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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2005년

주요공적

1926년 순종 승하 이후 6.10투쟁특별위원회 조직하고 만세운동 준비 중 체포

193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권오설 / 이선호 / 박내원 / 이동환

권오설 權五卨 ,1897.11.25~1930.04.17. 경상북도 안동 , 독립장 2005 이선호 李先鎬 ,1904.05.29~1950.07.01. 경상북도 안동 , 애국장 1991 박내원 朴來源 ,1902.03.05~1982.02.17. 서울 서울 , 애족장 2005 이동환 李東煥 ,1901.01.09~1982.06.23. 전라북도 정읍 , 애족장 199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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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6․10만세운동의 역사상

융희황제(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는 장례 행렬이 지나는 연도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와 철통같은 감시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가장 놀란 것은 조선총독부였다. 7년 전 3·1운동으로 총독이 파면되고, 식민지 통치방식을 수정할 만큼 충격을 받았던 일제는 융희황제 승하 전후 3·1운동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폭압적 탄압으로 민심을 억눌렀다. 이런 와중에 융희황제가 1926년 2월 위독한 상태에 이르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4월 25일 오전 6시 승하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전국 각처에서 1만여 명의 군대를 집결시켜 서울 시내를 포위하고, 무장력을 배치하는 등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융희황제가 승하하기 전인 4월 23일에는 돈화문 앞에 임시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일경·기마 순사·헌병 2백여 명을 배치하는 한편 3·1운동의 진원지였던 탑골공원에는 중무장의 기관총 소대를 배치하며 공포감을 높였다. 그것도 모자라 각도에서 3천 5백 명의 경찰을 차출하고, 헌병대사령부는 나남, 함흥, 평양 등지에서 헌병을 동원해 비상경계에 나섰다. 인산일 당일에는 인도에 기마경찰, 헌병, 정사복 경관 등을 총검으로 무장시켜 물샐틈없는 경계를 펼쳤다.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죽산마와 죽안마)ⓒ독립기념관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죽산마와 죽안마)ⓒ독립기념관

그런 경계와 감시망을 뚫고 일어난 것이 인산 당일의 만세운동이었다. 일제의 충격은 조선총독부를 넘어 일본 본국으로까지 파급됐다. 일본의 식민주의자들조차 6·10만세운동이 그간의 식민지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명백히 보여준다며, 조선총독부를 질타했다.

당초 조선총독부는 그 뿌리까지 찾아 관련자들을 ‘엄벌’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5, 6백 명의 학생을 모두 구속 조치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그렇게 되면, 식민지통치의 부당성만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라는 자기모순에 빠지며, 결국 11명의 학생만 재판에 회부해 ‘사건’을 크게 축소시켰다. 6․10만세운동을 계획·추진했던 조선공산당과 천도교계열의 인사들은 학생들의 만세운동과 별개로 처리하는 편법을 동원했다. 융희황제 인산일에 울분과 감정을 이기지 못한 소수 학생들이 ‘감상적’ 민족의식에 빠져 일으킨 만세소요로 ‘사건’을 마무리하려한 것이다. 6·10만세운동에 대한 왜곡은 안타깝게도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6·10만세운동의 역사상을 제대로 세울 수 없었다.

6·10만세운동의 총본부인 ‘대한독립당’은 종교계, 사회주의, 민족주의, 학생, 청년 등의 세력을 망라한 명실공히 민족협동전선체를 지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6·10만세운동 계획이 거사 직전 6월 6일 발각되면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계열의 조직이 먼저 파괴되고 말았다. 위기 상황에서 체포망을 피한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추진되었으니, 인산 당일의 만세시위가 그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의 지도부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언서인「격고문」에서도 3․1운동을 시원(始原)으로 표명하듯이,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거행한 ‘제2의 만세운동’이었다.

6․10만세운동이 3·1운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운동의 추진 배경이나 주체, 이념, 성격 등에서 3․1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었다. 3․1운동이 1차 대전 후 인도주의가 부상하면서 세계 개조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가 공고해지며 국제적으로 고립된 처지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그만큼 6·10만세운동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힘들고 어려웠다.

운동의 주체들도 3·1운동 때와는 세대를 달리했다. 3·1운동에서 전위를 담당했던 학생계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중심 주체로 나선 것이다. 그에 따라 운동의 이념도 다양해졌다. 3․1운동의 지도 이념이 자유주의 사상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민족독립으로 모아지면서 이념적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3·1운동에서 종교이념을 초월했다면, 6·10만세운동에서는 정치이념까지 초월하는 민족통합을 추구한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발전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 본론

2-1) 상해지역에서의 6․10만세운동 계획

6․10만세운동은 중국 상하이에서 처음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계획되어졌다. 임시상해부는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일 대중시위를 계획하고, 4월 중순 김단야를 중국 안동현과 국내에 파견했다.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 신의주에 잠입해 국내 거사를 준비하던 김단야는 융희황제의 서거 소식을 접하였다. 융희황제 승하에 대한 애도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도 목격했다. 일제가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전면 탄압하는 상황에서 5월 1일 김단야와 권오설이 만나 만세운동의 투쟁 방법이 수정되어 간 것이었다.

김단야는 상해로 돌아와 조봉암․김찬 등과 함께 「복상 통곡하는 민중에 격함」이란 격문을 작성한 뒤 최창식이 경영하는 상해의 삼일인쇄소에서 5천 매 정도를 인쇄하여 서울로 보냈다. 이 격문은 안동에 5월 28일경 도착한 뒤 예정대로 삼성운송점에서 서울로 부쳐졌다. 그러나 서울역에 도착한 격문은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의 계획이 발각되는 것과 함께 국내의 인사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압수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선언서의 인쇄가 임시의정원 의장 최창식이 경영하던 삼일인쇄소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삼일인쇄소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하던 곳이었다. 삼일인쇄소의 최창식과 임시상해부의 여운형, 김단야 등은 이전부터 긴밀한 사이였다. 1921년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결성 때 동지적 관계를 맺으며, 1926년 2월에 주의자동맹을 결성한 바 있으며, 5월에는 독립운동촉진회에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삼일인쇄소에서 격문을 인쇄하였다는 사실은 6·10만세운동의 계획․추진에 대해 임시정부 인사들과 사전 교감 내지는 양해가 이뤄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무렵 임시정부가 최창식 대행체제로 운영됐던 점으로 볼 때, 6·10만세운동의 계획에는 임시정부의 인사들과도 교감을 나누었을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6·10만세운동 계획에 직접적으로 나설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융희황제의 승하에 대한 상해지역 민족혁명세력의 관심이 지대했던 점을 감안할 때 6·10만세운동의 계획은 임시정부 인사들과도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병인의용대가 융희황제의 인산에 맞추어 국내 의거를 계획․추진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병인의용대는 1926년 1월 상해에서 결성된 의열투쟁 단체였다. 노병회, 의열단, 정위단 등을 기반으로 조직된 병인의용대는 일제의 기관파괴, 일제의 밀정, 주구배, 주요 요인 등에 대한 처단 등을 주요 활동 지침으로 삼고 있었다. 병인의용대는 국내 및 만주의 독립군 단체와도 연계하면서 국내에서 의거를 도모하고 있었다. 병인의용대장 나창헌은 융희황제 승하 직후인 4월 말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5월 9일에는 최고간부회의에서 융희황제 국장을 기해 거사를 단행하기로 최종 결의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총독과 같은 일본 대관의 처단이었다. 대원 4명이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6월 1일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권총 2정과 빵 속에 숨긴 폭탄 2개, 다수의 격문을 소지하고 중국 상선 순천호에 승선했다가, 황포탄 하류에서 사전 정보를 탐지하고 있던 일제의 수상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2-2) 국내에서 일어난 송학선의거

융희황제 승하 후 최초의 항일 의지는 송학선(宋學先)의 금호문(金虎門) 의거로 나타났다. 4월 28일 오후 1시 10분경 금호문 앞에서 송학선이란 청년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을 처단하기 위한 의거를 단행한 것이다. 순박한 시골 청년인 송학선은 수년 전부터 일제 식민지 권력의 상징인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뜻을 세운 바 있었다. 그는 의거 3년 전부터 안중근(安重根) 의거를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기회를 기다리던 터였다. 4월 28일 조문을 위해 사이토 총독이 온다는 정보를 접한 송학선은 금호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경성부협의회 의원 사토 토라지로(佐藤虎次郞)를 조선총독으로 잘못 알고 의거를 결행한 것이었다. 송학선 의거는 당초 목표인 사이토 총독 처단에는 빗나갔지만, 망국의 통한에 젖어 있던 한국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통쾌한 쾌거였다. 그가 “나는 주의자(主義者)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여 마땅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겠다”고 했다.

2-3) 국내의 투쟁지도부와 권오설

6·10만세운동의 계획을 구체화시킨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계획 초기부터 천도교를 가장 유력한 제휴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투쟁지도부는 6·10만세운동의 거사를 위해 천도교 세력과 연대를 모색해 갔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와의 연결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과 박내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은 경북 안동 풍서면 가곡리에서 출생했다. 안동의 전통적 반촌에서 성장한 그는 대구고보를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가 중앙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마치지 못했다. 3․1운동 참가 이후 그는 고향에서 학술강습소를 개최하면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의 활동에는 안동의 민족지도자 유인식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교육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적 수탈과 식민지 수탈의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던 농민의 현실을 직시하고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곡농민조합을 시작으로 전개한 그의 농민운동은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으로 본격화되었다. 그는 이준태․김남수 등과 만나며 식민지 사회모순을 깊게 자각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 풍산소작인회는 5천여 명의 규모로 전국 유수의 농민조직으로 성장하였다. 권오설의 중앙 진출은 안동에서의 운동 경험과 기반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중앙에 진출한 이후에도 권오설은 중앙과 연계하며 안동의 대중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발전시켜 나갔다.

6․10만세운동에서 권오설은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다. 운동의 추진 과정이나 모든 계획이 그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었다. 권오설은 공산청년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안동 출신의 이선호, 유면희, 권태성, 권오상 등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연희전문학교와 중앙고보 등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해 갔다. 그가 작성한 「격고문」의 사상적 성향은 1920년대 초 극단의 계급지상주의를 극복하고 있었으며, 민족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이 민족혁명을 위해 결합된 이념과 노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출옥을 얼마 앞둔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4) 천도교의 참가와 박내원

박내원(朴來源, 1902∼1982)은 동학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박광호는 동학의 지도자로 1893년 2월 교조신원운동 때 소두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천도교 교주 박인호는 재종숙(再從叔)이며, 박인호의 아들 박래홍은 삼종형(三從兄)이 되는 사이였다. 박래홍은 그에게 절대적 후견인이었다. 그는 박인호의 도움으로 보성학교를 거쳐 종로기독교청년회에서 수학했으며, 1920년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청년동맹이 분리될 때 박래홍과 함께 천도교청년동맹의 창립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는 천도교 청년계에서 활약하는 한편 박래홍의 후원에 의해 사회주의운동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대일인쇄기계회사에 다니던 중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한 그는 경성노동연맹, 인쇄직공조합연맹, 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 등의 인쇄직공 계통과 화요회 계열의 청년·사상단체에서 활발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오설과는 깊은 동지적 관계를 이루었으며,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의 양 세력을 연결하는 매개 고리로 역할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계획 추진한 메이데이 기념시위에도 깊숙하게 관계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1926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해 국내의 사회단체와 연대하여 대대적인 시위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으며, 표면으로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앞세워 기념시위를 전개하고자 했다. 이때 박내원은 조선노농총동맹의 핵심 간부로 기념시위의 제반 준비를 담당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박내원은 권오설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임무 부여와 함께 가장 먼저 권동진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교주 박인호와 이종린·박래홍 등에게도 알렸다. 이들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격문에 사용한 인장을 박인호 교주의 집에 묻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같은 배경 아래 이해될 수 있다. 거사일이 임박해 오는데 자금이 없어 격문을 배포하지 못할 때 박내원이 권동진에게 1만 원의 자금을 요청하니 흔쾌히 수락했다는 사실, 인쇄한 격문을 천도교당 내에 감춰 둘 수 있었던 것, 만세시위에 천도교의 지방조직을 적극 활용하려 했던 사실 등은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들이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적극 지원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박내원은 거사에 따른 모든 일을 절대 비밀리에 진행토록 지시를 받았다. 천도교는 3·1운동을 주도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천도교 교단의 재산이 일제에게 압수되었고, 지방 교구와 전교실이 폐쇄되기까지 하였다. 이 무렵 천도교는 신·구파 분화로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파의 인사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할 경우 또다시 옥고를 치를 것은 뻔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구파 세력은 붕괴되고 말 형편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은 일선에 나서지 않은 채 배후에서 청년세력의 활동을 지원하는 정도에서 참여하였으며, 지원 사실도 절대로 비밀에 부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박내원은 천도교연합회측의 이상우와도 접촉하면서 만세운동에 대한 협의를 나누기도 하였다. 천도교의 혁신세력과 연결되었던 이상우는 최동희 등과 동지적 유대를 맺으며 자금조달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이상우가 6·10만세운동에 사용할 격문을 건네받았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만세운동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박내원은 자금 조달 내지는 조직 동원과 관련하여 천도교의 혁신세력 인사들과도 폭넓게 연대를 모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박내원을 중심으로한 천도교 측의 주요 임무는 격문 인쇄 및 배포와 지방 조직의 활용을 통한 만세운동의 확산에 있었다. 비록 천도교 구파의 세력이 신파에 비해 열세였고, 천도교청년동맹이 생긴 지 얼마 안 됐다고는 하나 천도교의 조직 기반은 전국적이었으며 세력 규모도 민족세력 중에서는 여전히 유력한 것이었다. 박내원은 천도교청년동맹과 인쇄직공조합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동지 규합에 나서 손재기·백명천·양재식·민창식·이용재 등을 포섭했다. 손재기는 의암 손병희의 종손으로 당시 개벽사 제본부원으로 근무하면서 박내원과 함께 천도교청년동맹을 주도한 인사였다. 백명천은 천도교인으로 명심당이라는 작은 인쇄소 겸 인장포를 경영하고 있었다. 보성고보 출신의 양재식 역시 천도교인으로 경성인쇄직공조합의 집행위원을 맡고 있었다. 민창식은 1925년 3월 박내원 등과 서울인쇄직공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용재는 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쇄소 해영사에서 일하면서 신흥청년동맹, 연우사, 신흥청년사 동인으로 활약했다.

박내원은 권오설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인쇄에 필요한 소형 인쇄기 2대와 용지 20매, 활자, 기타 필수품을 구입해 인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들이 인쇄에 착수한 것은 5월 15일경 권오설에게서 격고문과 전단의 원고를 받고서 5월 17, 8일부터였다. 처음에 이들은 안국동 36번지 백명천의 집을 거점으로 삼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문을 인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웃에서 위조지폐를 제조한다는 소문이 돌자 5월 27일 경에 인쇄기를 몰래 민창식의 집으로 옮겨 5월 31일까지 약 5만 매의 격문 인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쇄가 완료된 격문은 비밀을 보존하기 위해 석유상자 등에 나누어 넣은 뒤 경운동 88번지 천도교당 안에 있는 손재기의 집에 숨겨 두었다.

박내원은 인쇄 작업이 진행 중이던 5월 23, 24일경 백명천에게 ‘대한임시정부인’과 ‘대한독립당’ 등 2개의 인장 조각을 부탁하여 그 중 ‘대한독립당’은 격고문 1만장 가량에 날인한 뒤 불태워 소각했고, 나머지 대한임시정부인은 동대문 밖 상춘원 내 천도교 박인호 교주의 집에 숨겨 두고 있었다.

박내원과 관계자들은 격문의 지방배포와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세워놓고 있었다. 우선 격문은 지방의 조선일보 지사, 개벽지사, 소비자조합, 천도교 교구, 기타 청년단체 등에 보내기로 하고 발송 지역을 정하였다. 격문의 송달 방법은 『개벽』, 『신민』, 『신여성』 등의 잡지에 약간 매를 넣어 보낼 계획이었다. 이들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하여 파견하기로 하였다. 전국을 철도선에 의해, 호남선·경부선·경원선·경의선 방면 등 4개 지역으로 나누고, 박내원은 호남선 방면과 경부선 방면의 중심지인 대전, 민창식은 경의선 방면의 중심지인 사리원이나 경원선 방면의 중심지인 원산을 근거로 활동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을 기해 배포할 계획이었다. 천도교청년동맹원을 통한 지방 확산 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6일 계획이 사전 발각되고 말았다.

2-5) 사전 발각과 일제의 탄압

상해의 김단야로부터 6월 초까지 오기로 한 격문과 자금 전달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박내원은 권동진에게 자금 요청을 하여 1만 원 가량의 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기다리던 중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만세운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었다.

1926년 5월 일제는 중국인 위조지폐범이 일본 오사카에서 서울로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1926년 6월 4일 도렴동 50번지 이동규의 집을 수색하던 중 화장실에서 위조지폐와 더불어 대한독립당 명의로 된 격고문 1매를 발견한 것이다. 수사망을 좁혀간 일제는 결국 이상우를 통해 안정식에게 건네준 것이 다시 이동규에게 건네진 경로를 밝혀내고 이상우의 처인 고우섭이 근무하는 개벽사를 급습한 것이었다.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행렬이 청량리를 통과하는 모습)ⓒ독립기념관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행렬이 청량리를 통과하는 모습)ⓒ독립기념관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계통의 거사 계획이 인산을 불과 4일 앞두고 발각되자, 일제는 모든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여 다른 거사의 움직임을 대비한 철통같은 경계를 펼쳐 나갔다. 사상단체, 종교단체, 학교 등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검속을 단행했다. 서울역, 용산역, 청량리역과 여관 음식점 등에 이르기까지 출입자에 대한 검문 검색도 강화해 갔다.

천도교 인사들은 박내원을 비롯하여 천도교당 현장에서 50여 명이 체포된 데 이어 발각 당일에만 천도교 간부와 개벽사 인사 80여 명이 체포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사회단체에서 2백여 명이 검거되면서, 지방으로의 연락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6월 6일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계통의 계획이 발각되자 일제 당국의 관심은 천도교 진영의 동향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격문이 천도교 기관 잡지사인 개벽사에서 발각된 때문도 있지만, 3·1운동 때 천도교가 주도했던 경험도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2-6)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이선호

이선호(李先鎬, 1904∼?)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13대손이다. 그는 1921년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 속성과정을 거쳐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1925년 조선공학회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25년 9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창립할 때 사업부 책임자로 선임되었고, 1925년 11월에는 임시집행부 등에 선임되었다. 김태호, 손각모, 권오상 등과 함께 임시상무로 선임된 그는 윤번으로 숙직하면서 지방 학생들에 대한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병립과 함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한 6·10만세운동의 계획 주체로 활약했다. 이선호와 이병립 등은 학생 포섭의 역할을 맡으며 세칭 ‘통동계’와 연락을 취했다.

융희황제 승하 이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내에서는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조선공산당의 권오설과 연결되면서, 5월 상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해 갔다. 이때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는 인산 당일 가두 행렬의 선두에 서서 전단을 배포하고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만세운동으로의 불을 당기는 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의 점화역할을 맡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들은 서울지역 만세운동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협의했고, 서울지역 각급 학교의 대표들을 통하여 각 학교 학생들을 포섭해 갔다. 이 과정에서 ‘통동계’와도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거사 직전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면서 6․10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 계획이 좌절된 상황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당초 역할이었던 서울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독자적으로 결행하여 6월 10일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1926년 6월 10일 국장 행렬이 종로3가 단성사 앞을 통과한 뒤 동양루(東洋樓) 앞에 도열해 있던 이선호의 선창으로 중앙고보생 3,40명이 만세를 고창하면서 격문서 약 1천여 장과 태극기 30여 매를 살포하였다. 법정에서 이선호는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만세시위의 선봉에 나섰다고 했다. 이선호는 1927년 9월 20일 감옥에서 풀려난 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일경에 붙잡히는 일을 거듭하다가 1933년 귀국했다. 6·25전쟁 때 행불이 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6․10만세운동 준비 과정은 4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학생 80여명이 세검정으로 야유회를 가던 도중 융희황제의 승하 사실을 알게 된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제2단계는 이병립이 권오설을 통해 만세운동의 계획을 전달받은 5월 3일 경부터 5월 19일까지, 제3단계는 각급 학교 학생 40여 명이 박하균의 하숙에 모여 만세운동 계획을 협의했던 5월 20일부터 6월 5일까지, 제4단계는 조선공산당이 발각된 상황에서 만세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6월 6일경에서 의거 당일까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행렬이 돈화문 부근을 통과하는 모습)ⓒ독립기념관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행렬이 돈화문 부근을 통과하는 모습)ⓒ독립기념관

제1단계는 융희황제의 승하 사실을 접한 뒤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고, 각급 학생 대표들이 모일 것을 다짐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제2단계부터이다. 이병립이 권오설로부터 6․10만세운동의 계획과 투쟁 지침을 전해 들은 것은 5월 3일이었다. 이때 권오설은 6․10만세운동 계획과 투쟁 지침을 알리는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와 역할을 지시하였다. 6․10만세운동의 선봉 역할을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맡게 된 것이다. 이병립, 이선호, 이천진, 조두원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은 수차에 걸쳐 학생 동원 및 시위 방법 등을 숙의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워나갔다.

제3단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를 중심으로한 만세운동의 계획이 학생계로 파급되면서, 의거 준비가 성숙되어 간 과정이다. 5월 20일에 각급 학교 학생 대표 40여 명이 가졌던 모임에서는 의거의 투쟁 방법 및 자금 조달 등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이룰 수 있었다. 박하균, 박두종 등은 자금 조달의 책임을 맡고, 이선호와 이병립 등은 학생 포섭의 역할을 맡았다. 세칭 ‘통동계’의 학생들과 연결도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들 두 계열의 학생계는 비밀유지를 위해 거사를 각기 추진키로 하되, 거사 당일의 의거 장소를 안배하는 등 연대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제4단계는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이 발각된 상황에서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추진해 간 과정이다. 이전까지 만세운동의 계획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거사 당일에 필요한 격문, 선전문 등을 조선공산당에서 작성․인쇄한 것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획이 발각되기에 이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는 독자적으로 준비를 추진해 나갔다. 이때부터 태극기 2백 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제작하는 한편 이병립이 격문을 초안하여 인쇄에 들어가 주야로 6월 9일까지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할 수 있었다.

6월 9일부터는 학생들에게 격문을 배포하면서 인 산 당일의 만세시위를 추진해 갔다. 격문 배포는 주로 이선호와 박두종, 박하균 등이 맡아 우선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에게 할당되었다. 이들은 인산 당일에 혼란할 것에 대비하여 호루라기의 신호에 의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6․10만세운동의 시발점인 서울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2-7) 통동계와 이동환

통동계라 하면 일반적으로 박용규, 이동환,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 등 5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운동의 처음부터 거사까지 뜻을 같이한 동지였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운동을 추진해 갔는지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중앙고보와 중동학교의 학생들로서 하숙집을 공유하는 정도의 교우 관계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융희황제의 승하 소식을 들으며 항일투쟁에 대한 결심을 굳혔고, 그것을 민족적 사명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의지를 모았다. 이런 의지는 학생들의 특성이기도 한 순수성과 이상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통동계 학생들이 거사를 위해 가회동 취운정 문인근의 하숙에 모인 것은 5월 16일이었다. 이후 이들의 거사 추진 과정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거사 계획의 구상과 동지 포섭(5.16-5.25), 제2단계는 만세운동을 위한 격문 작성과 인쇄(5.26-5.31), 제3단계는 선언문 배포와 인산당일의 거사(6.1-6.10) 등으로 구분해 살필 수 있다.

제1단계는 이들이 인산일을 전후하여 거사를 하기로 원칙적 합의를 보았으나 구체적 투쟁방법에 대해서는 확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우선 이들은 서울의 각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때 지역을 둘로 구분하여, 이동환이 제일고보와 동쪽 방면의 학교를 맡고 김재문·황정환은 보성고보와 서쪽 방면의 학교를 맡기로 했다. 이들은 일주일 만에 5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할 수 있었고, 5월 23일에는 성북구 삼선평에서 축구시합을 위장하고 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때 투쟁방법에 대해 논의가 있었지만, 이동환의 격렬한 투쟁 방법에 대해 일동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헤어졌다. 이후 통동계 학생 5명은 회의를 거듭해 융희황제 인산일을 기해 3·1운동 때와 같은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제2단계는 거사에 필요한 격문을 작성하고 인쇄 작업에 집중하였다. 5월 26일에 황정환·김재문이 낙원동 255번지 김성기로부터 등사판을 빌려왔고, 이동환은 용지를 구해 왔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고향에서 보내오는 생활비의 일부와 외투, 책을 팔아 충당하기로 하였다. 5월 28일 이동환·김재문이 인쇄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고, 5월 29일 통동 71번지 김재문의 하숙에서 논의를 거쳐 공동으로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은 5월 31일까지 박용규의 하숙에서 5천여 매 정도가 인쇄되었다.

제3단계는 인쇄물 배포를 위한 동지 포섭 및 배포와 인산 당일의 거사로 이어진다. 5천여 매의 격문을 1인당 1천 매 정도를 맡아 포섭된 동지에게 배포하는 한편, 6월 8일과 9일에는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지방학교에 격문을 발송하면서 인산 당일의 거사를 추진했다. 이때는 권오설 등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일제의 경계와 압박이 극도로 가중되던 무렵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민하게 행동하면서 격문 배포와 발송을 마칠 수 있었다. 박용규는 중앙고보생 조홍제에게 격문 2백 매를, 휘문고보생 이상민에게 1백 매를 교부하였고, 이동환은 중앙고보생 최제민에게 4백 매를 교부하면서 인산 당일 만세제창을 권유하였다.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대여의 모습)ⓒ독립기념관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대여의 모습)ⓒ독립기념관

통동계의 운동이 갖는 의미는, 첫째, 조선공산당 · 천도교, 그리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계획 단계에서 일정한 연대를 이루었던 것과 달리,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해 갔던 점이다. 그리고 자생적으로 생겨났던 점이다. 독자적이고 자생적으로 대중적 만세운동을 구상하고 추진해 갔던 것은 6·10만세운동에서 귀중한 사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주체가 순연한 학생들이었던 점이다. 운동의 계획부터 선언문의 작성과 인쇄, 배포, 그리고 거사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운동은 자기 완결적 성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들의 운동이 일제에 의해 차단되지 않고 거사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거사 직전 조선공산당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일제의 경계와 수색은 그야말로 삼엄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이때에도 이들은 각 학교에 선언문을 배포하고 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일정하게 연대를 모색하며 인산 당일의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동환(李東煥, 1901∼1982)은 전북 정읍 출신이다. 6·10만세운동 때 중앙고보 5학년 재학 중으로, 재산은 10만 원정도로 중산층 출신의 인사였다. 이동환이 중앙고보 재학중인 1926년 1월 서양사(西洋史) 시간에 미국의 독립에 대하여 강의를 받던 중, 교사와 학생을 향하여 한국의 장래와 독립에 관해 열변을 토했던 모습을 통해 항일적 민족의식이 투철한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6·10만세운동에 앞서 투쟁방법에 대해 논의가 있었는데, 이동환은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기관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충무로(本町) 일대의 폭파와 같은 보다 강력한 투쟁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투쟁방법은 일동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5월 26일에 황정환·김재문이 낙원동 255번지 김성기로부터 등사판을 빌려왔고, 이동환은 용지를 구해 왔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고향에서 보내오는 생활비의 일부와 외투, 책을 팔아 충당하기로 하였다. 5월 28일 이동환·김재문이 인쇄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다. 이동환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선호와 중앙고보 동급생인 박용규 등과 양측에서 연락을 담당하면서 연대 투쟁을 추진해 갔다.

거사 후 체포되어 일제의 법정에 섰던 박용규·김재문이 당당하게 “조선 독립을 열망한다”고 토로했으며, 이동환은 “조선이 당장에 독립은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신을 앙양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굳센 의지를 내보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3. 결론 및 의의

3-1) 인산일의 6․10만세운동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 학생들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각 학교와 지방에 전단을 배포하는 데 성공했다. 인산 당일의 만세운동을 위한 준비를 차질없이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인산 당일 장례 행렬이 지나갈 연도 양측에는 약 2만 1천여 명의 중등 이상 각급 학교 학생들이 도열하기로 되어 있었다.

서울의 거리도 조선박람회의 구경거리와 조선의 마지막 인산을 구경하고자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서울역에서 승하차한 인원만도 6월 1일부터 일주일 동안에 무려 8만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여기에 용산, 청량리, 왕십리역까지 합치면 10만 명을 훨씬 넘는 숫자였다. 시내를 다니는 전차는 하루 평균 10만 명이 이용하였고, 인산 습의일(예행연습일)인 7일에는 15만 명이 이용하여 일대 교통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장례가 통과하는 연도에는 30여만 명이 운집하고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오전 8시 반 종로 3가의 만세시위를 신호탄으로 하여 모두 여덟 곳에서 일어났다.

① 단성사 앞의 시위 : 오전 8시 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국장의 행렬이 통과한 뒤 동양루 앞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보 이선호의 선창으로 중앙고보생 3,40명이 만세를 고창하면서 격문서 약 1천여 장과 태극기 30여 매를 살포하였다. 이에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호응하면서 일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로써 대여(국상때 쓰던 큰 상여) 뒤에 따르던 기병의장대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달리는 바람에 군중이 이리저리 몰리다가 중경상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이때 만세를 고창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학생은 연희전문학교 김규봉, 이석훈, 중앙고보 이동환, 박선석, 홍명식, 주공조 등 50여 명에 달했다.

② 오전 8시 40분 대여가 지나자 마자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등 50여명이 격문서를 살포하며 만세를 고창했다. 관수교 남쪽 부근에서는 이병립과 연희전문 박하균·이천진이 앞장 서서 격문을 날리며 만세를 고창하자 학생들이 호응하였고, 이때 일경에 의해 주동인물인 이병립·박하균·이천진을 포함하여 학생 40여 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③ 오전 9시 반 경 청년학원 생도 박두종 외 2명의 청년이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격문 1천 여장을 살포하며 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만세시위는 격렬하게 이루어져 부근의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박두종은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④ 오후 1시 경 훈련원 재전 부근에서 학생 1명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고창했다. 훈련원 서쪽 일대에서 천세봉의 선창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⑤ 오후 1시 10분경 동대문 부인병원 앞에서 대여가 지나간 후 시대일보 김락환외 2명이 격문서를 뿌리며 만세를 고창했다.

⑥ 창신동 채석장 입구에서 50세 가량의 사람이 만세를 고창했다. 홍종현(37세)이 혈서를 쓰고 투쟁에 참가하였다.

⑦ 오후 1시 45분 경 대여가 신설동 고무회사 앞을 지나갈 때 학생 1명이 격문서 1백여 장을 살포했다.

⑧ 오후 2시 20분 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학생 4명이 관수교 부근에서 살포한 것과 같은 격문서 7백여 장을 살포했다. 살포한 학생은 ‘통동계’의 박용규, 곽대형, 황정환, 이동환 등이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계속하여 일어났다. 학생들은 가슴에 간직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준비해온 격문을 군중을 향하여 힘차게 뿌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제의 그토록 삼엄한 경계와 철통같던 감시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여덟 곳에서 일어난 이날의 만세시위에는 5, 6백 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시위는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하였다. 동대문 앞 시위현장에서는 일본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이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고, 7, 80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창신동 입구에서는 혈혈단신으로 혈서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고창한 홍종현 같은 사람도 있었다. 3·1운동 때에도 만세시위에 참가한 홍종현은 단독으로 거사에 임하였다. 혈서로 「독립만세」를 쓰고 그 가운데 태극기를 그린 것과 「우리는 자유를 얻고자 싸우자」라는 격문을 써서 거사 당일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반 군중은 일제 기마병과 군경의 삼엄한 경계 아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만세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된 학생만도 2백 10여 명에 달하였다. 이때 체포된 학생들을 학교별로 보면, 연희전문 42명, 중앙고보 58명, 세브란스의전 8명, 보성고보 7명, 그밖에 중등학교, 양정고보, 배재고보, 송도고보 학생들이었다.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대여의 모습)ⓒ독립기념관
순종 황제 인산일 사진(대여의 모습)ⓒ독립기념관

그 뒤에도 학생들에 의해 새로운 만세운동의 계획이 추진되었다. 배재고보생 문창모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계통의 학생들은 인산 당일의 운동이 일반 민중의 호응을 크게 얻지 못하자 재차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인산일 봉영 대열에 있다가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만세 현장에서 만세를 선창한 학생들이 일경에 잡혀가는 것도 보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문창모·손성엽 등은 보다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평소 기독교학생회의 모임에서 친분이 있었던 7개 학교의 간부들과 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했다. 7개 학교란 배재고보를 비롯하여 협성학교, 피어선 성경학원, 기독교청년학원 등의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중심으로한 것이었다. 이들은 서대문 73번지에 소재한 피어선 성경학원 기숙사에 모여 격문 수만 매를 인쇄하는 등 2차 만세운동의 거사를 계획했다.

3-2) 6·10만세운동의 민족협동전선 이념

6·10만세운동 때 대한독립당의 명의 아래 「격고문」을 작성하였다. 격고문에서는 6·10만세운동의 시원을 3·1운동으로 밝히고 있으며, 독립을 정의와 평화의 실현으로 규정하였다.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조선독립만세’의 구호를 내세우면서 절대 독립을 최고의 이념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격고문은 기본적으로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완전 독립 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격고문의 논리는 3·1운동의 선언서와는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3·1운동의 독립선언에서는 대체로 세계 개조의 분위기에서 인도주의, 민족자결론, 고유주권설 등에 따라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일본을 경제적 침략자로 규정할 안목을 갖지 못한 채, 정치적 침략주의·강권주의·제국주의 등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침략뿐 아니라 경제적 침략의 관점에서도 일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격고문은 3·1운동 때 자유주의의 논리에 비해 그 사상적 기조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의 수용과 더불어 성숙된 민족이론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식민지 민족을 총체적으로 무산자계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계급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적·정치적 해방과 계급적·경제적 해방을 동일한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격고문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분리하지 않은 채 통일적으로 파악했다. 또한 계급지상주의에 대한 편향성을 극복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민족혁명을 위해 자유주의자와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이론적 단서로도 주목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운동의 선봉’에 나서야 한다는 노선을 여기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6·10만세운동에서 보여준 민족협동전선의 실천은 이후 국내외 민족세력의 최대 당면과제로 부상한 민족대당촉성운동의 서막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1926년 7월에 상해에서 열린 6·10만세운동에 관한 연설회에서, 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전민중의 통일기관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안창호가 민족대당촉성운동에 앞장서 갔다. 1926년 7월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이 취임식에서 ‘전민족적 당체 조직’을 3대 정강의 하나로 제시함으로써 임시정부에서도 민족협동전선의 지향을 내보였다. 또 운동 주체의 하나였던 조선공산당은 「조선공산당선언」에서 6·10만세운동을 “3·1운동에 비하야 철저한 목적, 표어 및 투쟁방침을 가지어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하는 민족혁명유일전선의 제작상 확고한 첫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치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계의 통합은 1920년대 후반 민족대당촉성운동의 첫 이정표였다. 독립운동 통합의 물결은 만주까지 확산돼 3부의 독립군을 통합하는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이어졌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성립의 직접적 배경이 됐다. 독립운동에서 민족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최고의 방략이자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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