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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철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주요공적

학부주사 봉직 중 을사조약 강제체결 반대운동 전개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음독 순국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상철 / 김봉학 / 이건석 / 홍만식

이상철 , (1876) ~1905 , 독립장 (1962) 김봉학 , (1871) ~1905 , 독립장 (1962) 이건석 , 1852 ~1906 , 독립장 (1963) 홍만식 , (1842) ~1905 , 독립장 (1962)

1. 을사늑약의 체결과 민중의 저항

1904년 2월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이전 서울로 진군하여 주둔 중인 일본군의 압박에 밀려 일본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방과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국정 전반에 대한 간섭을 가해왔다. 이어 1905년 4월 8일 일본은 내각 회의에서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방침을 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를 일본이 담당하고, 대한제국의 신민을 일본의 보호에 속하게 하고, 대한제국의 내정을 일본이 감독한다”는 내용의 한국보호국화정책을 확립하였다.

일본은 1905년 3월 봉천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5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한해협에서 기습하여 격멸시킴으로써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러한 승전을 배경으로 7월에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 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다는데 합의한 것이다. 이어 8월에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하고, 9월에 미국 뉴햄프셔주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일본은 동맹국 영국과 대한제국의 후견인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 권한을 인정받았다.

서양 열강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차례로 인정받은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한 보호국으로 삼기 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하였다. 1905년 10월 27일 일본 내각은 ‘한국 보호권확립 실행계획서’를 통과시켰고, 이 계획서는 그날로 일왕의 재가를 받아 효력을 발휘하였다. 이때 일본은 이 계획서를 실행하기 전에 서울에 주둔 중인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력한 군사적인 압박을 가한다면 한국보호국화정책이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 황실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어 서울에 도착했다. 다음날 이토는 경운궁에서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사를 특별 파견하니 대사의 지휘를 한결같이 따르도록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왕의 친서를 전달했다. 일왕의 친서는 부드럽고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으나 그 내용은 일본의 한국통치를 양해해달라는 오만한 침략적인 것이었다.

11월 15일 이토 히로부미는 다시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일본이 만들어놓은 을사늑약의 조약문을 들이밀면서 이를 체결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고종은 ‘보호조약(保護條約)’의 체결은 매우 중대한 일이니만큼 대신들의 의견을 묻고 백성들의 뜻도 살펴야 한다고 하면서 승낙을 거부했다. 또한 이토가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할 것을 고종에게 요구했으나 고종은 열국과의 외교를 유지하면 언젠가는 일본의 마수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11월 16일 일본군이 2-300명씩 무리 지어 서울 시내를 순회하였고, 헌병들은 2-30명씩 각요충지를 지키며 백성들이 내왕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하였다. 11월 17일 이른 아침에 도성 밖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기병·포병·보병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 궁성 안팎을 겹겹이 포위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일본은 한국병탄정책의 기초로 작용한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와 같은 상황을 연출하며 대한제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던 것이다.

서울 시내에 포진한 군대를 배경으로 16일 오후와 17일 오전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손탁호텔과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조약 체결을 거부하여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이미 일본에 매수되었거나 굴복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은 조약 체결의 불가피성을 시인하며 조약 체결을 승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11월 17일 저녁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동원하여 경운궁의 각 문을 장악하고 고종황제의 집무처인 수옥헌(漱玉軒)을 겹겹으로 포위하고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일본의 강압에 짓눌린 고종은 각 대신들에게 일본과 잘 협상하여 처리하도록 허락했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어 이토가 주재한 대신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등은 반대했으나 을사오적이 조약 체결을 찬성함으로써 11월 18일 새벽 2시경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일제는 고종의 윤허도 받지 않고 외부에서 인장을 강탈하여 날인을 마치고 18일 오후 2시를 기하여 효력이 발생하도록 하였다.

을사늑약 조문

  • 1조

    일본국 정부는 일본 외무성을 거쳐 금후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독·지휘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한다.

  • 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책임에 있어서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한다.

  • 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들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밑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함을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를 알현하는 권리가 있다. 일본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하는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시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였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 사무를 관리한다.

  • 4조

    일본국과 한국 간에 현존하고 있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 조항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한다.

  • 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도록 보증한다.

(『구한국관보』, 1905년 12월 16일)

을사늑약의 체결로 내정권과 외교권을 빼앗김으로써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합법적 동의가 없는 불법적 조약이었다. 조약이란 명칭이 부여되지도 않았고, 일본 군인들을 앞세운 위협적인 분위기하에서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일본 측은 이를 ‘제2차 한일협약’ ‘한일신협약’ ‘을사보호조약’ 등으로 부르며 합법적으로 체결된 것처럼 주장했지만, 을사늑약은 조약 체결 상대방의 최고책임자인 고종황제의 인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효력이 없는 조약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후에 고종황제는 그 조약이 대한제국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체결한 ‘늑약(勒約)’이라는 사실을 열국에 통고하였다. 을사늑약 직후 고종은 영국 신문기자를 통해 자신의 친서를 신문에 보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친서의 내용은 고종은 “조약을 승인하거나 조약문에 날인한 적이 없으며, 대한제국의 독립권을 일호도 타국에게 양여한 적이 없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나 내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으며, 일본 통감의 한국통치를 승인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불법적인 보호조약의 강제 체결에 성공한 일본은 1905년 12월 20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제정하여 공포했다.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조약의 실행기관으로서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지방의 중요 도시에 이사청을 둔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제는 한국의 내정까지 완전히 장악한 셈이다. 일본은 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에 임명하여 대한제국 경영에 나섰다.

고종황제의 날인도 없고 국제법도 무시한 상태에서 강제 조인된 망국적인 을사늑약의 체결에 대해 한국민은 거세게 반대하였다. 이는 을사늑약 체결 전부터 중앙과 지방에서 항일전쟁으로 나타났다. 반일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 활동하는 가운데, 1905년 7-10월 강원도에서는 원용팔(元容八)과 정운경(鄭雲慶) 의병장이 봉기하여 친일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포츠머스강화회담이 열린 직후인 1905년 9-10월경 김동필(金東弼)·이식(李侙) 등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 소속의 유생 수십 명이 주한 각국 공사관에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국제법에 근거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대한제국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공사관과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항의서한을 보내 한일 양국의 항구적인 평화를 강조하고 일본의 한국보호국화정책의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을사늑약의 체결과 함께 한국인의 반일운동은 거족적인 항일민족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늑약 체결을 강요하고 있던 1905년 11월 17일 밤 수십 명의 군중이 조약 찬성자인 학부대신 이완용의 집에 돌입하여 불을 질렀다. 이것은 조선민중들의 반일열기가 치열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아울러 만약 조선인의 의사에 반하는 늑약이 체결될 경우 반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1월 18일 아침 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궐밖에 알려졌다. 각 학교 학생들은 모두 등교를 포기하고 통곡하면서 귀가하였고, 이미 등교한 학생들은 교사들과 함께 서로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망국을 분통해 하였다. 또한 관료들은 업무를 전폐하고 상인들은 철시하며 망국 조약 체결의 울분을 달랬다. 지방유생들은 서울로 올라와 조약 폐기를 외치고 조약에 찬성한 5대신을 ‘나라를 팔아먹은 다섯 역적(賣國五賊)’이라 매도하면서 처벌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군사를 파견하여 친일대신들의 저택으로 가서 호위하도록 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반대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애국언론들의 보도는 백성들의 항일열기를 증폭시켰다. 일본의 엄격한 검열에 의하여 그 보도와 주장이 통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기관은 반일운동의 선봉에 나섰던 것이다. 예컨대 황성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은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이날에 목 놓아 크게 통곡하노라”라는 뜻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이토 히로부미의 침략정책과 을사늑약을 찬동·조인한 매국대신들을 규탄하고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못한 참정대신 한규설을 질타한 후 국가가 멸망함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황성신문』의 항일사설 보도를 필두로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을사오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며 그들의 처형을 요구하는 반일·반침략 운동이 봇물처럼 솟구쳐 나왔다. 이 시기 한국민의 강렬한 저항운동의 기세에 대해서 일본은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명하였다.

한국 관민 대부분은 고루하고 완고하여 대세에 밝게 통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명치 38년(1905) 11월의 협약 체결 이래 우리 보호국이 된 것을 분개하여 백방으로 술책을 부리고 방책을 써서 그 올가미를 벗어나려 하였다.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군중에 이르기까지 힘써 우리 일본의 대한정책을 비방하고 우리 시설을 방해하고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인심을 선동하고 있다. 우연히 일어난 작은 사고 하나라도 이를 과장하여 배일(排日)의 대상으로 삼고 일본인의 작은 비행 하나라도 이를 확대하여 외국인의 동정에 호소하려 하였다. 더욱이 선교나 신문 사업에 종사하는 외국인이 이를 유포 선전하고 혹은 일본인 중에 역시 신문이나 잡지에 무책임한 언론을 자행하는 경우가 있어서 더욱 배일의 기세가 고취되었다.(小田倉啓, 『朝鮮の保護及び倂合』, 東京:友邦協會, 1956, 32쪽)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당하자 한국민의 을사늑약 반대운동이 여러 갈래로 펼쳐졌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에 전·현직 고관들은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 철회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청했다. 아울러 전·현직 하급관리들과 유생들은 대한13도유약소와 같은 단체를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항일활동을 벌였고, 외국공사관에도 서한을 보내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하고 외국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경운궁의 고종황제는 측신들을 서양 각국 정부와 공사관에 보내 을사늑약의 무효를 통보하고 일본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각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독립운동을 벌였다. 나아가 고종은 측근의 신하들로 하여금 재야의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연대하여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나아가 국권을 상실당한 것은 궁극적으로 대한제국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게 되어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애국계몽운동의 열기가 민간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반대운동이 점차 치열해져가는 가운데 상소운동과 같은 온건한 형태의 항일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자 자결 순국을 통해 일제의 불의에 항거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나왔다. 이들은 을사늑약 체결 자체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하거나 일제의 요인과 친일파들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한 후 자결 순국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들의 연이은 자결 순국은 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을사늑약 직후라는 시기는 아직 대한제국이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자결 순국 사례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의 자결 순국 사례보다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의 자결 순국자는 고관과 평민을 가릴 것 없이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다. 심지어 중국인과 일본인 등 외국인까지 자결 순국에 가담한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을사늑약 이후의 순국자들을 관직과 신분에 따라 갈래지어 보면, 대신급의 민영환(閔泳渙)·조병세(趙秉世), 전직고관 홍만식(洪萬植)·송병선(宋秉璿)·이명재(李命宰)·이설(李偰) 등, 하급관료 이상철(李相哲)·이건석(李建奭)·유기원(柳冀元) 등, 평민 김봉학(金奉學)·여종 공임(恭任)·배씨(裵氏) 등 외국인 반종례(潘宗禮)·서판풍(西坂豊)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이들은 그 숫자는 적은 편이나 최고위 관료로부터 막노동꾼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을사늑약 이후 최초의 순국자는 평민 중에서 나왔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파되어 나가자 많은 양반과 백성 들이 매우 분격(憤激)해 하며 치를 떨었다.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쉬는 사람들과 길게 목 놓아 통곡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런 가운데 돈의문(敦義門) 밖에 사는 배씨라는 성을 가진 가옥중개업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돈의문 밖에 있는 원교(圓嶠)에 올라가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며칠을 통곡하다가 그대로 자살하였다.

을사늑약의 자결 순국자 중에는 백성의 신망을 받은 고위급 인사들이 여러 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서 시종무관장 민영환과 원로대신 조병세는 백성들뿐 아니라 고종황제가 크게 의지하는 국가의 대들보와도 같은 인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05년 11월 30일 민영환의 자결 순국과 그 다음날 조병세의 자결 순국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추앙심과 추모열기를 이끌어낼 만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며칠에 걸쳐 신문의 사설과 잡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중 있게 보도된 이들의 자결 순국 소식과 이들이 남긴 유서 내용들은 곧바로 조선민중의 항일의식의 진작과 매국대신에 대한 처단활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처럼 민영환과 조병세의 순국은 다시 한국민의 항일의식 고취와 항일운동의 활성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을사늑약 후 대한제국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최후의 방안으로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결 순국의 방식을 택하였다. 이들이 택한 자결 순국은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강렬한 저항운동이었다. 이 자결 순국은 자기 일신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일견해서 가장 소극적인 형태의 항일운동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가장 강렬한 형태의 항일운동이었다. 이 자결 순국은 일본의 본격적인 대한침략이 시작된 1894년 갑오경장 이후부터 1910년 경술국치 이후까지 전통한국 지식인들의 가장 중요한 사유구조인 유교사상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전통한국의 유교전통과 밀착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을사늑약의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한 순국지사들

(1) 홍만식(洪萬植, 1842~190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시호는 충정(忠貞). 서울의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洪淳穆)의 아들이며 갑신개화파 홍영식(洪英植)의 친형으로, 어린 나이에 교관(敎官) 홍순경(洪淳敬)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 3월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린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홍문관·예문관·승정원의 여러 관직을 거쳤고, 이조참의와 평안도암행어사를 거쳤다. 여주목사 재임 시 선정을 베풀어 1884년 5월 차관급인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해 6월 부친 홍순목이 개화파의 의복제도 개혁에 반대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고 여주로 낙향하자 사직서를 제출했다.

홍만식 가족사진ⓒ유교넷
홍만식 가족사진ⓒ유교넷

1884년 10월 동생 홍영식이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실패하여 청군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이때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을 하였고, 그도 자살하려 했다가 부친의 권고에 따라 그만두었다. 이어 스스로 옥에 나아가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2월에 석방되었다.

1894년 6월 갑오경장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홍순목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그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5월 박영효 내부대신이 지방제도개혁을 추진할 때 춘천관찰사에 제수되어 여러 번 부임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그러나 “필생토록 자정(自靖)하라”는 임종 직전 부친의 유훈에 따라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 8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강상(綱常)과 예의가 땅에 떨어졌다”며 자결을 하려 했지만 곧이어 단발령이 철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1904년 4월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5월에 의정부 찬정(贊政)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또한 상소 때마다 직함을 쓰지 않고, ‘아직 죽지 않고 남아있는 신하’라는 의미의 ‘미사신(未死臣)’이란 세 자만을 써서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20년간 여주 시골집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이때 동생 홍영식이 역적으로 몰려 죽고 부친 홍순목이 자결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마의를 걸치고 짚자리에 앉아 죄인으로 자처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차에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에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이제 나라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음을 직감하니 죄 많은 몸이 부질없이 남은 목숨을 연장하여 오다가 오늘의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다. 이런 보지 못할 일을 차마 보고 산다는 것은 금수도 못할 일이다”며 순국으로 일생을 마감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관을 차려입고 부친의 묘소에 사별 인사를 드리고 다시 돌아와 사당에 인사를 드린 후 아들에게 독약을 타서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아들 성겸(性謙)과 조카 홍표(洪杓)가 울면서 약그릇을 엎어버리자 그들을 물러가라고 꾸짖으며 “내가 갑신년 이후로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차스럽게 목숨을 이어온 것은 지금까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부친의 원통함을 풀어드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희망조차 끊어졌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어찌 하루인들 천지간에 살 수 있겠느냐”며 아무 일 없는 듯이 단정히 앉아 약을 삼키고 순국하였다. 순국일은 1905년 11월 27일이었다.

홍만식의 순국은 민영환의 순국보다 하루 이상 빨랐으며, 고관을 지낸 인사의 순국으로서는 가장 이른 편에 속한다. 고종황제의 측근이자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유신파 민영환의 순국에 대해서는 언론이 며칠간 대서특필하여 추모하고 의기를 상찬하였다. 이에 반해 홍만식의 순국에 대해서는 기사가 드문 편이다. 이로 인해 20여 년간 은거생활을 해온 홍만식의 순국은 고관중 가장 먼저 결행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민간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다. 다만 홍만식의 순국기사를 민영환의 그것보다 앞선 시기에 배치한 『매천야록』은 당시 백성들이 “홍만식이 순국하자 그를 더욱 훌륭하게 여기며 슬퍼하였다”고 하였다.

홍만식의 순국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홍참판은 그 대대로 내려온 문벌로 말하면 한국의 귀족이요, 인품과 명망으로 말하면 한국의 명대부이다. 공은 화를 입은 집안의 남은 사람으로서 세상의 도의가 타락됨을 통탄하였다.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한 번도 명을 받들지 않고 자취를 어부와 나무꾼과 함께 하여 오던 중 이렇게 국사가 크게 그르쳐지는 날을 만나게 되었다. 여주 집에 있다가 변고의 소식을 듣고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개연히 목숨을 바쳤으니 그 마음과 뜻의 명백함이 어찌, 해 달과 함께 빛을 다툴 뿐이랴?”고 찬양하였다.

고종황제는 홍만식의 순국에 대해 “이 재신(宰臣)은 과묵한 성품과 신중하고 성실한 뜻을 지녔는데, 시국이 위태로워짐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통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비분강개하여 마침내 자살하였으니 매우 애통스럽다”는 조서를 내렸다. 아울러 장례비용을 궁내부로 하여금 넉넉하게 보내주도록 하고, 특별히 종1품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의 직함을 추증하라고 하였다. 또 예식원으로 하여금 정려(旌閭)를 내려주는 은전과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고, 생존시 행적을 기술한 시장(諡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바로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는 특별 혜택을 내려주고, 궁내부의 비서원승을 보내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홍만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이상철(李相哲, 1876~1905)

전라남도 영암군 출신으로 1876년에 이낙원(李樂源)의 아들로 태어나 1904년 9월 학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학부 주사로 재직 중이던 1905년 10월에 이근석(李根奭)이란 이름을 이상철로 개명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무력으로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이에 을사늑약 체결 후 13일이 지난 1905년 11월 30일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그리고 그 다음날 원로대신 조병세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이들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명망 있는 고관들이었는데, 을사늑약 반대 및 을사오적 처단상소를 올렸다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이상철은 을사늑약 이전부터 시사(時事)에 대해 비분강개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민영환과 조병세가 자결 순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들의 뒤를 이어 12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고종황제는 “학부 주사 이상철이 충의와 울분이 격발하여 강개한 심정에 목숨을 끊었다”며 그의 순국을 애도하였다. 이어 고종은 이상철의 뜻이 가엽고 그의 절개가 가상하니 관(棺) 제작용 목재를 내려주고, 특별히 학부(學部) 협판(協辦)에 추증토록 하고, 정문(旌門)을 세워주도록 하였다. 또한 예식원(禮式院)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며, 장례에 필요한 용품을 궁내부에서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고종은 이상철의 장례비로 무명과 베 각각 1동(同), 돈 400원, 쌀 10석을 특별히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상철이 순국할 당시 나이는 겨우 30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에게 노모가 있었다고 하나 남은 자손이 없어서 지금은 그의 출생과 이력에 대하여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상철 순국 후 그의 의형 한재경(韓在敬)이 제문을 지어 추도하였는데, 서울의 북서(北署) 관리들이 검시를 칭하고 한재경을 잡아다가 심문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이상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김봉학(金奉學, 1871~1905)

1871년 황해도 중북부에 위치한 황주군 청룡면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순실하고 강직하여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킬만한 곧은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황주군에서 신분이 낮은 처지였고 가세가 빈곤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평양으로 가서 군대에 들어가 평양진위대(平壤鎭衛隊) 제7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울로 올라가 평양진위대 소속 징상대(徵上隊)의 제3대대 2중대 3소대 상등병(上等兵)으로 복무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에 조정의 인사들은 연명으로 고종황제에게 을사늑약의 철회와 친일대신 처단을 촉구하는 항일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들이 별다른 소용이 없자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11월 30일에, 궁내부특진관 조병세가 12월 1일에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이들의 자결 순국은 당시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들을 따라서 자결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나왔다.

민영환과 조병세가 순국하자 김봉학은 의기가 북받치어 분개하여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집안에서 나라를 위한 충성심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바로 평소에 닦아 쌓은 교양입니다. 우리들도 역시 나라에서 양성하는 군인들입니다. 그동안 전공(戰功) 한 번 세우지 못했으니,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온 나라 사람들에게 힘쓰도록 격려하는 것도 바로 우리의 직분입니다”라고 하였다.

김봉학의 순절내용을 담은 일본경찰 보고서
김봉학의 순절내용을 담은 일본경찰 보고서

김봉학은 군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결 순국하기 이전에 먼저 일제의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 하였다.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驪隨筆)』에 의하면, 김봉학이 동지들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 궐문을 파수하고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조만간 반드시 궐문에 이를 것이니, 이때를 기다려 반드시 그를 죽이려 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이 누설되었고 김봉학은 체포를 면할 길이 없음을 알고 자결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봉학의 사인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다. 『기려수필』과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는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며,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입에 칼을 물고 높이 뛰어내려 엎어지자 칼이 등을 관통하여 죽었다고 하며, 이기(李沂)의 『해학유서(海鶴遺書)』는 차고 있던 전대에서 엄지손가락만한 아편을 꺼내 삼키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 김봉학이 을사늑약의 체결에 나름대로 항거하다가 자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5년 12월 4일 고종황제는 김봉학이 나라를 위한 근심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바쳐 절개를 세웠음을 기특하게 여겼다. 이에 조령을 내려 그를 법부 참서관(參書官)에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특전을 베풀게 하였다. 아울러 예식원 낭청(郎廳)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장사지내는 비용을 궁내부(宮內府)에서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김봉학의 장례비로 무명과 베 각각 30필, 돈 200원, 쌀 5석을 특별히 지급하도록 하였다.

12월 5일 오전 8시경 징상대 제3대대장 육군 참령 홍창걸(洪昌杰)과 제2중대장 육군 보병 정위 김면조(金冕朝)를 비롯하여 위관과 병사 80여 명이 김봉학 장례행렬을 따라갔다. 이들은 김봉학의 묘소 앞에서 제물을 차리고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으며 제사를 지냈다. 같은 날 정오에 고종황제가 보낸 예관이 도착하여 김봉학의 묘소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고종이 내린 제문은 아래와 같다.

나라의 일이 매우 위태로워지자 충성심에서 나오는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라 미처 다른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목숨을 바쳐 충절을 세웠습니다. 나라를 위한 대의는 해와 달과 빛을 다툽니다. 몸은 군대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위한 한결같은 마음은 크기만 했으며 가슴 속에 가득한 참된 마음은 만고(萬古)를 통틀어 없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대는 세상을 떠났으니 착하고 기특하다 하겠습니다. 무슨 말로 아름다운 덕을 기리겠습니까? 전례에 따라 정문을 세우고 예법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니 신이시여 강림하소서.

김봉학의 자결 순국 소식은 당시 신문에 보도되어 많은 이들을 감격하게 하고 분기하게 하였다. 1905년 12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병사가 순절하였다(兵士殉節)”는 제목하에 김봉학이 순국하여 많은 이들에게 충의를 부식하고 군대에 모범을 남겼다고 상찬하였다.

김봉학에 대한 군·관·민의 감격 어린 영결식은 다시 한번 도하의 민심을 격동시켰다. 그의 자결 순국에 깊이 감동되어 을사오적을 처단하거나 따라서 자진하는 의사들이 나왔다. 장례식 이튿날인 12월 6일 궐문의 파수병이 을사늑약 후에 외부대신에서 참정대신으로 승진한 박제순을 총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또 김봉학의 자결 순국에 자극받은 군인 윤두병(尹斗炳)이 자결하는 사건도 있었다.

1906년 봄 김봉학의 유해를 다시 고향으로 이장하였다. 운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운구를 맞이하고 또 성대하게 제물을 차리고 장례식을 올렸다. 이때 격렬하고 절실하게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김봉학이 자기 일신을 초개와 같이 버려 한국민의 애국심을 크게 신장시키는 위업을 이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김봉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4) 이건석(李建奭, 1852~190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경(漢卿) 혹은 한경(漢京), 호는 성석(醒石).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황암리에서 태어났다.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상영(李象榮)의 차남으로 7촌 숙부 이상일(李象一)의 양자로 들어갔다. 외아들 이응수(李應洙)가 태어난 1880년 10월 이후 어느 시점에 서울로 올라가 각도에서 상경한 유생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한 소청(疏廳)을 여러 차례 설립하여 반개화(反開化)·반일(反日) 상소운동을 기조로 하는 국권수호운동을 벌였다.

1896년 2월 고종은 일본세력과 친일개화파의 압력을 벗어나고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채광묵(蔡光默)·이상천(李相天) 등 상경 유생들과 함께 환어소청(還御疏廳)을 설립하고 국왕의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상소에서 경복궁점령과 명성황후시해사건 등 일본의 야만적인 한국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개화역적을 처단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1897년 2월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자 김현준(金顯峻)·김운락(金雲洛) 등 수십 명의 유생과 함께 복수소청(復讐疏廳)을 설립하여 활동했다. 이때 명성황후시해사건에 관련된 박영효(朴泳孝)·유길준(俞吉濬)·김윤식(金允植)·이승오(李承五)·안경수(安駉壽) 등 개화역적들을 잡아다 처단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워야 한다는 상소를 6차례나 올렸다. 4번째 상소를 올릴 때 상소의 우두머리인 소수(疏首)를 맡았다.

고종의 환궁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세력다툼이 깊어가는 가운데 각종 이권이 열강에 넘어가고 있었다. 1898년 2월 심의성(沈宜性) 등과 함께 건의소청(建議疏廳)을 통해 정부에 상서를 올렸다. 거기서 외국인 고문을 해임하고, 외국 군인과 상인을 돌려보내고, 외국인의 내지 유람을 단속하고, 외국인의 어채(漁採)에 상한을 두고, 흉년시 미곡 해외 유출을 금하고, 화폐에는 반드시 대한제국의 연호를 사용할 것 등을 요청했다. 이는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해야 할 여러 방안을 건의한 것이다.

1898년 6월에 존성소청(尊聖疏廳)에서, 7월 이후에는 송수만(宋秀晩)·김운락·심의승(沈宜承)등과 함께 도약소(都約所)에서 활동했다. 도약소에서 상소와 통문을 통해 중추원 의관을 관민에 반반씩 배정하자고 하는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적인 개혁론을 비판했다. 또 국외로 도주한 명성황후 시해역적들을 잡아다 처형할 것을 요청하고, 역적들을 잡아오지 않는 외부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한규설을 탄핵하였다. 1900년 1월 명성황후시해사건과 고종양위 음모사건에 관련된 안경수 등이 귀국하자 이들의 처단을 촉구하였다.

이건석 간찰
이건석 간찰

1902년 5월 김운락·이문화(李文和) 등과 함께 광의소청(廣議疏廳)을 설치했다. 이어 아관파천 당시 고종을 모신 순비(淳妃:엄상궁)를 황후로 승격시키려는 것을 저지하는 통문을 돌렸다. 통문에서 순비의 황후 승격은 명위와 기강을 그르치는 일이며, 해외의 역적들에게 빌미를 주는 일이라며 조속히 황후를 간택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일본이 경부철도를 부설하면서 시흥과 수원 사이에 있는 정조(正祖)의 효성심을 상징하는 지지대(遲遲臺)를 정차장으로 만들고 그 인근에 주민을 거주하게 하려는 조치에 대해서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책을 촉구하는 모임을 주도하였다.

1904년 2월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전쟁의 승리자가 누가 되든지 간에 그 피해는 대한제국이 모두 뒤집어쓸 것이라는 염려에서 자강의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연명상소를 올렸다. 1905년 7-9월 일본은 서양 열강들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배타적 특수권익을 차례로 인정받은 후 한국보호국화정책의 박차를 가해 나갔다. 이때 김동필·이식 등 수십 명의 전·현직 관료 및 유생들과 함께 대한13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결성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항하였다.

을사늑약 이전인 1905년 10월경 대한13도유약소의 임원인 김동필·이식·이건석 등의 명의로 각 지방 향교에 통문을 보냈다. 여기서 김동필 등은 일본 차관 300만원을 거절하고, 일본 산물을 무역하지 말고, 기차·기선·전신·전화 등을 사용하지 말고, 외국 교인과 상인의 내지 유람을 금지할 것 등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아울러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침탈을 위해 여러 나라와 맺은 조약문 중 문제시되는 조항들을 사실대로 적시하며 비판했다.

을사늑약 직전 이토 히로부미가 입경하자 서울 장안에 곧이어 보호조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승지 이석종(李奭鍾) 등과 함께 이토에게 2차례 항의서한을 보내 보호조약 논의의 중지를 요구했다. 또한 을사늑약 직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고 일본의 힘에 의지해 국권을 보호받자고 주장한 일진회(一進會)의 선언서를 매국행위라고 질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건석 등은 을사늑약 직전 고종황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고종은 경무관을 파견하여 상소책임자만 남고 모두 돌아가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이들은 경운궁 대안문앞에 엎드려 일본과 조약을 체결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려 하였다. 결국 이들의 상소문은 일본군의 방해로 비서원을 통해 고종에게 전달되지도 못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11월 16일 이석종·이건석을 비롯한 상소의 주모자 13인을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이건석은 일본군사령부에 체포된 후 엄한 심문을 받았다. 당시 그는 일본군사령부로부터 상소를 중지하고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거사를 포기하면 곧바로 석방시켜 주겠다는 회유성 제안을 받았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군사령부는 죄가 없는 이건석을 6개월간이나 감금하였다. 유생들이 연명으로 석방을 탄원했으나 이건석은 끝내 출옥하지 못하고 투옥생활을 하였다. 옥중에서 자주 피를 토하였고 거의 목숨이 끊어질 듯하다가 소생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1906년 5월 10일 옥중에서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엄밀히 말해 이건석이 옥중에서 순국한 것은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한 것이지 자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보호조약 반대운동을 벌이지 않으면 즉각 풀어주겠다는 일본군사령부의 회유를 마다하고 옥중에서 자진하여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그의 옥중 순국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 자원한 결과였던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건석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많은 인사들과 같은 방식의 구국운동을 벌였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석이 아들 이응수에게 전하는 유서에는 “오호라. 죽는구나. 죽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마는 제대로 죽는 일이 어려운 법이라.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매국역적들을 죽이지 못하고 우리 국권(國權)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대한매일신보』, 「李建奭氏의 遺書戒子」, 1905년 5월 16일자)”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매국역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위해 고심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의 유해는 이건석의 옥바라지를 담당한 별실 천씨(千氏)가 거두어 염을 마친 다음 관에 넣어서 고향으로 보냈다.

이건석은 1901년 5월 18일 내부 주사 판임관 6등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간 여러 소청(疏廳)에 가담하여 “친일역적들을 처단하고 명성황후 시해를 복수하자”는 토역복수(討逆復讎) 상소운동에 종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어 1904년 2월 이준직(李駿稙) 등 8명과 함께 9품에 해당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 감조관(監造官)에 임명되었다. 이어 같은해 8월 11일에 9품 종사랑(從仕郎)에서 6품 승훈랑(承訓郎)으로 품계가 올랐다.

1963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영동군의 황간역 앞에 ‘대한의사이건석선생기념비’가 세워졌다. 1987년 5월 1일 황간면 연화리에 있는 묘소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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