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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옥련

훈격아이콘 훈격: 애족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0년

주요공적

1928년 11월 항일학생결사 소녀회 조직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 때 부상학생 치료 및 시위 지원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박옥련 / 장경례 / 박현숙 / 장매성

박옥련 , 1914 ~2004 , 애족장 (1990) 장경례 , 1913 ~1997 , 애족장 (1990) 박현숙 , 1914 ~1981 , 애족장 (1990) 장매성 , 1911 ~1993 , 애족장 (1990)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이듬해 봄까지 확산되는 과정에서 여학생들이 보여준 활약은 대단했지만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산의 계기가 된 1930년 1월 15일의 서울 시위는 여학생의 연합시위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어떤 교과서도 이를 제대로 언급한 바 없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여학생 비밀결사인 독서회, 즉 소녀회가 활약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에서 학생이 처음으로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다. 유관순 열사로 대표되는 바, 3.1운동에서의 여학생의 활약은 눈부셨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학생운동인 광주학생운동에서도 소녀회로 대표되는 여학생의 항일투쟁이 당시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소녀회의 항일투쟁은 3.1운동으로부터 광주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동맹휴학, 비밀결사, 학생시위로 표출된 학생운동의 흐름 속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또한, 1920년대 광주는 서울과 함께 학생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지역으로 그 정점에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녀회는 1928년 1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장매성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 독서회였다. 이듬해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장매성, 장경례, 박현숙, 박옥련 등 11명의 소녀회 회원들은 가두시위에 나섰고 부상당한 학생을 치료하고 식수를 공급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30년 1월 소녀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그해 10월 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장매성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장경례, 박현숙, 박옥련 등 10명은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1. 3․1운동, 여학생의 등장

선언서의 배포와 학생들의 선동에 따라 하층민은 물론 청년 학생들도 조선은 독립될 것이라고 믿는 자가 있었고 상류층도 한때 반신반의에 빠졌으며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이를 믿었기 때문에 운동이 확대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진단한 3․1운동의 확산 원인은 학생의 선동이었다. 서울로 유학을 오거나 지방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각종 선언서, 유인물, 그리고 시위 경험을 전국적으로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나선 이유를 들어보자.

조선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없다. 또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의 대우에 차이가 있다. 또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이 받고 있는 교육의 정도에도 차별이 있다. 이와 같은 것을 항상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독립을 하면 그런 불만이 없어질 것이므로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다.

학생운동은 민족차별에 분노한 학생이 거리로 나선 3․1운동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런데 3․1운동 당시 학생의 등장보다 더 주목받은 것은 여학생의 등장이었다. 일본에서 나오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1919.3.3.)의 눈에도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서 무엇보다 눈에 띤 것은 여학생의 참가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조선 경성에 일대 소동이 야기되었다. 이 일은 중등학교 이상의 조선인 학생 전부가 결속하고 이에 다수의 여학생도 참가하여 일대를 조직하고 이태왕 전하의 대장례가 다가온 것을 기회로 삼아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더욱이 여학생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다 검거되고 투옥되어 재판받는 모습은 한국인에게도 신선한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경찰서에서 구치소로 이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증오와 분노의 격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여학생들의 활약과 고초가 사람들을 시위에 나서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아침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었다. 각 학교에서는 학생 대표들이 나서 ‘우리들의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오늘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한 후 학생들을 탑골공원으로 이끌었다. 오후 2시 탑골공원에는 약 200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학생 20여 명 정도를 빼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은 오후 2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낭독한 후 만세삼창을 부르고 시가행진에 나섰다. 탑골공원에서 200여 명으로 출발한 시위대가 오후 내내 서울 시내를 돌면서 수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탑골공원에서 나온 일부 시위대가 동대문 방향으로 향하다가 창덕궁 방향으로 꺾어 안국로를 지나갈 때 앞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언급한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만세시위에 가담했다. 바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오사카아사히신문〉 1919년 3월 5일 자에 사진으로 실렸다. 신문은 3월 1일 서울 풍경을 전하면서 이 사진에 ‘조선인 여학생이 만세를 절규하면서 전찻길을 행진하고 있다’라는 해설을 덧붙였다. 1919년 3월 1일 일군의 무리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사실을 증빙하는 유일한 사진이 바로 여학생들의 시위 장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3.1운동을 통해 학생이 처음 등장함과 동시에 여학생도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1919년 3월 10일 첫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만세시위에는 숭일학교, 광주농업학교 등의 학생과 함께 수피아여학교 여학생들이 준비 단계부터 참여했다. 수피아여학교에는 이미 2월 중순에 〈2.8독립선언서〉가 전달된 바 있었다. 1910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수피아여학교에서 3년 간 교사를 역임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김마리아가 건네 준 것이었다. 김마리아는 일본 도쿄로부터 〈2.8독립선언서〉를 몰래 갖고 들어와 대구를 거쳐 고모 김필례와 언니 김함라가 있는 광주에 들어와 〈2.8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상경했다.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은 모의단계부터 참여하여 학생 동원의 임무를 맡았다. 박애순은 학생들에게 『매일신보』의 기사를 읽어주며 “만국강화회의에서 우리나라도 독립이 승인되었으므로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개시하고 있으니 우리도 운동을 개시하여 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설득했다. 수피아여학교 학생 홍순남(洪順南), 박영자(朴永子), 최경애(崔敬愛), 양태원(楊泰元) 등은 거사 전날인 3월 9일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학교 건물 지하 예배당에 모여 태극기를 제작했다. 마침내 거사일인 3월 10일 아침에 박애순은 홍순남, 박영자에게 〈기미독립선언서〉 50부를 나눠주고 오후에 광주천 부동교 아래 자리한 장터에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오후 3시 반경 부동교 아래 장터에서는 1천여명의 시위대가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시위대에 태극기를 나눠주고 숭일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광주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수피아여학교 2학년생 윤형숙(尹亨淑)이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왼팔을 잃고 말았다.

서울에서는 1919년 3월 1일 첫날 일어난 만세시위에 교복을 입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여학생이 등장했다. 3월 3일 경기도 개성에서는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개성 최초의 시위를 일으켰다.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시위에서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다음날인 3월 11일에는 경남 최초이자 부산 최초인 만세시위가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났다. 이처럼, 3.1운동에서 여학생은 역사의 주체로서 전면에 등장했다.

2. 맹휴의 시대, 여학생 맹휴와 비밀결사 결성

맹휴란 동맹휴학의 줄임말이다. 3․1운동에서 학생들이 거리 시위에만 나선 것이 아니었다. 맹휴를 통한 항거도 있었다.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면,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학생들은 주로 등교를 거부하며 맹휴를 벌였다. 그리고 임시휴교령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중등학교 학생들이 맹휴투쟁을 전개했다. 2학기가 시작되는 9월에도 맹휴가 이어졌다. 이제 학생들은 맹휴라는 직접행동을 통해 민족 문제는 물론 학교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거리의 3․1운동은 끝이 났지만, 학교 울타리 안에서의 3․1운동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맹휴는 학생운동이 학교와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일반적인 운동방식으로 자리잡아갔다.

조선에 있어서의 학생사건은 많은 경우 일반적 사회현상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이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민족적 감정이 원동력이 되고 따라서 단순한 학생맹휴사건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하나의 국부적 문제로 보지 않고 전체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다.…(중략)… 일반의 뇌리에 식민지 교육 즉 노예교육이라는 관념이 상당히 뿌리깊게 인상되어 있었으니, 때로는 제국주의 교육이라는 대명사까지 붙여 반항기분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맹휴는 점점 증가했고 사회주의자의 지도를 받는 학생운동세력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회주의 비밀결사인 고려공산청년회는 1925년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공산당 역시 독서회 등의 학생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지도했다. 서울에는 ㄱ당과 조선학생전위동맹, 광주에는 성진회와 독서회중앙부, 대구에는 신우혁명과 적우동맹 등의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192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학생운동이 학교당국 대 학생의 범위를 넘어 식민권력에 저항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맹휴는 1927년과 1928년에 절정을 이뤘다. 맹휴의 으뜸 원인은 교사 문제였다. 노골적으로 민족차별을 일삼은 일본인 교사와 그에 순종하는 한국인 교사를 배척하는 맹휴가 제일 많았다. 차별 교육 타파라는 정치적 요구를 내건 맹휴도 많았다. 한국인 차별을 철폐할 것, 일본인 교원을 한국인 교원으로 교체할 것, 한국인 교사를 많이 채용할 것, 한국인 위주로 교육을 실시할 것, 한국인 교사의 봉급을 평등하게 지급할 것, 한국 역사와 지리를 교수할 것, 한국어 시간을 늘릴 것 등을 요구했다. 맹휴의 요구 조건으로 학우회‧교우회에 자치를 허용하고 교내에서 집회‧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학교 민주화를 내세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20년대 후반 대표적인 여학생 맹휴는 1927년 5월 25일 서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숙명여고보)에서 일어났다. 숙명여고보 맹휴는 당시 맹휴가 갖는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그것은 일본인화 교육을 강요하는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인 교사들에 의한 비정상적인 학교 운영과 현모양처 교육이 학생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숙명여고보 맹휴는 학생의 요구조건에 대해 학부형회,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양명고등보통학교 세 학교의 졸업생 단체인 양명회,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단체인 숙녀회뿐만 아니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신간회, 근우회, 중앙여자청년동맹 등의 단체가 연대 지지하면서 학무당국과 학교측에 압력을 넣은 결과 학생들의 요구가 관철되면서 네 달만인 9월 27일에 가서야 일단락되었다.

1927년과 1928년에 걸쳐 전국 곳곳에서 맹휴가 일어날 때 전라남도 광주는 서울, 함흥 등과 함께 치열한 맹휴가 일어난 지역으로 꼽혔다.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그리고 여학교인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에서 맹휴가 잇달았다. 광주고보의 경우, 1923년, 1924년에 이어 1927년과 1928년에 맹휴가 일어나 관공립학교 전국 최다를 기록하기도 했다. 광주농업학교에서는 1923년에 이어 1928년에 맹휴가 일어났다. 1927년에 개교한 광주여고보에서도 1928년 4월 가사 선생의 체육 교육에 항의하는 맹휴가 일어났다.

1927년 광주고보에서는 만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중 시설 좋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방문한 학생들이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 시설이 낙후한 데 불만을 품고 맹휴를 일으켰다. 맹휴는 학교당국이 이 불만에 대해 수용 의사를 밝히며 수습되었다. 이듬해인 1928년 6월에는 소위 ‘이경채 사건’으로 격렬한 맹휴가 일어났다. 광주고보생인 이경채가 1928년 3월 사회주의 서적을 참고해 3종의 선언서를 작성해 광주 시내에 배포하다가 적발되었다. 그런데 학교당국이 최종판결이 나기 전에 이경채를 퇴학처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학생들은 맹휴를 일으켰다. 그들은 이경채에 대한 학교당국의 입장을 밝힐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교육 여건 개선을 요구했다. 하지만 학교당국은 강경한 입장에서 주동자 72명에게 퇴학, 가담자 281명에게 무기정학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1928년 6월에는 광주농업학교에서도 일본인 교사에게 사직을 권유하는 맹휴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일한공학제 실시는 절대로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담은 격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학교당국은 주동자 13명에게 퇴학, 가담자 102명에게 무기정학, 나머지 학생들에게 근신처분을 내렸다.

1928년 6월에 시작된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맹휴는 학교당국과 경찰 측의 강경대응으로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효율적인 대응을 위해 맹휴중앙본부를 만드는 성과로 이어졌다. 광주고보에서는 7월 10일 맹휴중앙본부가 결성되었다. 맹휴중앙본부는 자신들의 맹휴가 식민교육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맹휴 구호로 ‘교우회 자치,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노예교육에 대한 항쟁, 독서의 자유 획득, 학원내 경찰 투입과 간섭 반대’ 등을 내세웠다.

그런데 1928년 7월 광주고보의 맹휴중앙본부는 광주의 대표적인 학생비밀결사인 성진회가 결성되었던 최규창(崔圭昌)의 하숙방에서 조직되었다. 이 자리에는 성진회원으로 활동했던 학생들이 여럿 참여했다. 이는 1928년에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에서 일어난 맹휴가 학생비밀결사운동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성진회는 광주고보 학생인 장재성(張載性), 왕재일(王在一)과 광주농업학교 학생인 박인생(朴仁生)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평소에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식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 중에서 동지를 규합해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1926년 11월 3일 10여명이 넘는 학생들을 포섭해 성진회를 결성했다. 총무는 왕재일, 회계는 장재성, 서기는 박인생이 맡았다. 성진회는 매월 2회 토요일에 정기집회를 열기로 하고 경비로는 매월 10전씩을 거두기로 했다. 하지만 성진회는 활동 5개월만인 1927년 3월 자진 해산했다. 이후 성진회원들은 학교별로 독서회를 만드는 등의 활동에 들어갔다.

1929년 6월 도쿄로 유학갔던 성진회 간부 장재성이 광주에 돌아와 성진회원들과 함께 독서회중앙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장재성이 책임비서를 맡았고 조사선전부, 조직교양부, 출판부, 재정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부원들은 주 1회 모임을 가졌다. 각 학교별로도 독서회중앙부와 유사한 독서회를 결성해 중앙부와 연락이 통하도록 했다. 다만, 각 학교 조직원에게는 독서회중앙부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광주고보에서는 6월 하순 20여명이 모여 독서회를 결성했다. 광주농업학교도 같은 시기에 18명이 독서회를 결성했다. 전남사범학교는 7월에 14명이 독서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9월 중순에 정식 출범했다.

광주여고보에서는 독서회중앙부 책임비서인 장재성의 누이동생인 장매성이 중심이 되어 1928년 11월 독서회, 즉 소녀회를 조직했다. 1928년 4월 광주여고보에서 일어났던 맹휴를 경험한 장매성 등의 여학생들은 사회과학을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한 자각이 독서회인 소녀회 결성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3. 여학생,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화를 이끌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 그리고 전국적 맹휴의 시대를 거친 학생운동의 정점은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출발한 기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개찰구에서 일본인 학생 3명이 광주여고보를 다니던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 등 여학생을 밀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보생인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을 꾸짖으며 시작된 한국인 학생 대 일본인 학생의 갈등이 며칠간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3일 한일 학생 간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

11월 3일 메이지 일왕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천장절 기념식과 함께 전라남도 지역 누에고치 생산 6만석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광주지역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일본인 학생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한국인 학생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로 인해 시내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광주역에서는 수십 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한국인 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광주고등보통학교 체육관에서 긴급학생총회를 열었다. 1,00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은 각목과 곤봉으로 무장한 채 거리로 나서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광주중학교로 행진했다. 그러자 경찰이 이를 막고 해산시켰다. 조선총독부의 대응은 차별적이고 강경했다. 광주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7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 학생들을 긴급 체포했다.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처사에 한국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까지 강제 연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독서회중앙부 책임비서 장재성은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제2의 시위를 준비하는 투쟁본부를 꾸렸다. 서울에서 내려온 신간회를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 지도부에게는 연대와 지원을 요청했다. 시위 날짜는 광주 장날이자 다시 학교 문을 여는 11월 12일로 정했다. 그날이 오자 광주고보에서는 독서회원들이 나서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자고 선동했다. 학생들은 시위 대오를 꾸려 각목과 곤봉으로 무장한 채 교문 밖으로 나왔다. 이들이 향한 곳은 광주형무소였다. “구속학생 석방하라”를 구호를 외치고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 등이 쓰인 전단지를 배포했다. 광주농업학교생 200여 명도 동참했다. 광주형무소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은 학생들을 포위하고 체포에 들어갔다. 이날 장재성을 비롯한 투쟁본부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교문에서 제지당해 동참하지 못했다. 몇몇 학생들은 몰래 학교를 빠져나가다 철망에 긁혀 부상을 입기도 했다.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이틀 후인 11월 14일에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아침부터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오후 7시 경에는 교정에서 독립가를 합창하며 만세를 외치고 사감실에 투석을 해 유리창을 파괴했다. 이들의 시위는 다음날인 15일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11월 12일부터 벌어진 광주의 제2의 시위는 조선총독부의 보도 통제로 당장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12월 초에 들어와 서울에서는 광주의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맹휴가 잇달아 일어났다. 역시 학생비밀결사인 각 학교 독서회가 주도했다. 12월 5일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가 제일 먼저 맹휴에 들어갔다. 이어 중동학교와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등 경성 시내 학교에서 잇달아 맹휴가 일어났다. 맹휴운동은 12월 9일의 연합시위로 발전했다. 이날 시위에는 경신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등 주요 사립학교들이 모두 참여했다. 미처 교문 밖을 나서지 못한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 날만 1,200여명을 검거했다. 그럼에도 동맹휴학과 시위가 계속되자 조선총독부는 12월 13일에 조기방학을 단행했다.

이처럼, 11월 초순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학생시위는 12월에 이르러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학생시위의 전국화에 대해 《동아일보》(1929년 12월 29일)는 민족차별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그 원인은 곧 조선이라는 토지 내에 성립된 부자연한 양 민족의 주객전도적인 관계다.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하여 치자적 정복적 우월감을 가질 때 조선인은 조선에 있어서는 자기가 주인이라는 확고한 전통적 신념을 가져 일본인의 우월적 모멸적인 언동에 대하여는 조선인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심각한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이 이러한 민족 감정의 일 폭발에 있는데다가 그 화염에 땔감을 던진 결과가 된 것은 경찰 당국에서 일본인 학생은 석방하고 조선인 학생을 다수로 검거한 사실이다. 이에 학생과 조선 측 민중은 경악하지 아니치 못한 것이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서 1930년 1월 15일 서울에서 또다시 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시위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보)를 비롯해 여학생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그날 아침 9시 30분에서 10시 경까지 거의 동시에 실천여학교를 필두로 근화여학교, 이화여고보, 배화여고보, 경성보육학교, 태화여학교, 동덕여자고보, 정신여학교, 경성여자미술학교, 휘문고보, 경신학교, 중동학교, 배재고보, 보성전문학교까지 14개 남녀학교가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1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동안 서울에서는 18개 학교에서 7천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은 1929년 12월 1차 시위 당시 주동자들이 검거되고 경계가 엄중한 가운데 1월 15일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나자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며 소요죄를 적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서울 및 경기도 경찰 1,200여 명과 경찰관교습소 학생 300명을 비롯해 3,000여 명의 경찰을 진압에 동원했다. 이틀간 500여 명이 검거되었고 200여 명이 구류처분을 받았다. 사이토 총독은 예정된 일본행조차 연기했다. 경기도는 1월 17일 도내 23개 중등학교장 회의를 소집해 학생취체방침을 전달했다. 같은 날 조선총독부는 13도 경찰부장 회의를 소집해 학생시위대처방안을 마련했다. 1월 25일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다시 시내 각 중등학교장을 소집해 시위관련 학생 300여 명의 명단을 제시하며 모두 학사조치할 것을 지시했다.

이처럼 1930년 1월에 일어난 서울 2차 시위는 ‘서울 지역 여학생연합시위’로 불릴 만큼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선 것이 특징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시위에 참가한 대부분 여학교에서 전교생이 참가했다.

이화 310명 전원, 동덕 190명 전원, 배화 200명 전원, 경성여자상업 282명 전원, 경성여자미술학교 48명 중 28명, 태화여학교 103명 중 20명, 실천여학교 112명 전원, 정신여학교 93명 전원, 숙명여고보 406명 전원, 근화여학교 265명 중 3학년 이외의 전원

이로 인해 1930년 1월 30일에 84명이라는 많은 여학생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 중 구속자가 26명, 불구속자가 58명이었다. 이처럼 1930년 1월 여학생의 주도로 서울에서 일어난 2차 시위는 다시 한번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월에 서울의 여학생들이 다시 불을 지핀 학생시위는 3월까지 전국에서 이어졌다. 1930년 봄까지 이어진 광주학생운동에는 북으로는 함북 회령, 남으로는 전남 제주까지 전국 13도에서 280여개 학교가 참여했다.

4. 소녀회의 결성과 활약

1928년 11월 초순 “어느 따뜻한 일요일에” 광주여고에 다니던 장매성(張梅性)이 주동이 되어 같은 학교의 박옥련(朴玉連), 고순례(高順禮), 장경례(張慶禮), 암성금자(岩城錦子), 남협협(南俠俠) 등과 함께 “들국화를 따면서” 걷다가 광주사범학교 뒷언덕에 올라 소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중 암성금자는 아버지가 일본인이었다. 어머니가 이광춘의 아버지와 재혼했는데,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된 나주역사건 당시 이광춘, 박기옥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장매성은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세겹으로 압박을 받고 사는 인생임을 너희들은 아느냐! 첫째로 무산자이니 자본계급에게 짓밟히고 둘째로 xx이지 사람이나 xx에게 xx받고 셋째로 여자이니 남자들에게 시달리지 아니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삼중으로 받는 압박을 벗어나서 인간다운 세상을 살자면 만인평등의 새세상을 만들어야 하겠고 신사회를 건설하자면 사회과학을 연구할 급무가 있지 아니한가

판결문에 따르면 장매성은 “여성을 남성의 억압에서부터, 또 무산대중을 자본계급의 억압에서부터 각각 해방함으로써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제 사회를 실현” 시키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 말에 모두 찬성하면서 소녀회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처럼 1920년대에 소녀회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로는 목포소녀회, 이리소녀회, 화순소녀회, 영암소녀회, 언양소녀회, 마산소녀회, 공주소녀회 등이 언론지상에 등장한다.

이듬해인 1929년 5월에는 장매성의 집에서 박계남(朴繼南), 박채희(朴采熙), 박현숙(朴賢淑), 김금연(金錦嬿), 김귀선(金貴先)이 소녀회에 가입했다. 소녀회원들은 매월 10전씩의 회비를 내어 사회과학 잡지와 서적을 구입해 읽고 토론했다. 그들은 ‘여성을 남성의 압박에서, 한국인을 일본의 압박에서, 무산대중을 자본계급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취지, 즉 여성 해방, 민족 해방, 계급 해방을 지향하고 있었다.

소녀회는 독서회중앙부 산하 독서회 회원들이 만든 연합 단체인 학생소비조합이 출범할 때 30원을 출자하는 등 남학생들의 주도하는 독서회와 연대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연대활동의 일환으로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간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소녀회원들은 “붕대와 도포약을 가지고 뛰어와서 부상 학생을 구원하는 한편 한 손에 두 개씩이나 물주전자를 들고 쫓아 다니면서 열광적인 구호에 타는 목을 축여”주는 활동을 펼쳤다.

여학생들은 집집마다 들어가서 주전자에 물을 떠들고 나와 먹여주고 우물마다 두레박 소리요 삽시간에 집집마다의 대문 앞에는 물동이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여학생들은 일명 주전자부대라는 칭호까지 들었으며 해방 후 당시 퇴학맞은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할 때 기념품으로 주전자 한 개씩을 주었다고 한다. 여학생들은 그날 부상당한 남학생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한편 근처 약방에서 붕대, 가제, 탈지면 등을 가져다가 상처를 싸매주고 응급치료를 하는 등 전투지대에 방불한 활동을 하였다.

11월 3일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이 있은 후 장재성 주도로 투쟁본부가 마련되었고 11월 12일 시위가 준비되었다. 장매성은 어릴 적 회계공무원인 아버지, 오빠 장재성과 함께 강연을 들으러 다녔던 흥학관의 등사판으로 수천 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일을 맡았다. 흥학관은 당시 광주지역 사회단체와 사상단체의 사무실이 자리한 건물이었다. 이 인쇄물들은 11월 12일 시위날에 배포되었다.

그런데 1930년 1월 8일 개학과 동시에 2학기 시험을 치르게 된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에서는 구속 학생의 석방을 주장하며 시험을 거부하고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는 백지동맹사건이 일어났다. 광주여고보 3학년생인 최순덕(崔順德)은 여러 학교 학생 대표들과 함께 모여 백지동맹의 실시계획과 구호를 논의했다. 그리고 다음 주장을 담은 유인물 150장을 작성했다.

“시험지에 한 글자도 쓰지 말자”, “연필도 잡지 말자”, “백지 그대로 두고 운동장으로 나가자”, “그 다음에는 일주일 동안 교실로 들어가지 말고 시험을 거부하자”, “시험 기간 동안 운동장에 모여 구속 학생들이 석방될 때까지 시험을 거부하자”

1930년 1월 11일 아침 중간고사 시험이 시작되기 전 최순덕은 1,2,3학년 교실을 뛰어다니며 교단에 올라가 백지동맹 실시계획을 칠판에 쓰고 학생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당시 전단지를 보고도 답안지를 써내려가는 몇몇 학생들을 보고 3학년 이광춘이 일어나서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자고 하자, 학생 대부분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전교생은 운동장에서 ‘구속 학생들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시험을 거부하자’며 농성을 벌였고 입실을 거부했다.

그런데 1월 15일 서울에서 여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난 날, 광주에서는 광주여고보 학생 12명이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중 이광춘을 제외한 11명은 소녀회 사건 연루자였다. 이 과정에서 가택수색이 이루어지면서 격문이 발견되어 압수되기도 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 여학생 연합시위가 발발하고 동시에 광주에서 여학생 12명이 검거되자, 이 초유의 사태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났다. 서울의 여학생연합시위를 주도하고 검거된 여학생들과 광주에서 체포된 광주여고보 여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세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광주여고보생 12명이 광주형무소에 갇히자 언론은 “대한 절기가 돌아와서 일기가 매우 엄혹한데 그들은 사식과 옷도 얻어 입지 못하고 떨고 있는 바 그들의 건강이 매우 염려된다더라”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광주여고보 당국은 백지동맹사건과 학생 12명 검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자 강경 대응했다. 곧바로 학교 문을 닫고 최순덕을 비롯한 백지동맹 관련자들을 무기정학 처분하고 소녀회 및 백지동맹사건에 연루된 20여명 학생의 부형을 불러 퇴학을 종용했다. 결국 소녀회 관련자 중 고순례, 암성금자, 박현숙은 1930년 1월에, 장매성, 박옥련, 박계남, 장경례, 남협협은 1930년 3월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1929년 10월에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간 김금연은 1930년 2월에 퇴학했다. 김귀선은 1930년 1월 초순에 군산고등여학교로 전학했으나 1월 중순에 검거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처럼 소녀회는 일본 경찰이 광주학생운동 관련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독서회가 드러나면서 함께 발각되었다. 소녀회 관련자 11명은 검거된 지 무려 9개월 만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3대 비밀결사’로 불린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에 연루되어 검거된 170여 명의 학생들은 예심을 이유로 재판이 열리지 않은 채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자 예심 지연에 항의하며 감옥 안에서 여러 번 항의하는 집단행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소녀회 사건의 경우, 1930년 4월 예심계 판사가 성진회, 독서회 사건과 분리해 예심결정서를 발표하면서 5월 초쯤 공판이 열린다는 추측이 나돌았으나 소문에 그치고 말았다. 예심은 1930년 7월 1일에 종결되었고 다음날 남협협, 박채희, 장경례, 고순례가 보석으로 가석방되었다.

소녀회 사건은 1930년 9월 29일 10시 광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 재판은 광주지방법원이 생긴 이후 최초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이자 언론이 ‘전조선학생사건’이라고 부른 광주학생운동이 발단이 되어 발견된 비밀결사사건이므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아침부터 방청을 위해 사람들이 몰리자 재판부는 개정 5분 만에 검사의 요청에 따라 “본건 사안은 공안을 방해할 염려가 있”다며 방청은 물론 촬영도 금지하고 비공개로 진행했다. 사실심리를 일사천리로 끝낸 후 검사는 치안유지법 제1조 2항 위반 혐의로 장매성에게는 징역 2년을, 박옥련, 박계남, 고순례, 장경례, 암성금자, 남협협, 박채희, 박현숙, 김금연, 김귀순에게는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치안유지법 제1조 제1항은 ‘국체를 변혁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이고 제2항은 ‘전항의 미수죄는 벌한다.’ 이다. 그리고 경성에서 무료변론을 위해 내려온 변호사 김병로(金炳魯), 이창휘(李昌輝), 목포로부터 온 변호사 김성호(金聲浩), 이의형(李儀珩)과 함께 광주 지역 변호사로서 유료 변론에 나선 서광설(徐光卨), 김재천(金在千) 등이 일제히 무죄 판결을 주장하는 변론을 펼치고 오후 3시 10분경에 폐정되었다. 다음날 변호사들은 이미 가석방된 4명을 제외한 7명 전원에 대한 보석원을 제출했다. 특히 장매성은 당시 늑막염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법원은 장매성의 보석만 불허하고 6인에 대한 보석은 허가했다. 이에 박계남, 암성금자, 박옥련, 박현숙은 가석방되었으나, 김금연, 김귀선은 보석금이 없어 출옥하지 못했다.

10월 6일에 열린 1심 공판에서 검사의 구형대로 장매성은 징역 2년의 실형을 받았다. 장매성 외 10명의 여학생은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선고가 끝나고 감옥살이를 계속하게 된 장매성은 재판정에서 “여러분 안녕히”라는 말을 남기고 감옥으로 향했다고 한다. 장매성은 1심 결과 1년 2개월 14일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월 22일에 가출옥했고 당시 광주고보생으로서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정석규(鄭錫奎)와 1938년에 결혼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매성‧장경례‧박옥련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박현숙에게는 추서했다. 4명 이외의 소녀회 회원 중 박계남은 1993년, 고순례‧김금연은 1995년, 남협협‧박채희는 2013년에 각각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그리고 광주여고보를 그만두어야 했던 소녀회 회원들은 해방 이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인 전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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