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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로버트 그리어슨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8년

주요공적

1901년 성진에서 제동병원과 교회를 세워 많은 환자를 돌봄

1919년 3.1운동 당시 부상자 치료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로버트 그리어슨 /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 올리버 알 애비슨

로버트 그리어슨 Robert Grierson ,(1868) ~(1965) . 외국 캐나다 , 독립장 1968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Stanley Haviland Martin ,1870.07.23 ~(1941) . 외국 캐나다 , 독립장 1968 올리버 알 애비슨 Oliver R. Avison ,1860.06.30 ~1956.08.29 . 외국 캐나다 , 독립장 1952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배를 받고 있을 때 이 땅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특히 1919년 3월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이달의 외국인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올리버 R. 애비슨, 로버트 그리어슨, 스탠리 H. 마틴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였던 선교사들이다.

특히 애비슨은 1919년 3월 초 일본 고위 관리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를 대변하고, 3.1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전보로 귀국길에 일본에 머물고 있던 캐나다장로회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을 서울로 불러들여 3.1운동을 해외에 알릴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은퇴한 후에도 미국에 돌아가 기독교인친한회의 재정을 맡아 임정승인과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하였다. 그리어슨은 성진 지역 3.1운동을 적극 도왔으며, 마틴은 용정 지역 3.1운동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병든 몸을 치료하는 의료선교사로 이 땅에 왔지만, 우리 민족의 병든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한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1. 은퇴한 후에도 독립운동을 도운 선교사 : 올리버 알 애비슨

올리버 알 애비슨
올리버 알 애비슨

애비슨(Oliver R. Avision)은 1860년 6월 영국 요크셔주에서 태어나, 6세 때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여 온타리오주에서 성장하였다. 그곳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884년 토론토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을 마치고, 1887년부터 모교 식물학 강사로 활동하다가 같은 대학교 의과대학 2학년에 편입하여 1890년 의사 자격을 얻었다. 그는 개인병원을 운영하면서 모교의 의과대학 약리학 강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892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서 선교하던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토론토대학을 방문하여 한국선교사 지원을 호소하는 강연을 듣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같은 해 6월 가족과 함께 한국에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서 부임하였다. 그해 11월 초부터 제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고종의 시의를 겸했다. 1899년 제중원 안에서 의학교육을 시작했고, 1900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의료선교 후원을 호소하여 사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로부터 1만불을 지원받았다. 그 기부금으로 제중원을 신축 이전하여 1904년 9월 세브란스병원으로 명칭도 바꾸었다. 그리고 병원 내에 의학교를 계속 운영하여 1908년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16년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그 교장도 겸임하였다.

일제는 무단통치 체제하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처음부터 무력을 동원하여 가혹한 탄압을 하는 한편, 이 운동을 재한 선교사들이 사주하여 일으킨 것으로 매도하고 선교사들까지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선교사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언론을 동원하여 선교사들을 사주·선동자로 매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을 회유하여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시위를 중단하도록 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이미 3월 초순부터 주요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수차례 회합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최초 회합은 총독부 내무부장관 우사미(宇佐美勝夫)의 요청으로 당시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스미스(F. H. Smith) 선교사의 집에서 3월 9일 일요일 저녁에 열렸다. 이 모임에는 미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당시 세브란스병원장을 맡고 있던 애비슨도 초대받아 참석하였다. 애비슨은 이 회합에서 한국인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불평을 “1. 두 민족 간의 독특한 민족적인 다른 점에 대한 충분한 배려, 2. 한국어 교육의 특권, 3. 언론의 자유, 4. 출판의 자유, 5. 공공 집회의 자유, 6. 여행의 자유, 7. 사회 정화 - 일본 정부가 매춘 조직을 한국인을 상대로 강제함. 한국인은 이에 대하여 자구책이 없음. 8. 한국인 차별 철폐” 등으로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한국인들이 이런 것들 중 어느 것이라도 요구하면 감옥에 가야하고 범죄인처럼 취급을 받아왔다고 주장하고, 우사미에게 한국인들의 이러한 청원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애비슨은 재한 선교사 연합으로 대책회의를 마련하고, 3월 13일 그 전해 가을부터 극동지역 선교현장을 돌아보고 일본을 거쳐 귀국 중 요코하마에 머물고 있던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에게 “즉시 서울로 와 주시오. 충분한 이유가 있음”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는 즉시 서울로 되돌아와 16일 아침부터 17일 저녁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 30여명이 모인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3․1운동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요코하마를 거쳐 22일 다시 귀국 길에 올랐다. 그는 약속대로 귀국하자마자 4월 5일자로 「한국 독립 봉기(3․1운동)에 대한 비망록」을 미국 장로회, 감리회를 비롯한 각 교단 해외선교부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내 대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러한 선교사 대책회의를 하고 있던 3월 17일 일제 경찰은 애비슨이 원장으로 있던 세브란스병원 및 의학전문학교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을 했다. 50여 명 되는 경찰들이 주변 지대를 에워싸고 있었고, 경찰, 형사, 검사 등 도합 70여 명의 사람들이 대학 건물, 병원, 한국인 간호사 숙소, 외국인 간호사 숙소를 뒤졌다. 애비슨은 그들이 수색을 시작하기 전, 수색영장이 있는지 묻고, 수색영장도 없이 수색하는 것에 대하여 영국 총영사, 미국 총영사의 이름으로 항의했다.

당시 총독부 고등법원 판사로 있던 와타나베(渡邊暢)가 3월 22일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총독부 관리들과 선교사 대표들의 두 번째 회합에도 감리교의 웰치 감독(Bishop H. Welch)과 함께 애비슨이 초청받아 참석하였다. 이 회합에서도 애비슨은 영국인으로서 솔직한 생각을 말한다고 전제하고, 일본은 “자유라는 위대한 원칙”을 위해 동맹국들과 함께 싸웠고, 이제 세계는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국제연맹을 조직하고 있다고 하면서, “1. 민족정신을 품을 수 있는 권리, 2.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권리, 3. 언론의 자유와 권리, 4. 출판의 자유, 5. 그 나라 국민들의 복지에 영향을 미칠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자유, 6. 정부에 참여할 권리” 등 인간의 자유에 속하는 필수적인 항목을 설명하면서, 과거 수년 동안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의 상징으로서 칼(무력)을 계속 과시해 오고 있다는 것이며, 인류의 자유를 위한 그 목적에 일본이 연합국들과 함께 지지할 것을 주장했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세브란스병원에는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넘쳐났다. 더욱이 일제 헌병경찰은 이들이 기독교병원에 가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검거해 가는 경우도 있었다. 4월 10일에 세브란스병원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자 애비슨은 이에 대해서 항의하고, 실명으로 사건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하여 공표하고 선교본부에도 보고하였다. 애비슨은 3.1운동의 부상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치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 헌병경찰의 가택 수색과 환자 이송에 저항하고, 항의하였다.

<선교회의 3교를 수색코져> 일제는 1919년 4월 14일부터 연희전문, 이화학당, 배제학당에 대한 가택수색을 실시했다.(신한민보 1919년 5월 27일자 기사)
<선교회의 3교를 수색코져> 일제는 1919년 4월 14일부터 연희전문, 이화학당, 배제학당에 대한 가택수색을 실시했다.(신한민보 1919년 5월 27일자 기사)

4월 14일에는 애비슨이 교장을 겸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가 수색을 당했다. 그러자 그는 이들의 행위를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애비슨의 행동을 헌병경찰의 보고서에서는 “연희전문학교장의 일본 관헌 공격”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되기까지 했다.

애비슨은 5월 26일 3.1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양한묵(梁漢黙)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여 그 시신이 유족에게 인도되자, 동료 선교사 2명과 함께 자동차로 그의 집을 방문하여 시신을 다시 검안하고, “양씨는 육체는 죽었어도 그 영혼은 살아있어 한국을 위해 진력할 것이니 여러분도 양씨의 뜻을 받아 결심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며 유족들과 조문객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애비슨은 1919년 여름 소래 해변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8월 15일자로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한국문제가 10월 워싱턴에서 열릴 국제연맹 총회와 가을 캐나다 국회에서 다루어질 것이라는 정보가 있는데, 국제연맹 미국 대표들과 연락하여 확인해 달라고 하면서, 8월 5일자 일본 언론에 신임총독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임명될 것이라는 보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것은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가 언론에는 법령을 개정하여 민간인 총독을 임명한다고 하면서 군인총독을 임명한 것은 개혁의지가 없는 것이며, 한 달 전부터 서울프레스에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실시한다고 연일 보도하지만, 이 편지를 쓸 무렵까지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이 문제도 여러분과 의논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애비슨은 9월 10일자 편지에서도 사이토 총독의 유고(諭告)를 영어로 번역하여 실은 서울프레스를 첨부하여 보내면서, 병원과 의학교의 상황을 브라운 총무에게 보고하였다.

한국에 선교하는 선교부들의 연합단체인 재한선교사연합공의회(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에서도 신임 총독 사이토가 부임하기 몇 달 전부터 저다인(Gerdine)과 로즈(Rhodes)로 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기회가 될 때 총독에게 제출할 진정서를 준비하게 하였다. 저다인과 로즈는 애비슨과 모페트를 비롯한 여러 선배 선교사들의 자문을 받아 그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 진정서는 1919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8회 선교사연합공의회 연례회의에서 법률위원회(Legal Committee)의 수정을 거쳐 전체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 진정서 1천부를 인쇄하여 여러 선교지부에도 보내도록 선교사연합공의회 총무에게 위임하고, 총독에게 제출하는 일도 회장과 총무에게 맡겼다. 이 진정서는 3·1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기독교계의 불만 사항들을 망라하여, 진정서라기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시정을 요구한 공개 성명서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무렵 일제 고등경찰의 기밀보고에 따르면, 이와는 별도로 이 회의 마지막 날인 9월 29일 밀러, 애비슨 등 10여명의 선교사가 노블 선교사집에 모여 비밀 회합을 갖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협의하였다.

1. 재선 기독교파에 대한 일본 관헌의 이유없는 경계와 이면의 압박을 면하게 할 것, 이에 대한 위원을 도쿄에 파견하거나 혹은 도쿄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서면을 제출할 것

2. 일본 중국 및 조선에서 포교 경비에 대한 포교 성적의 비교를 조사함으로써 조선과 같이 포교 곤란한 지방에서의 우량한 성과를 외국 기독교 교도에게 소개하고, 조선인에 대한 대우를 종래보다 한층 양호하게 하는 한편 정치적 관계를 피함으로써 교도에 대한 세상의 혐의와 오해를 제거하기에 노력할 것

3. 선교사가 일본 관헌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면 그 여파는 곧바로 조선인 교도에게 전화(轉化)되므로 표면으로 당국과 친선을 가장할 것

4. 이상 이외의 사변과 선교사와 관계된 상황을 각 교파마다 자기 본부에 보고하고 이를 신문에 게재하며, 다시 이를 일괄 편집하여 다음 회의 결의를 거쳐 선교사회의 이름으로 미국 각 교파에 송부할 것

여기 3항에서 애비슨을 비롯한 선교사들은 일본 관헌으로부터 의심을 받으면 그 영향이 곧바로 한국인 교인들에게 옮겨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일제 “당국과 친선을 가장”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한국인 교인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정치적 관계를 피하고” “표면으로 당국과 친선을 가장”하며, 총독부의 개혁을 촉구하고, 그 이행을 감시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그 무렵 미국기독교연합회의 동양관계위원회에서도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시정개혁을 감시하고 촉구하기 위해, 현지 선교사들의 보고서와 회의 결과를 토대로 1919년 7월에 발행했던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 두 번째 소책자 발행을 준비하였다. 이 소책자는 1920년 5월에 발간되었지만, 그 자료 수집은 1919년 말경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체제도 첫 번째 소책자는 증거문건들을 편집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이 두 번째 소책자에서는 자료의 단순한 편집이 아니라 3.1운동의 원인과 결과를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선교사들이 요구했던 시정 개혁의 실현 정도, 과제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면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중립을 고수하면서도 종교적인 면과 인도주의적인 면에서는 적극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선교사와 미국인이 가져야 할 몇 가지 바람직한 태도를 제안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애비슨은 이 동양관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이 소책자 발간의 핵심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에비슨 박사 은퇴>(매일신보 1934년 2월 23일자 기사)
<에비슨 박사 은퇴>(매일신보 1934년 2월 23일자 기사)

애비슨은 한국에서 선교를 해야 하는 한 공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할 수는 없었지만, 진심으로 한국인의 독립을 바랐던 선교사이다. 그가 사이토 총독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졌던 것도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박탈함으로써 신의를 저버리긴 했지만, 사이토 남작은 조선인에 대해 순수한 공감을 가졌고 나아가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갈망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조선에 대한 일본정부의 정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적어도 조선민이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은 가상할만한 일이라고 인정한 것은 사실이었다.”라고 하여 사이토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애비슨은 은퇴한 후에 회고록 “자서(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 민족보다 천부적 재능을 많이 가진 조선 백성들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민으로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다시 한 번 인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열강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이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일에 이 책이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이는 조선 백성들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도 결코 작지 않은 은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1940. 6. 30.)

애비슨은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 명예 교장에 추대되었고, 선교사에서 은퇴하여 1935년 12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미국에 귀환해서도 1942-1945년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 총무 겸 재무를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했다. 우리 정부는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56년 8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 피츠버그에서 96세로 별세했다.

2. 성진 3.1운동을 후원한 선교사 : 로버트 그리어슨

로버트 그리어슨
로버트 그리어슨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은 1868년 2월 15일 캐나다 노바 스코셔(Nova Scotia)주 헬리팍스(Halifax)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인 아버지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과 어머니 메리 파레트(Mary Parrett)의 아들로 태어났다. 헬리팍스 아카데미(Halifax Academy)를 거쳐 1890년 달하우지대학교(Dalhousie University)를 졸업했다. 1893년 파인 힐(Pine Hill)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달하우지 의과대학(Dalhousie Medical College)을 졸업하고 의사자격증을 받고, 189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달하우지대학 졸업반 때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여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의 한국 개척선교사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1897년 2월 무렵 윌리엄 푸트(William Foote) 목사, 던컨 맥래(Duncan MacRae) 목사와 함께 선교사에 임명되었다.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헬리팍스에서 레나 베노잇(Lena Venoit)과 결혼했다. 부인과 함께 1898년 9월 7일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899년 2월 함경남도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도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1901년 5월 함경북도 성진에 선교지부와 진료소를 설치하고 선교활동을 했다. 이 진료소는 1916년 제동병원(濟東病院)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2년 간도(間島)와 해삼위(海蔘威) 지역까지 여행하며 성진을 비롯한 관북지방과 동만주 일대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원하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일본군의 만행에 항의하여 함경 남북도 지역에서 선교하던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과 갈등을 일으킨 사건들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1908년 11월 3일 일본군 하마타(濱田甚藏) 상등병을 구타한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이 전도하여 믿게 된 함남 단천군 원덕리교회(院德里敎會) 문성기(文成基) 장로의 아들 주례를 서기 위해서 말을 타고 하루에 30마일씩 150마일의 산악길을 여행하여 1908년 11월 3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일행은 이미 신부집으로 가고 없어 지칠 대로 지친 말 두 필을 교회당으로 쓰는 문성기 장로집 앞 말뚝에 매어두고 몇 마일 더 거슬러 올라가 겨우 시간 전에 신부집에 도착했다. 잔치가 한참인데 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일본군인들이 그의 말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거리를 달리게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자 작은 채찍 막대를 가지고 그곳에 도착해 보니 4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말 두 마리를 번갈아가며 타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있던 일본군 병사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나머지 병사에게 손에 잡고 있던 대나무로 된 채찍 막대로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그 병사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채찍에 맞아 상처를 입은 병사는 일본군 덕원장 헌병분견소에 근무하는 상등병 하마타였다. 이 사건은 결국 덕원군 헌병분견소장 고바야시(小林善八郞)가 개입하여 일본군측에서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동휘(1995년 대통령장)
이동휘(1995년 대통령장)

강화도와 서울 지역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하던 이동휘(李東輝)가 1908년부터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순회강연을 하며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하기 위해 1909년 봄 성진의 그리어슨을 찾아와 관할 구역내 설교자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동휘가 국권회복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기꺼이 성서 매서인(賣書人)으로 임명하고, 1년후에는 조사(助事)로 임명하여 자유롭게 그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도록 후원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으로 이동휘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용산헌병대에 구금되었을 때도 그를 찾아가 면회하였고, 1910년 1월 그가 석방되자 다시 함경도 지역에서 조사로 일하게 하였다. 일제 헌병들이 이동휘의 애국강연 활동을 상세히 보고하면서도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배후에 일본과 동맹국 국민인 그리어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동휘는 1910년 8월 3일에 성진에서 ‘한일합방’ 반대 혐의로 체포되어 서울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 29일 병탄조약이 공포된 후에야 석방되었다. 이동휘는 1911년 3월에도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대무의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난 후에도 함경도 지역에서 그리어슨과 함께 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도저히 국내 활동이 불가능하자 국외로 망명을 꾀하였는데 이동휘의 국외 망명도 그리어슨이 도와주었다. 1912년 1월 원산에서 함경노회가 조직될 때 원산, 함흥, 함북대리회 중 함북대리회를 맡았다. 1916년 8월 함경노회에서 스코트(William Scott) 선교사, 박창영(朴昌英) 목사와 함께 성진 회령 지역을 맡았다. 1918년 3월 함남노회가 조직되고 같은 해 8월 원산에서 열린 제2회 노회에서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그가 함남노회장으로 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1957년에 발표한 그의 회고록에서 3.1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이 날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다. 또한 세계 혁명사에도 길이 기념할만한 날이다. 한 나라의 백성들이 독립을 찾기 위해 아무런 무기도 없이 오로지 손에 작은 깃발만을 들고 분연히 일어나 용감히 외쳤던 것이다. 이 운동의 준비는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것 같다. 전국 각처의 지도자들은 그날 거사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사람이나 한국인들과 언제나 가까이 지낸 우리 외국인들은 이 일에 대해 사전에 아무런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성진지역 3.1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도왔다. 그는 1919년 3월 7일 저녁 성진지역에서 다른 지역과 연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을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어 3월 9일 주일에는 그가 담임하던 성진 욱정교회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를 먹구름에 비유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도들이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여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3월 10일 성진 만세시위는 캐나다장로회에서 운영하고 그가 원장으로 있던 제동병원 앞에서 시작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며 관공서, 경찰서가 있는 시내로 확산되었다. 그러자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일제 군경과 소방대가 출동하여 한국인을 무차별 구타하고 총을 난사하여 부상자가 속출하여 그리어슨은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 가슴에 관통상을 입은 욱정교회 장로의 동생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날 아침 일찍 성진경찰서에서 로스(Mr. Ross) 선교사와 함께 호출이 있었으나, 밀려든 환자들을 돌보느라 저녁 식사 후에야 경찰서에 가서 취조를 받고 돌아왔다. 그날 이후 그가 담임하던 성진 욱정교회 모든 장로들과 많은 교인들이 체포 투옥되어 3월 11일 주일 예배에는 참석자가 적었다. 그날 경찰서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교회 종을 오랫동안 치게 했다.

<구예선씨 환영회> 그리어슨이 돌아오자 성진 제동병원에서 1921년 4월 23일에 성대한 환영회를 열었다.(동아일보 1921년 4월 26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구예선씨 환영회> 그리어슨이 돌아오자 성진 제동병원에서 1921년 4월 23일에 성대한 환영회를 열었다.(동아일보 1921년 4월 26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매일신보』 1919년 3월 15일자에 “성진(城津) 소요의 주모자는 야소교 선교사 영국인 「크레-손」인데 백성들은 화근을 없애려고 영국인을 죽인다고 떠들며 분개한다더라”고 허위로 보도하였다. 당시 투옥자들 중에는 재판을 받고 몇 년간씩 징역 언도를 받고 서울로 송치되어 옥고를 치르는 사람들이 있어, 때때로 이들을 면회하고, 교회 여신도들을 교대로 보내어 면회하고 사식을 제공하게 했다.

1919년 7월 안식년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하게 되자 교인들이 성진 욱정예배당에서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주고 7월 15일 부두까지 배웅해 주었다. 1921년 3월 세 딸과 함께 돌아와 성진선교지부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회령, 성진, 해삼위를 관장하는 함북노회 부노회장에 피임되었다. 1935년 정년퇴임 후 귀국하여 토론토(Toronto)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 5월 8일 98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감사패까지 받은 선교사 : 스탠리 에이치 마틴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은 1870년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세인트존스(St. Johns)에서 출생하였다. 온타리오(Ontario)의 퀸즈대학교(Queen’s University)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의사가 되었다. 1916년 부인과 함께 캐나다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1913년에 개설한 용정선교지부에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였다. 당시 캐나다장로회는 1898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인수한 원산선교지부를 중심으로 함경남북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1901년에는 성진지부, 1904년에는 함흥지부를 설립하였으며, 점차 간도와 연해주 지역으로 선교지역을 확대하여, 그 지역에 사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워 선교활동을 하였다.

계봉우(1995년 독립장)
계봉우(1995년 독립장)

용정을 중심으로 하는 북간도 지역에는 이 무렵 1900년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 이주하였던 김약연(金躍淵)‧문치정(文治定)‧김영학(金永學)‧구춘선(具春善)‧마진(馬晉)‧박무림(朴茂林) 등 민족지도자들이 기독교로 집단 개종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운동에 힘쓰고 있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 병탄 이후 급격히 성장하였다. 특히 1911년 2월 성진에서 조사로서 활동하던 이동휘(李東輝)가 이 지역에 파송되어 사경회를 인도하고 이를 계기로 조직된 삼국전도회를 중심으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자 그 지역의 선교를 맡고 있던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1912년 가을 선교본부에서 파송된 맥퍼슨 스코트(J. Mcpherson Scott) 목사를 대동하고, 바커(A. H. Barker; 朴傑)‧맥도날드(Macdonald)‧럽(Robb) 선교사가 북간도 지역을 여행하고, 용정에 선교지부를 건설할 것을 본국 선교부에 요청하여 즉시 허가를 받았다. 김약연‧계봉우를 비롯한 북간도 각 교회 대표들도 1912년 11월 4일 연명으로 캐나다선교부에 “청원서”를 보내, ① 목사(선교사) 파송, ② 전도인 추가 파송, ③ 중학교 설립, ④ 병원설립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6월 바커 선교사 가족이 용정으로 이주하여 용정지부를 설립하였다.

1916년 이 용정지부에 의료선교사로 마틴 부부가 부임함으로써 용정지역에서도 의료선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진료소로 시작하였으나, 1916년 11월에 착공한 병원건물이 1918년에 완성되어 현대식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새로 건립된 제창병원(濟昌病院, St. Andrew Hospital)은 30개의 병상을 갖춘 현대식 건물로 남녀 입원실과 수술실, X선 촬영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병원 중앙 건물 좌측에는 외래환자 진료소가 있었고, 우측에는 남자병동, 그 뒤에 여자병동이 있었으며, 여자병동에 이어 간호사 숙소가 있었다. 의료진으로는 병원장 마틴 외에 한국인 의사 1명, 간호사 2명, 약제사 1명, 그리고 마틴 부인이 간호부장으로 함께 일했다. 이 병원의 환자비율은 한국인이 75%, 중국인 20%, 러시아인 5%였다.

북간도 지역의 3.1운동은 초기에는 국내보다는 러시아 연해주지역에 거주하던 동포들과 연계하는 가운데서 준비되었다. 문창범이 의장으로 있던 전로한족중앙총회는 1918년 12월 재미동포들이 민족자결문제로 분투하고 있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대표를 선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여 러시아 한인대표도 파리강화회의에 파송하기로 하고 인물 선정, 자금 모금 등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런 준비를 하던 가운데 먼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소식이 북간도에 전해지고, 3월 7일 저녁에는 국내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였다. 그러자 북간도 각 지역 대표들은 용정촌 및 국자가(局子街)에서 비밀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여 이미 선언된 「독립선언 축하회」를 열기로 하였다. 이 「독립선언 축하회」는 1919년 3월 13일 정오 용정의 서전 대야(瑞甸 大野)에서 개최되었다. 식장에는 대회장인 김영학, 회장 구춘선 장로, 부회장 배형식 목사를 비롯하여 김내범 목사, 정재면 전도사, 신학봉 집사, 강백규 장로, 마진 집사 등 북간도 지역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김영학의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의 명의로 된 「독립선언 포고문」 낭독에 이어 유예균, 배형식, 황지영 여사의 연설이 있었고, 만세시위대는 「정의인도」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로 돌진했다. 이 때 시내 진입을 일제의 사주를 받아 저지하려던 중국군이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날 시위에서 총에 맞아 기수 박문호를 비롯한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치명상을 입은 4명은 병원으로 옮겨 치료받던 중 사망했으며, 중상자 18명을 비롯한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들 사상자들은 모두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선교병원인 제창병원으로 옮겨졌다. 한국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병원장 마틴은 사망자의 시체는 병원 지하실에 안치하게 하고, 의료진과 함께 부상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고, 사망자들을 위한 합동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이러한 일 후에도 마틴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지지와 협조 속에 제창병원과 그 부속건물들이 자주 독립운동을 모의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집회장소와 숙박소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각종 문서들이 등사판으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일제의 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용정촌에서 시위운동 후 불령 조선인에 대한 일본‧중국 군경의 단속 경계가 엄밀하여 주모자의 체포 등에 착수하자, 독립운동자의 용정 시내 숙박 혹은 집회 등은 대단히 위험하였으므로 외국인 선교사가 법의(法衣)의 소매로 엄호하면서 불령행동을 지속해 왔다. 용정촌 동쪽 언덕 영국인 선교사 주거지 구내에 있는 제창병원 혹은 부속 가옥은 한족 독립운동자의 집회장이 되거나 혹은 독립운동 연락자의 숙박소가 되거나 또는 불온문서 발행소가 되어 당시 밤낮 그들 불령자의 단속 경계에 힘쓰고 있던 총영사관과는 한 블록에 이르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기괴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틴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에 감사하여 간도 대한국민회는 1920년 2월 이를 표창하는 기념패를 제작하여 그에게 수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활발해진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1920년 10월 간도를 침공한 일본군은 같은 해 12월 말까지 사이에 그 지역 한인촌에 대한 대대적인 방화‧학살을 자행했다. 간도에 침공한 일본군은 주력인 조선군 제19사단에서 9천명, 제20사단에서 700명, 포조파견군 제14사단에서 4천명, 제11사단에서 1천명, 제13사단에서 1천명, 북만주파견대에서 1천명, 관동군에서 1천 200명 총 1만 8천명에서 2만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이 동서남북에서 서‧북간도를 포위하여 ‘초토 작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피해규모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간도 지역만 하더라도 피살자 3,664명, 피체자 155명, 파괴소실된 민가 3,520동, 학교 59개교, 교회당 19개소, 곡물 59,970섬에 이른다고 한다. 당시 상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에는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피해 상황을 피살 3,469명, 피체구금 170명, 강간 71명, 소실된 민가 3,209동, 학교 36개교, 교회당 14개소, 곡류 54,045섬으로 보도했다. 간도에 침공한 일본군에 의한 한인촌의 방화‧학살은 너무도 끔찍하여 국적을 떠나서 인류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 행위였다. 이에 당시 용정의 제창병원 원장으로 있던 마틴은 일본군의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병원 간호사와 함께 1920년 10월 말경 일본군의 방화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사진을 촬영하고, ‘노루바위(장암동) 학살 사건’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군의 학살 만행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다음은 그가 직접 피해지역을 답사하고 보고한 보고서의 일부이다.

장암동학살 사건

다음에 기술한 사실은, 중국 길림성 남부의 간도 전체를 통해서 타당한 예증이다. 일본은, 중국의 지극히 강경한 항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할 수 있으면 전(全)기독교도, 특히 전(全)청년을 소멸하려고 기도함으로써, 이 지방에 1만 5천의 군사를 출동했다. 촌락은 잇따라 매일 조직적으로 소각되고 청년은 사살되었다. 그 때문에 현재 내가 사는 마을은, 그 주위에 소각 또는 전원 학살된 촌락, 더욱이 통상 두 방면의 재난을 받은 촌락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 기술한 사항은 틀림없이 진실하여 나 자신이 영국인인 친구와 함께 목격한 것이다. 우리는 10월 31일(일) 날이 밝음과 동시에 북경 마차에 타고, 용정촌을 출발해, 그곳으로부터 12리 떨어진 작은 골짜기의 밑바닥에 있는 장암동부락으로 향했다. 그날은 일본의 천황 탄생일(천장절)이었기 때문에 도중에 일본의 병졸 경관 등이 번거롭게 하는 일 없이, 마침 사냥이라도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큰 길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 되어 먼 언덕에 짙은 연기가 오르는 것이 멀리 보여, 이것이 곧 우리 목적지인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하에서는 10월 30일에 그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다수의 목격자가 보고 들은 대로 기술하기로 하겠다.

날이 밝아옴과 동시에 무장한 일본보병 한 부대가 기독교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짜기 구석편에 높게 쌓아진 곡물에 방화하고, 주민 일동을 밖에 나오도록 명했다. 주민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든, 아이든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 것은 총을 쏘아, 그 반 죽은 대로, 넘어진 것에는 건초를 덮어 씌워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우고 말았다. 그 사이에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도 마을 청년 남자 전부의 처형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했다. 가옥은 전부 불타 온 마을이 연기화해, 그 연기는 그 시(용정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일본병은 거기서부터 계곡 지역과 본 가도 사이에 있는 촌락에 흩어져가서, 기독교도의 집을 전부 불태운 후, 천장절 축하를 위하여 돌아왔던 것이다.

우리가 그 촌락 부근의 촌락에 근접하자 만난 사람들은 부인, 아이나 백발의 노인뿐이었다. 등에 갓난아이를 업고 있던 여자들은 슬피 울면서 부근을 방황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는 것조차, 그녀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시야에 비친 것은 곳곳이 불타오르고 있는 일대 조선인 가옥의 잔해였다. 주위에도 모락모락 연기가 오르고 있던 것은, 3년분의 저장 식량이었다. 3개의 새로운 분묘 앞에 앉아있는 것은, 등에 갓난아이를 업은 부인과 8살의 딸 및 새로 만든 백색의 상모를 쓴 노인 3명이었다. 우리는 불탄 흔적을 촬영한 후, 이 노인이 유명한 기독교인인 것을 알았다. 그는 4곳이나 총에 맞고, 그의 아들 두 사람도 사격을 받고, 형제 세 명은 모두 불타고 있는 집의 화염 가운데 던져 넣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옆에 있던 몇 명의 사람에게, 시체에 부착된 흙을 털어 내도록 했다. 드러난 시체는 몇 곳이 사격을 받아 사지가 꺾여진 노인의 검게 그을린 시체였다. 소각을 면한 것은 머리 부분만으로, 흰 머리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시체 및 다른 분묘 2개를 촬영하고 나서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에서는 화재가 벌써 36시간이나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체 타는 냄새가 나고, 가옥이 불타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부인 네명을 만났는데, 그녀들은 모두 새로운 무덤 앞에 앉아, 슬피 울고 있었다. 불쌍한 그녀들은 우리가 있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또한 정신이 나간 듯했다.

<폐결핵을 아는 법과 치료법(2회)>(동아일보 1928년 11월 22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폐결핵을 아는 법과 치료법(2회)>(동아일보 1928년 11월 22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마틴은 1927년까지 제창병원 원장으로 있다가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로 임명되어 임지를 서울로 옮겼다. 이곳에서도 흉부외과 과장과 세브란스결핵병방지회장을 맡아 한국인 특히 청년층의 고질병인 폐결핵의 퇴치에 힘썼다. 그리고 연구 결과를 언론에 기고하거나 강연 저술을 통하여 보급하였다. 『동아일보』 1928년 11월 21~22일자에 연재한 「폐결핵을 아는 법과 치료법」, 같은 신문 1933년 3월 24일자에 보도된 세브란스의전동창의학회의 학술강연회에서 발표한 「인공기흉요법(人工氣胸療法)에 대하여」 등이 그런 예이다. 193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의 인터뷰 기사에서도 전도가 창창한 학생계에 결핵이 만연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한국에 결핵병이 창궐한 것은 “1. 과도한 일을 하는 것, 2. 생활상태가 비위생적인 것, 3.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다가 1940년 가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미국과 영국 영사관은 선교사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철수를 강력하게 권고했다. 미국 정부는 자국민 철수를 위해 마리포사호(The Mariposa)를 인천항에 보내 11월 16일 대부분 선교사와 그 가족들로 이루어진 219명을 싣고 한국을 떠났다. 바로 이 배를 타고 그가 부인과 함께 철수하였는데, 이는 그의 부인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부인과 함께 거주하던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Richmond)에서 이듬해인 1941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1968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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