과정에서 형성된 네트워크는 국권회복을 향해 발걸음을 함께하는 디딤돌이었다.

신규식의 동제사창립 취지문
신규식의 동제사창립 취지문

동제사라는 연결망에서 함께 움직인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노동이주나 농업이민이 동기였던 미주나 연해주의 이주와 달리, 동제사에는 애국계몽에 참여했다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지사들이나 아니면 유학을 목적으로 이주한 청년지식인이 많았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지적 수준이 높거나 시민적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동제사에 모여든 사람들의 특징은 상하이라는 도시와 연관 지어 설명할 수도 있다. 상하이는 세계 각지와 연결되어 있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개방적인 국제 도시여서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고 자유로웠으며 정보 유통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래서 국제 여론을 파악하여 외교 활동을 벌이거나 최신 사조와 접촉하기에 유리한 도시였고,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계의 각지로 이동하기도 편리한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 중국은 신해혁명이 진행중이었다. 주권이 군주 1인에게만 있지 않고 인민에게 있다는 ‘중화민국’이 등장한 격동의 시기였다. 망국 이후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하는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는 신해혁명에서 독립운동의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하이의 첫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 설립을 주도한 신규식이 바로 그러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규식 사진
신규식 사진

동제사는 신규식 이사장을 중심으로 신채호, 박은식, 조소앙, 김규식 등 시민적 민족주의사상과 대동사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참여한 단체였다. 국혼(國魂)을 중시하는 민족주의 역사관을 품은 사람과 대종교를 믿는 회원이 많은 단체였다. 그들 사이에는 독립을 위해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무엇인가에 집중한다는 활동방향과 더불어 복벽(復辟)적인 정치이념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최소한의 공감대가 있었다.

동제사는 상하이에 도착한 독립운동가들이 뿔뿔이 흩어져 개별 활동에 그치지 않도록 이들의 독립의지를 하나로 엮어내며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중 하나가 유학예비교육기관인 박달학원을 1913년 12월에 결성한 일이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고등교육과 전문교육을 실시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이에 수준 높은 지적 욕망을 채우려는 젊은이들은 일본 아니면 중국이나 구미로 유학을 가야만 하였다. 상하이는 비자가 없어도 출입이 자유로운 국제 도시여서 중국이나 구미 유학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경유지였다. 동제사는 박달학원을 설치하고 이들을 영어반과 중국어반으로 나누어 전문적인 어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투철한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민족교육도 정규 과목으로 설정하여 100여명의 인재를 3기에 걸쳐 배출하였다.

동제사의 연결망은 상하이에 한정되지 않았다. 상하이의 본부를 거점으로 일본, 만주, 미주, 국내에 지사를 두고 서로 연락하고 정보를 교환하였다. 그래서 미주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 등을 만주 봉천성의 안동현을 거쳐 국내에까지 배포할 정도였다. 또 한국인만의 연대를 넘어 중국인 혁명 지도자들과 유대 관계를 맺어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지원 세력을 확보하고자 신아동제사를 결성하였다.

이처럼 1910년대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동제사의 회원들은 1915년 신한혁명당 창당, 1917년 <대동단결선언> 선포,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 1919년 4월 상해임시의정원에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회원들은 주권이 인민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공표하였다. 국제사회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달하고자 노력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동참하여 민주공화제 원리를 제도화하는데 기여하였다. 동제사는 한국 독립운동이 나아가야할 길에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김갑, 한흥교, 민제호 지사는 이러한 과정에서 성장하며 각자의 처지에서 꾸준히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2. 독립의 꿈을 품고 헌신한 김갑

1889년생인 김갑은 부산 동래에서 아버지 김석련(金石鍊)과 어머니 박옥(朴玉)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본명은 김진원(金瑨源)이다. 부산 사하구 출신인 조금이(趙今伊)와 결혼하여 1남1녀를 두었다.

안희제 사진
안희제 사진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 되던 해인 1917년 5월에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이때 이미 민족의식을 품고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1909년 백산 안희제 등이 주도하여 영남지역의 첫 비밀결사로 조직한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다. 그래서 상하이에 오자마자 동제사에 가입하였다.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여 간부로 활동하며 상하이에 대종교 서도본사(西道本司)를 설치할 정도로 몰두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이 수립되자 경상도 대표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이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4월 22일에 교통부 위원, 7월에 군무위원회 이사, 법제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조직의 안착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후 김원봉이 주도한 의열단이 11월에 결성되자 여기에도 가입하였다. 이즈음부터 안창호와 이동휘가 주도하는 1920년의 독립전쟁 준비에도 함께하였다.

즉각적인 독립전쟁 노선이 일본군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이 큰 논란을 일으키며 임시정부를 개편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는 임시정부를 지키는데 노력하는 한편,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함께 지혜를 모으고자 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참가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자격 심사 위원, 선언문 및 선언서 수정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안창호 등과 함께 개조파의 입장에서 임시정부를 옹호하였다.

임시정부를 개선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한 차례의 풍파가 지나간 이후인 1924년 4월에 법무총장대리차장, 12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동총판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12월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자 이때부터 1930년까지 재무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졌다.

이즈음 중국에서는 큰 정세가 조성되고 있었다. 장개석은 중국공산당과의 제1차 국공합작을 바탕으로 국민혁명을 내세우며 베이징까지 북벌을 진행하였다. 독립운동가들도 새로운 정세에 호응하여 국민혁명에 직접 참가하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는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1927년 4월 결성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집행위원에 선출되면서 조선민족혁명을 이끌 지도기관을 결성하는데 힘을 보탰다.

1929년 들어 중국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던 유일당 결성 운동이 중지되었다. 대신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이념이 다르다며 날카롭게 대립하는 날이 늘어갔다. 이에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민족주의자들은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유일한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그도 창당에 참여하였다.

독립을 위해 쉼 없이 활동하던 김갑은 중국에 온 지 16년만인 1933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광제의원에서 4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장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정부는 김갑의 공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의사라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한흥교

부산 동래가 고향인 한흥교는 담뱃대 공장을 경영하는 한규용(韓奎容)의 장남으로 1885년에 태어났다. 청주가 본관이며 한진산(韓震山, 韓辰山), 한생(恨生)이란 다른 이름도 사용하였다. 16살에 이인옥(李仁玉)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 한형석(韓亨錫, 1910~1996)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한국광복군 소속으로 군가를 작곡하고 항일가곡극을 제작하며 활약한 항일예술운동가였다.

1910년 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출신 중 처음으로 서양 의사가 되었다. 1911년 10월 요코하마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상하이로 건너가 혁명군의 홍십자회(紅十字會)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항저우에 이어 베이징의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1913년부터 중화민국 육군의 군의정(軍醫正, 한국군 소령)까지 겸직하였다.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1916년 3월 귀국하여 고향에 대동병원을 개업하였다. 하지만 경찰의 심한 감시로 생활에 위협을 느껴 1년 6개월 만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베이징의 경사(京師)전염병원에 근무하며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신채호와 함께 <<중외통신>>과 <<신광신보>>라는 간행물을 한글과 중국어로 발행하여 러시아, 미주, 중국 각지에 발송하였다. 이즈음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로 들어오는 통신이나 서류를 전달하는 비밀 업무를 담당하였다. 심지어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하는 맏아들 편에 안희재에게 편지를 보냈고, 돌아온 맏아들은 안희재가 건넨 편지와 김갑에게 주라는 거액의 운동자금을 가지고 올 때도 있었다. 1925년에는 원세훈 등과 <<앞잡이>>(導報, The Lead of Korea)라는 사상 잡지를 발행하며 ‘한생’이란 필명으로 민족 독립의 진로를 모색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6년 6월 장개석이 국민혁명을 내세우며 베이징을 향해 북벌을 감행할 때 이념이 달라도 같이 활동하자는 취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연합하여 민족유일당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한흥교도 원세훈이 이끄는 베이징의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에 합류하여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에 참가하였다.

1927년 6월 부친이 별세하자 귀국하여 대동병원을 운영하며 경오구락부(庚午俱樂部)라는 청년단체 결성에 동참하여 지역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1932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타이위안, 만주의 뤼허 등지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타이위안에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1946년 5월 3백 여 명의 동포와 함께 귀국한 이후 경상남도 도립마산병원 병원장으로 근무하다 1948년 부산에서 내과를 개업하였다. 이승만 정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던 중 1956년 결성된 진보당에 참가하여 초대 경상남도위원장을 엮임하였다. 1967년 8월 82세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한흥교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 임시정부를 수호한 민제호

1890년생인 민제호는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자가 소운(少雲)이고, 독립운동을 하며 민우명(閔禹明)이란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다.

1913년 11월경 상하이로 건너가 김갑, 한흥교와 마찬가지로 동제사에 가입하고, 대종교 신자로도 활동하였다. 신규식의 기억에 따르면 동제사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19년 4월 22일 상하이에서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 때 69명의 의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4월 30일에 열린 제4회 회의 때 임시정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의연금 모집이 결정되고, 여운형 박희선과 함께 경기도 의연금 모집위원에 선출되었다.

대한적십자회 회원 대모집 경쟁회(독립신문 1919년 11월 27일자 광고) ⓒ독립기념관
대한적십자회 회원 대모집 경쟁회(독립신문 1919년 11월 27일자 광고) ⓒ독립기념관

1929년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에서 다른 대중단체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 1919년 5월 여운형이 단장에 취임한 대한민국청년당 결성에 참가하여 재무부장으로 활약하고, 1919년 8월에 대한적십자회와 1920년 9월 대한인거류민단의 회원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성명서가 발표되고 임시정부를 개혁해야 한다며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하는데 대해, 극소수 모리배가 정부를 근저에서 파멸하려는 임시정부파괴운동이라 규정하고 반대하며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보조를 같이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거가 있은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와 같이 항저우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곳 자취방에서 병을 얻어 1932년 42세에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는 민제호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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