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송진우
/
이길용
/
여운형
송진우
, 1890 ~1945
, 독립장
(1963)
이길용
, 1899 ~미상
, 애국장
(1990)
여운형
, 1885 ~1947
, 대한민국장
(2008)
, 대통령장
(2005)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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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
1936년 8월 9일 머나먼 독일의 베를린에서 기쁜 소식이 조선에 전해왔다. 손기정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함께 출전한 남승룡이 3위에 입상하였다. 손기정은 1933년 10월에 열린 조선신궁경기대회 마라톤 우승을 시작으로 1935년까지 조선과 일본의 마라톤 대회를 휩쓴 메달 기대주였다. 우승 기록 중에는 비공인 세계신기록도 있었다. 마라톤 강국으로서 올림픽 우승을 꿈꾸던 일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인의 기대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경기는 8월 9일 밤 11시 2분, 베를린 현지 시간으로 오후 3시 2분에 시작되었다. 출전 선수는 56명이었다. 손기정은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아르헨티나의 자바라를 제치고 2시간 29분 19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결승선을 일등으로 통과하였다.
손기정은 현지의 일본 방송국 요원과 경기 후 진행한 인터뷰에서 “자바라를 이겼습니다. 정정당당히 싸워서 결국 승리의 월계관을 조국으로 가져가게 되옴을 기뻐하오며 고국의 여러분께서 성원해주신 힘인 줄 아옵고 간단하나마 이것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라고 일본어로 담담하게 말했다.
반면에 조선일보사의 김동진 도쿄지국장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는 축하 인사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말을 못하다가 북받쳐 오르는 울음과 함께 “남형과 내가 이긴 것은 다행이요, 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가슴에 북받쳐 오르며 울음만이 나옵니다. 남형도 역시 나와 같은 모양입니다. (생략) 우승했다고 반겨하는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라고 겨우 소감을 이야기했다.
2. 열광하는 조선
손기정과 남승룡의 마라톤 제패로 조선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2002년에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고, 2010년에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와 같은 현상이 1936년에 이미 일어났었다. 손기정이 나온 신의주제일보통학교 학생 600여 명은 깃발을 들고 신의주 시내를 행진했다. 각지에서 성금이 모이고 기념관을 짓자는 얘기도 넘쳐났다. 아이들은 손기정을 본받아 뛰기 시작했다. 시인 심훈은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에서 전세계의 인류에게 아직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 테냐고 격정을 토해냈다.
지금처럼 다양한 매체가 없던 시절 올림픽과 관련된 주요한 소식은 신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이나 『경성일보』 같은 일본어 신문의 구독자도 많았지만, 조선인들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를 애독하였다. 일본어 발행 신문들은 일본인으로서 손 기테이(손기정의 일본어 발음)를 칭송하였다. 반면에 『동아일보』 등은 세계 유수의 민족과 겨루어 당당히 우승한 ‘조선인’ 손기정을 강조하였다. 당시 한글 신문들의 보도를 위태하게 주시하던 조선총독부 검열 당국자의 보고서에서도 그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손기정이라는 인물이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자 한글 신문 각지는 미친 듯 기뻐하며 이를 ‘우리의 승리’라고 보도하였고 민중은 이에 자극받아 민족의식이 자못 대두하였다. 혹은 조선인의 조선으로만 기념체육관을 설립하려고 계획하고 혹은 손기정 등의 학비를 부담하겠다고 하고 혹은 그에게 금품을 수여하겠다고 하는 자 등이 속출하였으며 신문은 다시 이를 기특한 행위라고 해서 대서특필하는 등 열광적 태도를 보이기에 이르렀다. 애초 손기정의 우승이란 것은 일본제국의 선수로서 출장한 것으로서 일본과 조선이 함께 축복할 것이므로 조선과 일본의 대립은 결단코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감정상 다소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인정하여 신문의 검열을 행할 때도 특별히 심하게 내선융화를 해치지 않는 한 관용의 태도를 취하여 앞의 ‘우리의 승리’ 같은 것도 불문에 부쳤다.
3. 조선중앙일보의 은밀한 일장기 말소
신문들은 손기정의 성장과 운동 경력,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로 지면을 채웠지만 정작 시상식 장면 사진을 구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이메일로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찍고 현상한 사진은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 동맹통신이 현지에서 전송한 원본 사진은 선명했지만 조선의 신문에 게재된 사진들은 어찌된 까닭인지 매우 흐릿했다.
8월 13일에야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이 처음으로 조선의 신문에 등장하였다. 사진 1)은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조간 4면 우측 하단에 실렸다. 우승한 손기정은 시상을 끝낸 뒤 월계관을 썼고 2위 입상자에게 시상하는 장면이다. 얼굴도 자세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데 가슴에 아무런 표식도 없다. 이 사진만 처음 보면 원래 일장기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붓으로 일장기를 지운 흔적이 있는 사진을 체육부의 유해붕이 전달했지만 사진부 기자도 모른 척 넘어갔다. 총독부의 검열 담당자도 모르고 넘어갔다.
『동아일보』도 이 사진을 실었지만 모호했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13일자 조간 7면을 올림픽 관련 화보 5장으로 채웠다. 첫 번째 사진은 월계관을 쓰고 표창대(시상대) 위에 오르는 손기정과 남승룡으로서 가운데에 실었다. 두 번째는 제1회 그리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로서 성화봉송의 최종 주자인 루이스 옹의 도착 모습이었고, 세 번째는 시상식 아래 사진으로서 일등으로 도착 테이프를 끊는 손기정이었다. 네 번째는 독일 총통 히틀러의 입장 장면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단 전면 사진은 올림픽 입장식 장면이었다.
첫 번째 사진은 『조선중앙일보』와 출처가 같았다. 흐릿해도 손기정과 남승룡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알아볼 수 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2면에 손기정의 마라톤 선수로의 성장 과정을 소개하면서 손기정만 클로즈업 한 사진을 실었다. 이 사진에서는 7면과 달리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일장기의 상징인 붉은 원의 존재를 거의 알아차릴 수 없다. 국기를 나타내는 직사각형의 흔적도 흐릿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문 제작에 관여한 기자나 공장 직원의 ‘민족의식’의 발로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인쇄상의 실수였는지 알 도리가 없다. 『조선중앙일보』의 사진도 넘어간 마당에 2면과 7면에 걸쳐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에서 ‘불순한’의도를 읽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4. 동아일보의 대담한 일장기 말소
동아일보사는 1936년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부민관(지금의 서울특별시의회)에서 구독자를 위한 올림픽 활동사진 상영회를 개최한다고 지면을 통해 공지하였다. 체육부 기자였던 이길용은 25일자 석간에 실릴 손기정 관련 기사에 사용할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입수하였다. 그것은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의 남선판(南鮮版)과 조선서북판(朝鮮西北版)에 실린 사진이었다. 뒷날의 기록이지만 이 무렵 이길용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회고가 있다. 요즘 표현으로 바꾸었다.
저희(일본-인용자)가 세계 올림픽에 처음으로 진출하던 24년 전 마라톤으로부터 내리 마라톤에는 꼭 우승한다고 버티고 덤비다가 이루지 못한 숙망(宿望)을 우리 손 선수가 우승을 하고 나니 그제부터는 그다지도 낯간지럽게 ‘20여 년의 숙망 달성! 우리들의 손 선수 당당 우승!’ 이러한 제목이 일본어 각 신문에 대서특필하는 꼴을 볼 때 어찌 민족적 충격과 의분이 없겠는가
오랫동안 민족 차별을 하다가 손기정 선수가 막상 우승을 하니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우승으로 대서특필하는 모양을 도저히 참고 보기 어려웠다는 회고였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이길용은 화가이자 사진부 기자였던 이상범에게 사진을 넘기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흐리게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반면에 이상범은 이길용에게 일장기를 지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회고하였다. 악랄한 고문을 동반한 취조였기에 관련자들의 엇갈린 진술은 다반사였다. 우선 경찰이 정리한 보고서를 인용해보자.
이길용은 8월 23일 오후 5시경 동아일보사가 같은 날 25, 26, 27일의 3일간에 걸쳐 경성 부민관에서 독자 우대 올림픽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계획 발표 기사를 게재하고 그 다음 란에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하고자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소재한 손의 사진을 오려내어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그 손 선수의 사진을 24일 석간에 게재할 예정이니 “그 흉부에 나타난 일장기를 흐리게 수정하여 달라”고 명하자 이는 이를 승낙하여 『오사카아사히신문』을 오려낸 원화에 착색을 한 다음에 이를 사진과장 신낙균에게 제출하였다.
동아일보사의 독자 사은 상영회 날짜는 실제 26일부터 시작하였는데 보고서는 25일부터 시작했다고 하여 사실과 다르다. 취조를 통해 얻은 경찰 보고서라고 해서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보고서를 보면 일장기 말소 사건에는 이길용과 이상범 외에도 여러 명이 연루되었다. 보고서의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럴 즈음 편집국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 반경 사진부실에 들어와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부원 서영호를 만났다. 장용서는 서영호에게 이상범이 흐리게 한 것만으로는 아직 일장기가 남아있다면서 이를 충분히 지울 것을 잊지 말라고 다짐을 한 다음에 나갔다. 서영호는 아연판에 돌출된 손기정의 사진에서 가슴에 나타난 일장기 부분에 다량의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하여 지우고 인쇄부에 돌려 신문 석간에 게재한 것이 판명되었다.
경찰의 취조서가 남아있지 않아서 어떻게 장용서가 이길용과 이상범의 일장기 말소 사실을 알았는지 알 수 없다. 아직 신문이 발간되기 전이어서 지면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미 동아일보 사내에 은밀하게 ‘거사’ 내용이 돌아서 사실 확인차 장용서가 사진부실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장용서가 막상 눈으로 보니 미흡하다고 여겨서 이왕이면 더 확실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했을 수 있다. 누가 누구에게 명령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진과장 신낙균과 부원인 서영호가 동의하고, 서영호가 실행에 옮겼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8월 24일에 발행된 25일자 석간 1판에는 일장기가 선명한 사진이 그대로 실리고, 석간 2판에 일장기를 지운 흔적이 선명한 손기정의 시상식 사진이 게재되었다. 석간 2판에 이어 바로 나온 25일자 조간 8면에 게재된 마라톤 입상자의 사진 속에서는 손기정과 남승룡의 일장기가 선명하게 인쇄되었다.
5. 조선총독부의 탄압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을 본 조선총독부의 검열 당국자는 바로 대응에 나섰다. 연행은 8월 24일 밤부터 시작되었다. 첫 연행자는 신문 편집과 사진 담당자들이었다. 임병철과 백운선을 비롯해서 모두 11명이 차례로 경기도경찰부로 연행되었다. 연행자 중에는 실무자 외에도 사회부장 현진건, 사진과장 신낙균, 잡지부장 최승만, 잡지 『신가정』의 편집 책임자인 변영로 등도 포함되었다. 경기도경찰부는 27일 정오 무렵에 이길용을 소환하여 조사하고, 오후에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경찰은 약 이틀 동안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고 연행자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였다. 먼저 이상범은 구타와 물고문 등 자신 외에 동료들이 당한 고문도 회고하였다.
나는 원체 체약(體弱)해 보인 까닭인지 그놈들에게 두 번 몹시 악형을 당한 뒤로는 큰 악형은 아니 받았으나 장용서, 이길용, 서영호 씨 등은 죄(罪)물(냉수를 네다섯 ‘빠께쓰’를 먹었다는 것)도 켜고 격검(擊劍)대로 맞기도 하고 그놈들이 타고 올라앉아서 짓누르는 것도 당하고 이놈저놈의 발길에 죽게 채이기도 하고 따귀 맞기, 귀 붓잡고 매미 돌리기 등 갖은 악형을 당하였다.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 백운선도 단지 사진부원이라는 이유로 자백을 강요당했다.
사지가 멀쩡한 나의 몸에 쇠사슬이 칭칭 얼기어 잔인한 고문의 지옥 생활에 발버둥치던 실로 몸서리치는 저 – 일장기 말살 사건 – 손기정 군이 세계 마라톤에서 1위의 영관(榮冠)을 획득하였을 때의 그의 보도사진에 일장기를 말살하였다는 죄(?)로 당시 『동아일보』 간부들과 함께 구금되었을 때의 혹독한 고문, 취조야말로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리는 공포감을 억제할 수가 없다.
경찰이 연행자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해서 얻으려 한 것은 송진우 등 동아일보 고위 간부들의 지시 여부였다. 다시 말해 몇몇 기자 개인의 행위보다 동아일보사 자체의 행동으로 그림을 만들고 싶어 하였다. 경찰은 이길용에게 회사의 방침이 그렇지 않았느냐, 송진우 사장이나 김준연 편집국장이 시키지 않았으냐 등을 집요하게 캐묻고 답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실제 임원들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사진이 실린 사회면의 부장인 현진건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조사 결과를 발표한 직후인 8월 27일 오후 5시에 조선총독부는 송진우 사장을 경기도경찰부장실로 호출하여 무기발행정지, 곧 정간 명령서를 교부하였다. 지령 제3호의 문서에는 안녕질서를 방해하였기 때문에 신문지법 제21조에 따라서 1936년 8월 27일자로 발행을 정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어 배포 중이던 8월 28일자 석간도 대부분 압수하였다. 또 남승룡 선수 사진의 일장기가 말소되었다는 이유로 『신동아』 9월호를 압수하고 10월호 이후를 무기정간 시키고, 『신가정』에는 부분 삭제 처분을 내렸다.
다음은 미츠하시 코이찌로(三橋孝一郞) 경무국장이 밝힌 담화문이다.
『동아일보』는 금회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였다.
전일 백림(베를린-인용자)에서 개회된 세계 올림픽 대회의 마라톤 경기에 조선 출신의 손기정 군이 우승의 월계관을 획득한 것은 일본 전체의 명예로 일본 내지와 조선이 함께 축하할 것이며 또 일본 내지와 조선 융화의 자료로 할 것이지 이를 역이용하여 조금이라도 민족적 대립의 공기를 유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신문지 등의 기사는 자칫하면 대립적 감정을 자극함과 같은 필치를 취하는 것이 있음은 일반으로 유감하던 바이다.
『동아일보』는 종래 누차 당국의 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월 25일 지상에 손기정 군의 사진을 게재하였는데 그 사진에 명료하게 나타나야 할 일장기의 마크가 고의로 말소한 형적(形跡)이 있었음으로 즉시 차압 처분에 부치고 그 실정을 조사하였는데 위는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에 게재된 손기정 군의 사진을 전재하면서 일장기가 신문 지상에 나타남을 기피하여 고의로 기술을 사용하여 이를 말소한 것이 판명되었음으로 마침내 그 신문지에 대하여 발행정치 처분을 내리게 되었다.
경찰은 『동아일보』를 수사하면서 다른 신문도 조사하였다. 시상식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을 실은 사진은 『동아일보』 외에 『조선중앙일보』 뿐이었다. 『동아일보』 조사와 정간 처분이 끝난 후인 9월 1일 『조선중앙일보』 기자 유해붕이 경찰에 소환되었다. 유해붕 자신도 곧 끌려갈 것으로 예상했었다고 한다. 경찰의 취조가 진행되는 동안 『조선중앙일보』도 자체 조사를 벌여서 8월 13일자 사진의 일장기를 지운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에 『조선중앙일보』는 9월 5일자 석간에서 당국의 처분이 내리기 전에 자진 휴간을 선언하였다. 『동아일보』처럼 무기 정간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피해를 최소로 줄이려는 전략이었다. 아래는 「사고(社告)」의 전문이다.
이번에 동업 『동아일보』는 손 올림픽 선수 우승한 사진을 지상에 게재할 때 일장기 마크를 기술로서 지워 게재한 일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발행정지 처분의 제재를 받기에 이르렀으나 이런 일은, 실로 유감 천만의 일로 생각한다. 본사도 이러한 일은 전혀 없으리라고 믿었지만 『동아일보』와 같은 손 선수의 일장기 마크를 말소하여 게재한 혐의가 농후해서 드디어 관권이 발동되고, 사원 몇 명이 당국의 엄중한 취조를 받기에 이르렀음은 실로 공구불감(恐懼不堪)한 소이이다. 이에 본사는 취조 결과의 판명을 기달려 그 책임 소재를 규명함은 물론이요 당국의 처분이 내릴 때까지 근신하고자 5일자 조간부터 당분간 휴간한다. 다시 속간하는 날에는 갑절의 애독 있으시기를 바람.
6. 일장기 말소 사건의 파장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총독부에게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주는 격이었다. 총독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글 신문들을 당국의 통제 아래 두고 싶었지만 문화정치의 산물인 한글 신문에게 강경책으로만 대응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신문사를 강하게 압박할 빌미를 얻은 것이었다. 게다가 8월 25일은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이 새로 부임하는 날이어서 핑계도 좋았다. 미나미 총독은 전임자들과 달리 민족말살정책으로 불리는 황국신민화정책을 강요한 총독이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도 미나미 총독 재임 때에 일어났다.
총독부는 자신들이 부적당하다고 판단하는 『동아일보』의 간부와 사원, 사건 책임자 모두를 면직시키고, 같은 회사 내의 다른 직무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면직된 사람들은 사장 송진우, 부사장 장덕수, 영업국장 양원모,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조사부장 이여성, 지방부장 박찬희, 잡지부 주임 최승만, 운동부장 이길용, 사진과장 신낙균, 사회부 기자 현진건과 장용서, 사진부원 서영호 등 모두 13명이었다.
동아일보사의 핵심 사원을 쫓아낸 총독부의 구체적 요구는 ‘지면의 철저한 개혁’과 ‘인사개혁’이었다. 전자는 18개항의 검열 사항을 나열한 「언문지면 쇄신요항」의 수용이었다. 후자는 총독부의 입맛에 맞는 사장을 선임하여 인사를 ‘개혁’하고 그들을 통해 지면도 ‘개혁’한다는 계획이었다.
비록 강제로 사직했지만 동아일보사에서 송진우의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신문사의 소유주인 김성수는 송진우를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다. 송진우는 일장기 말소 사건을 듣고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高樓巨閣)을 태워버렸다”고 이길용을 질책하였다. 이길용의 제의에 적극 동참한 기자들과 다른 반응이었지만 신문사의 경영을 책임지는 사장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여지도 있었다. 실제로 송진우는 정간이 해제되는 1937년 6월까지의 10개월 동안 총독부와 피말리는 신경전을 벌였다. 총독부가 사장으로 추천하는 친일파를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을 사장으로 밀었다. 동아일보사는 정간을 넘어선 폐간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37년 6월 2일자로 총독부의 요구를 수용하여 신문사의 운명을 연장하였다.
한편 자진 휴간에 들어갔던 조선중앙일보사는 한 달 정도 쉬고 복간할 계획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 총독부가 속간을 허락하지 않아서 ‘반강제적’인 휴간이 계속되었다. 신문을 발간할 수 없게 되면서 그러지 않아도 어려웠던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경영권을 둘러싸고 신문사에 내분이 발생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휴간에 따른 사장 여운형의 사퇴를 둘러싼 찬반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조선중앙일보』의 진로에 대한 충돌이었다. 한쪽은 새로운 자본을 투입하여 신문기업으로서 위치를 탄탄히 하기 위해 총독부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여운형 등은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 의사를 최소한이라도 표현할 수 없다면 “『조선중앙일보』의 사명이 다했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여운형은 상황을 주도할 수 없었지만 속간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중앙일보』의 역사성을 지켰다.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11월 5일자로 신문지법에 규정된 발행허가 효력이 상실됨으로써 폐간되었다.
7. 일장기 말소 사건의 독립운동가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두 신문사의 기자들은, 한 달 이상의 구류와 심한 고문으로 고생했지만 형사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없는 죄도 만드는 고등경찰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장기를 지운 행위를 처벌할 적당한 법령이 없다는 이유였다. 다수의 언론인이 고통을 받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특별히 기억해야 할 세 사람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하였다.
이길용은 1899년 8월 15일에 인천에서 태어났다.(본적은 서울 종로 명륜동) 인천의 4년제 사립 영화학교를 거쳐 1916년 3월에 배재학당 본과를 8회로 졸업하였다. 대전역 개찰계에 근무하던 1920년 2월 29일 「대한독립 일주년 기념 축하경고문」을 동료에게 배포했다가 검거되었다. 같은 해 12월 22일에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서 1919년 제령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가 1921년 6월에 출옥하였다. 이후 철도국에 복직하는 한편 동아일보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대전 지역의 체육활동에 선수와 심판으로 참여했다. 1921년 9월 무렵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채용되고 1923년 3월에는 대전체육회 서무 겸 연구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대전의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6월부터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제물포청년회 회장을 맡는 등 인천의 다양한 사회활동에도 관여했다. 1924년 가을부터 1927년 여름까지 조선일보의 특파원 기자이자 체육 전담기자로 활동했다. 1927년부터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면직될 때까지 동아일보에서 체육(운동) 기자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대한체육사』 집필에 몰두했지만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송진우는 1890년 5월 8일에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1906년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에서 석 달간 수학할 때 인촌 김성수를 만났다. 1908년 11월 일본 유학을 떠나 세이소꾸(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고 1909년 4월에 긴죠(錦城)중학교 5학년에 편입하였다. 1910년 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했다가 1911년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로 옮겨 1915년 7월에 졸업하였다. 귀국 후 중앙학교의 학감으로 일하다가 1918년 3월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기획자 중 한 사람으로서 체포되었다가 10월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21년 9월부터 1924년 4월까지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는 동안 민립대학발기인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4년 10월에 동아일보 고문, 1925년 4월 주필을 거쳐 1927년 10월부터 1936년 8월까지 다시 동아일보 사장으로 재직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12월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 사장으로 활동하다가 12월 30일에 암살당하였다.
여운형은 1885년 4월 24일에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1900년부터 1904년까지 배재학당, 흥화학교, 우무학당 등에서 배웠다. 1906년 양평의 묘곡리 자택에 교회와 광동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 곽안련 선교사의 조사로서 서울 승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평양신학교를 다녔고, 1914년 말에 중국 난징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7년 봄에 교포들의 자녀를 위해 인성학교를 설립하고 1918년에 상하이 교포들의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11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김규식을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12월에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11월에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0년 5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1921년 5월 중한국민호조사 총사를 조직하였다. 1929년 7월 상하이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930년 6월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32년 7월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1933년 2월 중앙일보(이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1936년 9월까지 재직하였다. 1942년 11월 일본 패전을 이야기했다가 체포되고 1943년 7월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45년 해방 직전에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8월 16일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조선인민당을 조직하였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주력하였고, 10월에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다. 1947년 7월 19일에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이길용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송진우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여운형 선생에겐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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