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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윤경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0년

주요공적

조선어연구회 창립위원 등 역임, 국어‧국문 연구에 전력

1931년부터 전국 순회 한글 강습회에서 한글 교육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김윤경 / 장지영 / 권덕규

김윤경 , 1894 ~1969 , 애국장 (1990) 장지영 , 1887 ~1976 , 애국장 (1990) 권덕규 , 1891 ~1950 , 애국장 (2019)

1. 문맹퇴치운동 및 국어연구에 매진한 학자 : 장지영

열운(冽雲) 장지영(張志暎)은 일제강점기 한글연구와 민족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한글학자이다. 1887년 서울에서 장은상(張殷相)의 차남으로 태어나 5세부터 기숙사에서 한문을 배워 17세가 된 1903년에 관립한성외국어학교(官立漢城外國語學校) 한어과(漢語科)에 입학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긴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경험했다. 이때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자결순국 소식은 19세였던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충정공이 돌아가시자 조정과 백성들이 발칵 뒤집혀져 야단을 하였다. 그의 장례는 시민장이나 다름없이 모든 시민들에 의하여 지내졌다. (중략) 충정공의 충성심과 우리나라 장래의 운명, 우리 국민의 위기, 충정공의 장한 절개를 엮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런데 그 곡조가 얼마나 비통한지 상여를 모시고 가던 사람 모두가 통곡을 하였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속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권을 잃는 비극을 절감하고 조국독립과 민족에 헌신하는 민족운동가로 살아갔다. 무너진 나라를 지키기 위한 한글연구에서부터 조선일보 기자 활동과 문맹퇴치운동, 신간회 참여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05년 6월 학교 졸업 후 모교의 부교관으로 임명되어 2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8년 부교관직을 사임하고 7월부터 서울 남창동 주시경(周時經)을 찾아가 3년간 한글문법을 배웠다. 한글의 민족적 가치를 높인 선각자 주시경과의 만남은 삶의 큰 이정표가 되었다.

같은 시기 서울 남창동 야간 전문학교 정리사(精理舍)에서 3년간 수학하고 1910년 3월 북간도로 건너가 약 1년간 김약연(金躍淵)이 설립한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1911년부터 평안북도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오산학교는 애국지사 이승훈(李昇薰)이 한일합방 직후 대중을 계몽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설립한 사립학교였다. 그는 국어와 수학 교사로서 민족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하지만 일제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벌인 ‘105인 사건’의 여파로 부득이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1912년부터 상동교회(尙洞敎會)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교사 겸 학감으로 재임했다. 상동교회와의 만남과 상동청년학원 활동은 장지영의 삶에 큰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당시 상동교회는 지식인과 민족운동가들이 모인 계몽운동의 산실이였다. 전덕기(全德基)·이상재(李商在)·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 등 후일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민족운동가 탄생의 요람이었다.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와도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장지영은 이곳에서 국어를 강의하면서 숭고한 기독교 신앙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길렀다.

1912년 휘문학교 교장 임경재(任璟宰)와 청년운동가 유진태(兪鎭泰), 그리고 직조공장을 경영하는 김덕창(金德昌)과 함께 민족경제 자립을 위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를 조직하였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가 전개한 자급자족 운동을 본 받아 검정색 무명 두루마기를 스스로 만들어 입는 운동이었다.

더불어 만주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청년 비밀결사인 흰얼모(白英社)를 조직하여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다. 해외로 망명한 여준(呂準)·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 항일 지도자들과 비밀연락을 취했고, 1919년 3.1운동 당시 조규수(趙奎秀)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 2,000매를 살포하였다.

한편 무단통치를 벌이던 일제는 1914년 상동청년학원을 강제로 폐교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동년 7월 27일 평생의 스승이자 동지인 주시경이 38세의 나이에 사망하는 시련이 닥쳤다. 주시경이 선도하던 한글연구와 교육 사업을 장지영을 비롯한 제자들이 계승하였다.

배재학교와 경신학교에서 국어와 수학을 가르친 장지영은 나아가 다른 학자들과 함께 주시경의 이념을 계승하고 한글을 체계화하기 위한 학술활동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1921년 12월 임경재·이규방(李奎昉)·권덕규(權悳奎)·신명균(申明均)·김윤경(金允經) 등과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조선어연구회는 1909년에 주시경이 조직한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演究)學會)를 계승한 한글 연구 단체이다.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法理) 연구를 목적으로 한글연구와 표준어 확립, 사전 발간 사업을 주도했다. 또한 총독부의 일방적인 맞춤법 규정에 대응하여 한국어의 특징에 부합하는 맞춤법을 마련하는 등 한국어와 한국문화 보호에 힘썼다. 이에『동광(東光)』·『진생(眞生)』·『신생(新生)』등의 잡지가 조선어연구회의 맞춤법을 채택하며 호응하였다. 1927년 2월에는 최초의 국어 전문잡지인『한글』이 창간되었다.

장지영은 조선어연구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4년 2월 훈민정음 창제 기념회에서 스승 주시경을 주제로 한 강연을 시작으로 한글문법 정리와 한글 교육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1930년 1월 제10회 정치총회에서 연구회 간사장으로 이극로(李克魯), 간사로 장지영과 최현배(崔鉉培)가 선임되면서 연구회 운영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이후에도 장지영은 1931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개편, 조선총독부 철자법 조사회에 대한 건의서 제출 등을 주도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글 장악을 위해 1912년 4월 철자법을 제정하고 개정을 거듭했다. 이에 장지영을 비롯한 조선연구회 회원들은 주시경설에 기반을 둔 받침 사용이 자유로운 철자법 사용을 계속해서 건의했다. 그 결과 1930년 4월 받침 활용이 강화된 형태주의 표기법이 제정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30년 12월 제10회 정기총회에서 독자적인 철자법 제정을 결의하여 장지영·김윤경·권덕규·신명균 등이 중심이 되어 맞춤법 안을 작성했다. 장지영 등이 수정위원으로 선임되어 맞춤법 안을 거듭 연구한 결과 1933년 10월 「한글맞춤법통일안」이 공표되었다. 한글 맞춤법 확립을 위한 그의 열정은 1924년 5월 한글 문법서인『조선어전(朝鮮語典)』을 간행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한글학자들의 노력으로 주시경이 첫발을 내딛었던 국어사전 간행에 대한 민족적 열망도 점점 커졌다. 그리하여 1929년 10월 31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각계 인사 108명의 발기로「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고 다음과 같은 성명이 발표되었다.

인류의 행복은 문화의 향상을 따라 증진되는 것이요, 문화의 발전은 언어 및 문자의 합리적 정리와 통일로 말미암아 촉성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어문의 정리와 통일은 제반 문화의 기초를 이루며, 또 인류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본회는 인물을 전 민족적으로 망라하고, 과거 선배의 업적을 계승하며 혹은 동인의 사업을 이어받기도 하여, 엄정한 과학적 방법으로 언어와 문자를 통일하여서 민족적으로 권위있는 사전을 편성하기로 기약하는 바인즉, 모름지기 강호의 동지들은 민족적 백년대계(百年大計)에 협조함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각계각층이 참여한 사전편찬회는 한글을 문화의 기초이자 인류 행복의 원천으로 규정하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기에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한글사전 편찬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장지영은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한글사전 편찬에 기여했다. 1930년에『조선어 철자법 강좌』를 간행하고 1935년 1월부터 시작된 표준어 사정에 참여하여 2년간 약 1만개의 어휘를 정립했다. 그러한 노력 끝에 1942년 봄『조선어대사전』이 발행되었다. 이는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이 가속화 되던 시기에 민족 고유의 언어를 체계화한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나아가 한국인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지켜낸 학술적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연구뿐 아니라 언론과 사회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조선일보 부사장 신석우(申錫雨)와의 인연을 계기로 1926년 조선일보(朝鮮日報) 견습기자가 되었다. 지방부장과 문화부장, 편집인을 역임하며 다양한 성과를 남겼다. 특히 1928년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文盲退治運動)을 주관하여 지역과 농촌에 학생들을 파견하는 계몽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그는 문맹퇴치운동의 계획과 학생동원, 지도와 교재 준비에 이르는 전반을 주관하고, 지역별 강연과 강습소 개설에 힘썼다. 그와 관련하여 조선일보 1929년 1월 1일자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한글사용을 강조했다.

말과 글은 우리 종족이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말이며 글인즉 여기에는 파(派)도 없고 벌(閥)도 없다. 오직 바른길이 있을 뿐이다. 누구든지 바른길을 찾아 나아간다면 그들조차 더욱 힘 있게 붙들고 나가는 것이 우리의 일일 것이다. 우리 힘이 약하고 아무 도움이 없더라도 오랜 시일에 여러 사람들의 힘을 적게나마 쌓아 놓은지라 그래도 차차 정리(整理)의 길을 밟아 가려하는 눈치가 보이는 오늘에 있어서 이를 도와 한 길로 몰아가면 그 힘이 얼마나 더 들지 않고 바른길을 찾을 날이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1927년에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결실인 신간회(新幹會) 조직에 참여하여 조사부 간사에 선임되었다. 각 지역의 사정과 사회소식 조사 업무를 담당했다. 조선일보에 신간회외 근우회(槿友會)소식을 알리는 고정란을 만들어 상호 소통을 원할하게 한 점도 주목된다.

1931년 45세에 기자직에서 물러난 그는 양정고등보통학교(養正高等普通學校)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제자들은 그를 국어와 역사, 수학과 의학에 걸친 박학다식한 지식인이면서도 근엄하고 말수가 적었던 스승으로 회고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어가 무자비하게 강요되던 때에 선생님이 직접 제작한 국어교재로 한글을 배운 점이 인상 깊게 남았다. 장지영은 본인이 발간한『조선어전(朝鮮語典)』을 활용하여 만든 교재를 비롯하여 7종이 넘는 교과서를 제작하여 한글을 가르쳤다.

조선어사전표준말 모음(1936.10.28)
조선어사전표준말 모음(1936.10.28)

한편 조선총독부는 조선어학회의 성장과 한글연구 발전이 식민통치와 전시체제 확립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장지영은 이극로·이윤재·최현배 등의 동료들과 더불어 부지불식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모진 고문과 취조 끝에 1944년 10월 예심면소로 석방되었으나 후유증인 신경통으로 평생을 고생해야 했다. 게다가 불온사범으로 간주된 탓에 안정적인 주거와 직업을 얻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광복 전까지 아들이 자취하던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중계리(中溪里)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지냈다.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이 도래했고 이극로·최현배 등 한글연구 동지들도 출옥하여 한글사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독립된 조국의 국어(國語)인 한글 체계의 확립이라는 무거운 소임이 한글학자들에게 주어졌다. 가장 먼저 한자 폐지 및 한글 전용이 추진되었다. 동년 9월 장지영 등 30여명의 발의로 한자폐지실행회 발기준비회가 결성되었고, 이는 향후 한글전용 촉진회 조직으로 이어졌다.

1945년 10월 최현배가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이 된 것을 계기로 장지영이 문교부 부국장으로 임명되어 잠시 공직생활을 이어갔다. 1946년 2월이 되자 조선어학회는 효율적인 사업 운영을 위해 3년 임기의 이사제로 회칙을 개정했다. 그리고 장지영이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더욱 적극적인 확장을 보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조선말 큰 사전』1·2권 발간도 이 때 이루어졌다.『국어입문』(1946.6),『가려뽑은 옛글』(1948.8) 등 장지영 개인 저술도 이어졌다.

1948년 8월 남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문교부 공직을 사임하고 9월 현재 연세대학교인 연희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아들인 한양대학교 장세경(張世憼) 교수는 이를 가장 안정적인 시기로 회고했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대우, 조선어학회 부설 세종중등교사양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세종중등교사양성소는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가 전개한 국어강습회의 후속사업으로 설치된 2년제 사범대학이다. 해방 직후 국어 교육의 공백을 메울 신속한 국어교사 양성이 목적이었다. 이처럼 독립된 조국에서 그의 한글 연구와 보급운동은 더욱 확대되었고, 미래의 한글 교육을 담당할 국어교사 양성에도 앞장섰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제주도로 잠시 피난했던 그는 1952년 연세대학교에 복직하였다. 1958년 3월에 70세가 되어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으나, 1961년까지 대학원에서 계속 강의하였다. 국가에선 그의 교육문화 분야 공적을 인정해 대통령 공로표창(1958), 문화훈장(1962)을 수여했으며, 1964년 연세대학교에서도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1976년 3월 15일 오전 9시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90세를 일기로 영면하여 3월 17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7년 일제강점기 그의 항일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국장이 최종 추서되었다.

2. 조선어학회 사건등의 역경속에도 연구를 놓지 않은 학자 : 김윤경

한결 김윤경(金允經)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오포면(五浦面) 고잠리(高岑里)에서 경주 김씨 김정민(金正民)과 박락휼(朴樂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을 휩쓸던 시기에 태어난 김윤경의 삶은 한국근현대사의 격변과 맞닿아 있다. 다섯 살부터 열다섯 살 까지 10년간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904년 아버지의 기독교 입교를 시작으로 가족 전체가 기독교를 믿게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기독교적 가풍(家風)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부드러운 성품과 진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이어졌다.

1907년 14세의 나이로 용인군 모현면의 백애열(白愛㤠)과 결혼하고 다음해인 1908년 4월에 서울로 유학하였다. 처음에는 경성 서부에 위치한 사립우산학교(私立牛山學校)에 재학했고, 동년 12월 의법학교(懿法學校)로 전학하였다. 1909년 16세 때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동년 7월 9일 의법학교를 졸업했다. 9월 1일 의법학교 고등과 1학년에 입학하여 1910년 17세의 나이로 수료했다. 이때 한일병합(韓日倂合)이라는 역사적 시련이 닥쳤다.

이후 1911년 1월 서울 남부 상동(尙洞)의 사립청년학원(私立靑年學院)에 입학하여 평생의 은사인 주시경(周時經) 선생으로부터 한글을 배웠다. 이때 외국에서도 한국의 우수성이 중시된다는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한글에 대한 편견과 통념이 완전히 바꾸었다. 국어 연구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도 이 시기였다. 국권이 피탈되는 역사적 시련 속에서 발흥된 민족적 열기와 애국교육은 그의 민족의식 각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3년 봄에 청년학원을 졸업한 후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 교사로 4년간 재직하면서 국어·역사·수학을 강의했다. 이때 초기 학술연구 성과로서 ‘조선어 연구의 기초’ 논문을 탈고 했다. 1917년 4월 그는 현재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는 그의 모교이자 연구 공간, 민족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2학년이 된 1919년 거국적인 항일투쟁인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일본경찰을 피해 1년간 시골에 피신했다.

3.1운동의 격변 속에 연희학교를 5년 만에 졸업하는 와중에도 본격적으로 한글연구에 매진했다. 1921년 12월 3일 최두선(崔斗善)‧장지영(張志瑛)‧권덕규(權悳奎)‧이병기(李秉岐) 등 서울의 연구자 동지들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창립하였다. 이는 오늘날 한글학회의 모태로 일제강점기 한글 체계 확립과 교육, 민족정신 함양을 도맡은 한글연구와 보급의 중추(中樞)였다. 이러한 연구 활동 끝에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1922년 1월「우리말과 글의 예와 이제를 보아 바로 잡을 것을 말함」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탈고했다. 2월에는 안창호(安昌鎬)가 조직한 민족단체인 수양동맹회(수양동우회)에 참여하였다.

1922년 3월 24일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김윤경은 1922∼26년 4년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培花女子高等普通學校) 에서 국어와 역사를 강의했다. 1926년이 되자 일본으로 유학하여 4월 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2년간의 연구 끝에 1928년 9월 17일 졸업논문「조선 문자의 역사적 고찰」을 집필했다. 36세가 되던 해인 1929년에 릿쿄대학 사학과 동양사 전공을 졸업한 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같은 시기 조선어연구회에서 추진하던『조선어사전』편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조선어사전 편찬은 그동안 이어져온 한글연구 결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컸다. 게다가 민족말살정책이 가속화되던 일제강점기에 민족 고유의 정신을 수호하는 민족사적 공헌 깊은 사업이었다. 개인 연구방면에서는 1934년부터 릿쿄대학 졸업논문을 기초로『조선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집필을 시작했다.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한 한글사업 분야에서 김윤경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0년에는〈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개편된 후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같은 한글 맞춤법 통일과 표준말 사정, 소리 체계 확립 등은 한국어 사전 편찬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해당했다. 김윤경은 이들 전반에 관여하여 국어체계 확립을 통한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동시에 보급이 미비했던 한글 교육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31년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지원으로 권덕규 등과 전국을 순회하여 한글을 강습했다. 수많은 청년 대중에게 국어지식을 교육하여 한글에 대한 관심과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1934년 5월에는 한국사와 한국어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 말과 역사를 연구하는 국학운동에 매진했다.

이렇듯 활발한 교육과 연구 활동을 벌이던 김윤경은 1937년 이른바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큰 고난을 겪었다. 파시즘 체체에 박차를 가하던 일제가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 등 개인수양적 성격이 강한 단체까지 불온(不穩) 단체로 탄압한 것이다. 국내에 광범위한 회원을 지녔던 수양동우회 회원 181명이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중 31명이 기소되었다가 1941년 11월에 이르러 모두 석방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수양동우회에 가입했던 김윤경 역시 체포되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1심부터 3심에 걸친 재판 기간 동안 실직(失職) 하고, 풀려난 뒤에도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멀게 된 가혹한 시련을 맞았다.

1938년 수감 중에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조선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가 발간되었다. 한글 연구 권위서로 평가받는 이 책은 크게 제1편(소론)과 제2편(본론)으로 구성되었다. 본론에서는 몽고글자 기원설, 설총 창작설, 형상 기원설 등 ‘훈민정음’의 여러 가지 기원을 제시했다. 김윤경은 그 중에서도 고대문자를 한글의 기원으로 규정했다. 나아가 세종대왕 시기 한글 반포 이후의 글자 변화 과정을 풀이했다.

이러한 한글 발전 과정의 계보 분석을 통해 글자의 독창성이 보다 분명하게 설명되고 향후 한글연구의 기준이 제시되었다. 더불어 후학들이 한글의 독창성을 자각하고 고유의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는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어학’ 중에서도 ‘어학사’에 집중한 그의 연구는 한글과 한국인의 기원을 찾는다는 점에서 독립정신과도 맥을 같이했다. 1941년 10월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그는 1942년 4월부터 성신가정여학교(誠信家政女學校) 교사로 취임하였다.

성신가정여학교에 출강하던 시기에 김윤경은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게된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연구자들로 구성된 한글 연구기관이자 학술단체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보다 강력한 전시동원과 대중수탈을 위한 민족말살 통치 차원에서 조선어학회를 해산시켜 한글연구의 뿌리를 뽑고자 했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어를 국어로 규정하여 강요했고 1911년「보통학교 규칙」에서 주간 10시간 이상 일본어 교육을 강요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선동조(日鮮同祖)를 구호로 한국인이 일본인과 동일하다고 교육하는 등 한국인의 민족성 말살을 지속했던 것이다.

더욱이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로 전환된 일제는 한글 연구의 지속과 성장 자체를 와해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을 일으켜 김윤경을 비롯한 장지영‧권덕규‧이병기 등 수 많은 한글학자들을 체포했다.

조선어학회 회원 이윤재(李允宰)가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김두봉(金枓奉)을 만나고 온 것을 구실 삼아 한글 연구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체포와 고문, 취조를 벌였다. 김윤경도 1년간 가혹한 옥고를 견딘 끝에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수감시기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은 그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한일합방 전후에는 수많은 역사적 질곡이 존재했다. 김윤경은 이 역사 한복판에서 피신과 고문, 수감을 연이어 겪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한글연구 집념과 진리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었다. 일본 경찰을 피해 피신하고 옥중에서 연구저서 발간을 접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호 ‘한결’처럼 한글연구와 민족운동을 지속했다.

인생의 목적은 신(진리의 주체)의 완전함 같이 완전해짐입니다. 필자(김윤경)은 맨 처음에 말하기를 “종교는 인생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생활을 이름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생의 목적은 신(神) 같이 완전하여짐이라 한즉, “종교는 다시 말하면 신(神)같이 완전해지려는 세력의 생활을 이름이라”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심이 깊었던 김윤경에게 진리의 추구는 신의 섭리를 따르는 행위이자 끝없이 나아갈 삶의 여정이었다. 진리를 위한 삶과 순종이 하나님을 섬기고 순정하는 것이며, 진리 추구를 위한 의지 역시 결코 꺾이지 않는 신념이었다. 이러한 진리 내지는 신과 같은 완전함을 위한 지식과 인격을 기르는 교육관도 굳건했다.

민족이 일어나고 쓰러짐과 굳세고 여림은 그 민족이 가진 문화의 높고 낮음에 정비례하고, 문화의 높고 낮음은 그 민족의 문자가 있고 없음과 좋고 좋지 않음에 정비례한다. 그리하여, 문자와 문화와 민족은 서로 연쇄적 관계를 가지고 운명을 같이 한다. (중략) 문화의 발전에 있어서는 그 민족의 타고난 재주와 기후와 천산물과의 관계가 크지만, 이 조건들이 같더라도 문자를 가지고 못 가짐과 좋고 좋지 않음은 더욱 관계가 크다.

그는 교직 기간 동안 사소한 부정과 강의 결석에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스승으로 알려졌다. 1950년 대학생 면접 당시에는 학생의 ‘소 십여두’ 발언을 ‘소 열 마리’로 그 자리에서 교정한 일화가 있다. 평소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면서도 학술적 평가에 엄격한 그의 태도는 진리 추구와 굳센 기개가 되어 삶에 투영되었다. 역사의 격동기에 두 번에 걸친 수감 속에서도 일제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그의 삶 자체가 진리추구의 여정이었다. 그 결과 한글학을 끝내 지켜내어 한국인의 말과 고유한 정신이 보존될 수 있었다.

해방이후 김윤경은 활발한 활동을 하며 한글 보급과 연구에 매진했다. 1945년 8월 조선어학회 상무이사가 되었고 국어부흥강습회(國語復興講習會) 강사로 강의했다. 동년 10월에는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교수, 11월에는 문과대 학장을 역임했다. 1947년 9월부터 48년 9월까지 1년간 연희전문학교 총창 대리로 임명되어 모교 연세대학교를 운영하고 민족교육 사업에 주력하였다.

1948년 55세가 된 김윤경은 국어문법서인『나라말본』과『중등말본』을 출판했다. 이는 1910년에 주시경 선생이 출판한『국어문법』을 계승했다. 그는 1925년『조선말본』을 편찬한 이래 1957년 해방 이후까지 총 7권의 문법서를 발간했다. 한글 말본, 즉 문법은 말의 형태와 특징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점이 그의 일관된 문법관이었다. 한글 문법 역시 한글의 고유한 특징에 맞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한글의 독창성과 민족성에 주목한 견해로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온 민족관이 드러난다.

1952년 2월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55년 7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어 국가의 지성으로 인정받았다. 4월 22일에는 “우리나라 글자 및 말의 역사적 변천을 밝히며 말본갈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나라 학술과 문화 발전에 공헌”한 공적을 인정받아 연세대학교 대학원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60년 67세에 학술원 회원으로 다시 피선되었고 1962년 69세의 나이로 연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1963년부터는 한양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했고, 1963년 8월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이처럼 국내 학술계와 교단에서 활약하던 김윤경은 1969년 2월 3일 울산 공업단지 교수 시찰 중 심장병으로 쓰러져 76세의 나이로 부산 제일병원에서 영면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2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광지원리에 안장되었다.

조선어학회사건 수난동지회 기념사진(1949.6.12)ⓒ독립기념관
조선어학회사건 수난동지회 기념사진(1949.6.12)ⓒ독립기념관

그로부터 8년 뒤인 1977년 국어 수호와 민족의식 고취의 공적을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국장이 최종 추서되었다. 김윤경의 모교이자 연구터전인 연세대학교에서는 전집『한결 김윤경전집』발간을 비롯한 추모행사와 기념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3. 가로쓰기 운동을 통해 한글보급운동을 한 학자 : 권덕규

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는 1891년 8월 7일 현재의 김포인 통진군(通津郡) 하성면(霞城面) 석탄리(石灘里)에서 안동권씨 권인수(權寅壽)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안동권씨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지는 명문 양반 가문이므로 그 역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삶은 20세가 된 1910년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 입학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조선의 주권이 침탈되던 시기, 한글운동의 최고 권위자로 휘문의숙에 출강하던 주시경(周時經)을 만나 사제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권덕규는 일찍부터 한글연구에 입문하였다. 더불어 한국 고유의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사업에 관여하였다.

이곳에서 김두봉(金枓奉)·이규영(李奎榮)과 함께 주시경을 도와 최초의 한글 사전『말모이』편찬에 참여하였다. 권덕규는 오직 한글 보존의 일념으로 추진된『말모이』편찬을 1914년 주시경 사망 이후에도 이어갔다. 이는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족과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시련, 그리고 1947년 국어사전인『조선말 큰사전』간행을 향한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1913년 휘문의숙 4년 과정을 졸업한 권덕규는 조선광문회 사업에 매진하는 동시에 주시경이 설립한 한글교육 기관인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 입학하였다. ‘한글모’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기관에서 후일 한글운동의 중심이 되는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권덕규는 1912년에 중등과를, 1913년에 고등과를 각각 1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곧바로 강습원 중·고등과의 교사가 되어 한글을 교육했다.

1916년 4월에 한국어 학회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에 합류하여 김두봉·이규영·장지영(張志暎) 등 동료들과 함께 의사원(議事員)에 선임되었다. 이때 조선광문회 운영을 주도한 국학자 최남선(崔南善)과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유근(柳瑾)을 만났다. 이를 통해 국학(國學)의 양 기둥인 한글과 한국사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후일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 입교와도 연결되었다.

권덕규는 29세가 된 1919년 9월에 평산(平山)이 본관인 신현순(申鉉順)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한글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활발한 언론·출판·교육활동을 벌였다. 초기에 그의 이름을 알린 본격적인 계기는《매일신보》와 《동아일보》지면에 투고한 한글연구 개론과 유학(儒學) 비판 논설이다.

먼저 1919년 12월 24일부터 1920년 1월 7일까지 8회에 걸쳐《매일신보》연재한「조선어문(朝鮮語文)에 취(就)하야」라는 논설로 한글연구 이론을 강의했다. 본 논설에서 권덕규는 본인이 정립한 이론 체계를 분야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시작은 국어사(國語史) 정리로 표음문자인 국어의 가치와 언어적 우수성을 평가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 이전부터 한국인만의 고유한 문자가 존재했다고 주장하였다. 중국과 구별되는 한국만의 고유한 문자체계와 어원이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 정비되었다는 견해였다. 현재 한글 사용의 단점을 논하면서 ‘종횡간(縱橫間) 서법(書法)’ 즉 가로쓰기의 도입을 주장한 것도 특징적이다. 이는 스승 주시경의 주요 주장을 계승하고, 대중에게 보다 편리한 글쓰기 방식을 제안하는 실용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다음으로 1920년 5월 8일자 동아일보에「가명인두상(假明人頭上)에 일봉(一棒)」이라는 제목으로 도전적인 논설을 실었다. 여기서는 중국을 추앙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은 유학자들을 ‘가명인(假明人)’으로 통칭하며 비판했다. 한국의 문화가 유림의 사대주의(事大主義)적 경향으로 인해 쇠퇴했다는 비판이었다. 권덕규의 사상과 학술 견해는 분명한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민족주의 성향을 지녔다. 한민족이 지닌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중시하고, 그 계승과 발전을 시대적 과업으로 인식했다.

1921년 8월 27일 동아일보사 주최 강연회에서「조선역사(朝鮮歷史)와 백두산(白頭山)」을 강연한 이래, 전국 명승고적(名勝古跡)을 답사한 답사기를 여럿 남기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24‧1926년에 한국사 통사(通史)인『조선유기(朝鮮留記)』상하(上‧下)권을 저술하였다. 이는 현실적이고 다원화된 문화현상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상정하는 ‘문화사학(文化史學)’ 사관이 담겨 있었다.

같은 시기에 권덕규의 한글연구와 학문적 성과, 한글 보급운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20년 4월부터 1924년까지 모교인 휘문학교의 조선어 촉탁과 교사로 근무한 점이 큰 이점이 되었다. 그는 한글 연구의 요람인 휘문에서 1921년에 조직된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의 간사로 선임되었다. 이로써 동료 학자인 최두선(崔斗善)‧장지영‧이승규(李昇圭) 등과 함께 한글 연구와 보급을 지속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08년 8월에 주시경을 중심으로 조직된 최초의 한글 학회인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를 계승했다. 나아가 후일 조선어사전편찬을 주도하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한글운동의 명맥을 잇는 학회였다. 학회는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法理)를 연구함’을 규약으로 밝히고 과학적인 국어연구 방식 추구를 표방했다. 아울러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언어가 실로 모든 문화운동의 근본 조건이 되며 기초요건이 되는 것은 물론이라. 그런즉 이 기초적 조건이 되는 조선의 문법과 언어가 불안전하고서 그 무슨 완전한 시와 소설이 만들어지며 완전한 도덕과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발달 하겠는가. 그럼으로 우리는 조선인의 문화발달은 그 문법과 언어의 발전에 기초하야 이에 비로서 그 결과를 가히 기다릴 것이라 하노라

위 취지에서 조선어연구회는 언어의 위상을 학술적 어학 연구와 실용적 언어 사용 수준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언어를 도덕과 종교, 정치 발달을 촉진하는 문화운동의 근본 조건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동일하게 한글 문법과 한국어의 발전을 한국인 문화 발전의 기초로 여겼다. 이는 한글운동의 파급력을 한국 문화운동과 자주성 보존 전반으로 확대한 시각이다.

실제로 조선어연구회의 영향력은 학계와 사회 전반으로 파급되었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11월 4일에 조선어연구회가 중심이 된 한글반포 기념식이 오늘날 한글날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동광(東光》을 비롯한 당시의 여러 잡지가 조선어연구회가 주장한 맞춤법 표기를 채택하였다. 1927년에는 권덕규 등의 주도로 최초의 한글 전문 잡지를 표방한《한글》이 발간되었다.

1923년에는 권덕규의 한글연구 이론이 집약된『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가 발간되었다. 이 저서에 권덕규의 한글 이론과 어원(語原) 연구 성과가 집대성되었다. 이는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탄압받던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한국어 이론서이자 교과서로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권덕규가 음운학‧구조학 연구 흐름과 구별되는 어원(語源) 연구에 집중한 점이 특별하다.

저서에서는 크게 고어‧궁중어‧알타이계 어휘 비교와 어원 탐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과거 문헌을 참고하여 대조한 것으로 고문헌을 고증한 권덕규의 국어연구 경향을 보여준다. 더불어 한글의 어원탐구를 통해 한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사상을 추적하는 강렬한 민족의식의 표현이기도 했다.

1924년에 휘문학교 교사 생활을 마감한 권덕규는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의 조선어 교사로 근무했다. 1927년에는 중앙고보의 교지《계우(桂友)》발간을 주관하였고, 7년간 중앙고보 동창회의 학예부장직을 담당했다. 1931년에는 다시 언론계로 자리를 옮겨 4월 20일 교사직을 사임하고《조선일보》촉탁으로 입사하였다.

권덕규는 교사 근무 기간 동안 한글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6년에는 한글학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맞춤법 확립 운동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정음회(正音會)를 조직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였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 1931년부터 1934년까지 3년간 조선어학회와 동아일보사가 주관하는 하기(夏期)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 참여했다. 국어체계화 추진과 문자보급이 목적이었다. 영남 지방부터 북쪽 관서‧관북 지방에 이르는 전국을 오가며 조선어 강습과 대중강연, 한글 관련 좌담회 연사로 활동했다. 북선(北鮮) 지역인 황주(黃州)‧진남포(鎭南浦)‧평양(平壤)‧철원(鐵原)‧원산(元山)‧함흥(咸興) 지방 전담 순회 강연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적에 힘입어 권덕규는 1930년 동아일보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한 특집 기사에서 ‘조선어문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공적을 평가하였다.

일찍이 경성 휘문의숙을 졸업하신 후 주시경씨 때 조선어 연구회에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에 광문회에서 “말모이(사전)”을 편집한 것을 비롯하여 경향 각지에서 개최되는 한글강습회에 강사로 초빙을 받은 일이 많았음으로 각 지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휘문고보와 중앙고보(中央高普)에서 십여년동안 한글과목을 담임하여 지금까지에 이르는 동안 꾸준한 연구가 있었으며 현재는 조선어연구회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에도 권덕규가 1920~30년대에 걸쳐 꾸준히 한글운동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후에도 언론계에 칼럼을 꾸준히 투고하며 한글학과 역사, 수필에 걸친 다양한 문필 활동을 이어갔다.

권덕규는 한글보급운동을 활발히 했지만 한글맞춤법 제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총독부는 1907년 대한제국 내의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와 주시경이 3년간 마련한 맞춤법통일안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1912년 4월「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제정‧공포를 시작으로 1920~30년간 총독부 주도하의 관제적인 한글 맞춤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는 개화기에 새롭게 부상한 한글을 근대적인 언어체계로 정비하려 한 민족적 노력을 억압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인 스스로 고유한 한글맞춤법을 확립하고 사전을 편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한국인 고유의 전통과 자주적 의식을 지키기 위한 민족적 과제에 해당했다. 이에 1910년 조선광문회에서『말모이』가 집필된 이래 한글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권덕규 역시 그러한 민족과제 수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1월 2일에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 발기총회가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에서 개최되었다. 사회‧학술‧문화계 유력인사들과 더불어 권덕규가 한글사전편찬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때 다음과 같은 성명이 발표되었다.

조선민족이 다시 살아날 지름길로는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선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문화를 촉진하는 방법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법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

성명에서 보이듯 한글사전 편찬은 한민족의 문화 유지 차원에서 강조되었다. 그 연장에서 일제의 민족말살통치라는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한글사전 편찬이 제안되었다.

1931년 1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개칭되면서 본격화한 한글맞춤법 제정과 표준어 사정(査定), 외래어 표기법 확립 등은 사전편찬을 위한 선행 과제였다. 권덕규는 조선어학회 주요 위원으로 그 같은 사업추진을 주도했다.

구체적으로 1930년 맞춤법 제정위원으로 참여하고, 1932년 12월 24일 한글학자 17명과 함께 조선어철자위원회(朝鮮語綴字委員會)를 조직했다. 권덕규는 이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며 한글강연회를 위해 전국을 오갔음에도 한글 표준어 확립을 위한 토의에 꾸준히 참여했다.

기나긴 숙고와 토의를 거쳐 1933년 1월 6일에 문법과 성음(聲音)을 규정한 한글통일 원안(原案)이 작성되었다. 이어서 권덕규가 최현배(崔鉉培)‧이극로(李克魯)‧김윤경(金允經)·신명균(申明均) 등과 함께 수정위원에 임명되어 후속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33년 10월 19일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마침내「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통과되었다. 이는 권덕규를 비롯하여 최현배‧이극로‧김윤경‧이만규(李萬圭)‧장지영 등 국내 한글학자 18인의 3년에 걸친 120여회의 토의 끝에 이뤄낸 소중한 결실이었다.

이어서 조선어학회는 1935년 1월부터 올바른 표준어 어휘 사용법을 확립하기 위한 표준어 사정 작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36년에 표준어 어휘집인『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간행되었다. 1940년 6월에는『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이 결정되면서 외국어 한글 발음과 단어 용례의 표준도 확립되었다. 조선어학회의 이 같은 성과는 한글 사용의 표준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어사전 편찬의 토대를 구축했다.

권덕규도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발족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朝鮮語辭典編纂委員會)’에 이극로·이윤재(李允宰)·정인승(鄭寅承) 등과 더불어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 같은 상승세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침략을 본격화한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咸鏡南道) 홍원(洪原) 경찰서는 민족정신 교육 혐의로 영생고등여학교 교사이자 사전 편찬 참여자인 정태진(丁泰鎭)을 출두시켜 가혹하게 고문했다. 그 결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 단체라는 취지의 허위자백을 받아 냈다. 이를 빌미로 10월 1일 일제 경찰이 서울의 조선어학 회관을 급습하였다. 이에 이윤재·최현배·정인승·장지영·김윤경·이극로 등 11명이 구속되어 함흥과 홍원으로 압송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다음해인 1943년 3월 6일까지 조선어학회 관계자 17명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이때 권덕규는 와병 중인 탓에 구속되지 않았다. 권덕규의 건강은 1940년부터 중풍으로 인하여 악화되었다. 1942년 당시에도 거동이 어려운 상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에따라 권덕규는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었고, 1943년 4월에 기소정지 처분을 받았다. 1910년대부터 함께한 동지들의 수감과 오랜 숙원인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의 중지라는 크나큰 시련을 신체의 병마와 함께 감내해야 했다.

비록 사전 편찬의 성과가 이어지진 못했지만,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체계 정립과 한글보급 운동은 민족문화 수호의 일부분을 담당한 주요한 민족운동 흐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은 단순한 어학운동의 의미를 넘어 민족보존과 자주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40년대 일제의 경제수탈과 총동원체계 확립, 민족언론 폐간 등의 억압에 권덕규를 비롯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필봉(筆鋒)의 의지로 저항했다. 한글 이론 체계화와 선각자적 지성, 그리고 민족문화 부흥의 신념이 그 수단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30~40년대 권덕규의 적극적인 항일운동과 저항정신이 지닌 독립운동사적 가치가 드러난다.

1942년 조선어사건 이후 권덕규의 활동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1930년에 아끼던 외동아들이 사망하고, 1942년부터 동지들이 수감되는 시련이 이어지자 그의 활동 범위가 축소되고 건강 악화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권덕규의 학술, 사회 활동이 재개되었다. 먼저 해방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귀국을 촉구하고 환영한「국민대회취지서 국민대회 준비회 선언」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1945년에 역사서『조선사(朝鮮史)』를 간행했다. 이는 그가 1924·26년에 간행했던『조선유기』상·하를 1929년에『조선유기략(朝鮮留記略)』으로 대폭 축약해서 간행한 것을 다시 펴낸 저서였다. 이어서 1945년 11월 25일부터 해방을 맞이하여 출감한 동지 이극로·김윤경과 함께 국사국어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46년 3월 4일에는 부인용 잡지인『우리집』간행 편집 위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에 그동안 집필한 수필과 기행문 등을 종합한『을지문덕(乙支文德)』을 발간했다. 이처럼 대외활동을 재개하던 권덕규는 1950년 3월 5일 서울 흑석동(黑石洞) 58번지 자택에서 나간 후 실종되었다. 그외에 정확한 사망 지점이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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