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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원용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5년

주요공적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 추진

1941~1944년 동 위원회 의사부 집행서기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김원용 / 전경무 / 민함나 / 심영신

김원용 , 1896 ~(1976) , 애국장 (1995) 전경무 , 1898 ~1947 , 애국장 (1995) 민함나 , 1888 ~1952 , 애족장 (2019) 심영신 , 1882 ~1975 , 애국장 (1997)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자 통일된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미주 한인 대회가 열렸다. 한인대회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효과적인 외교활동을 위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을 대미(對美) 외교 대표로 선정했다. 하와이와 미국 곳곳에 거주하는 한인의 독립운동 열망을 임시정부 지원과 외교활동으로 집중시켰다.

1.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성립과 배경

1930년대 후반부터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통합을 통한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국지역에서 1930년대 후반부터 좌우합작을 통한 전환된 독립운동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에서 김구와 김원봉은 서로 소속된 단체를 모아 통일회의를 개최했다.(1939년 8월) 이 회의에서 김구는 미주지역 한인들도 통일된 역량을 집중시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당부했고 이런 김구의 발언은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통합 필요성을 가속화하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40년 초반 한국광복군의 창설 소식은 북미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논의를 본격화 했다. 북미 국민회는 광복군을 위한 자금모집을 계기로 미주지역 독립운동단체 통합을 시작했고 하와이 국민회에게 의사를 타전하며 통합운동의 의사를 피력했다. 양 국민회는 통합의 의사는 확인했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진전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황만 계속되었는데 이런 상황은 한국독립당으로 민족진영 독립운동 전선이 통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협상이 진전되어 해외한족대회를 열어서 본격적인 논의와 의결을 하기로 합의를 했다.

재미 한인단체들은 1941년 4월 독립운동의 통일과 강화를 위해 호놀룰루에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열었다. 해외한족대회에서는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봉대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라는 연합기관을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해외한족대회에서 나온 의결사항은 4월 27일 공동대회를 통해 조정되었고, 최종안은 4월 29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으로 발표되었다. 이 가운데 미주지역 독립운동과 관련된 두 가지 사항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외교활동을 위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이승만을 대미외교의 대표로 선정하였으며, 미국 국방공작을 원조하기 위해 한길수를 봉사원으로 선임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13개조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규정」을 결의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지도자들(하와이 호놀룰루)ⓒ국사편찬위원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지도자들(하와이 호놀룰루)ⓒ국사편찬위원회

미주지역 최고기관으로 탄생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지역적 차이로 미 본토에 집행부를 두고, 하와이에 의사부를 두는 이원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와이의 의사부는 원래 12명으로 조직되기로 하였으나, 1941년 5월 4일 전체 12명 가운데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대표 1명이 빠진 11명으로 조직되었다. 위원장은 이원순, 부위원장은 안원규가 맡았으며, 비서위원으로 국문서기에 도진호, 영문서기에 김원용, 민함나와 심영신이 부인구제회 대표로 의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결성은 1910년 모든 한인단체가 대한인국민회의 기치아래 통합된 것과 맞먹는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2.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주역인 김원용, 전경무, 심영신, 민함나

김원용(金元容, 1896~1976)

김원용은 189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도미 유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차이나호로, 1917년 5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콜로라도주 푸에블로(Pueblo) 지방에 정착하여, 1917년 8월 29일 국치기념식에서 ‘8년의 원통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푸에블로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1918년 4월 대한인국민회 푸에블로지방회 설립 청원서를 제출하여, 북미지방총회로부터 설립 인준을 허가받았다. 김원용은 그해 12월 푸에블로지방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그후 그는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으로 이주하여 1919년 1월 그곳 한인들과 함께 오하이오지방회 설립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그해 6월 오하이오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김원용은 1930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호놀룰루에서 개최되는 동지회 ‘동지회미포대표회(同志會美布代表會)’ 동지회 시카고 대표로서 하와이에 오게 되었다. 이승만은 동지식산회사의 파산 등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를 통일시키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약 800여명이 참석하는 ‘동지회미포대표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동지회미포대회를 통해 이승만은 동지식산회사의 파산과 기타 자신의 주변 제 사건으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상황에 변화를 도모했다.

동지회 미포대회에는 미주 각지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였는데, 시카고 대표로는 김원용이, 로스앤젤레스 대표로는 최영기, 하와이에서는 이상호·김진호·이원순·김윤배 등이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동지회는 ‘행동강령’을 정하였으며, “동지회는 오직 독립사업에 유일한 정치단체로 정함”이라고 선언하였다. 동지회 총재에 이승만, 이사장에 이용직, 중앙부장 겸 태평양잡지 주필에 김현구, 상무원(서기 겸 재무)에 김원용이 선정되었다. 특히, 이승만은 동지회 중심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중앙이사부의 조직을 강화하였다.

동지회 상무원 김원용은 미포대표회를 계기로 동지회가 민족 대업을 위한 민족 유일한 정치단체가 되었으니 앞으로 동지회로 모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동지미포대표회를 통해 하와이 한인사회가 동지회로 단합되었다고 판단하였으나, 자신이 하와이로 데리고 온 재무 겸 상무원 김원용, 국민보 주필 김현구와 한인기독교회 목사 이용직이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김원용은 1930년 10월 20일 이승만에게 보낸 사면청원 편지에서, “만일 동지회로 백만 각 대중을 단결하여 우리의 광복사업을 하려고 한다면 위선 인심을 집중하여야 할 터인데, 다만 한 사람이라도 감복시키지 못할지언정 불호감을 가지게 함은 무슨 의사이오니까”라고 반발하였다. 하와이 한인사회에는 김원용을 비롯한 김현구·이용직 등이 이승만에 대항하기 시작하면서 1931년 초반 대규모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대분쟁이 끝난 후인 1932년 초 교민단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 행위를 선전하기 위해 ‘선전부’를 조직하였는데, 선전부장에 정두옥, 각부 비서에 김원용을 비롯하여 김현구·이용직, 교섭위원에 한길수, 재무에 차신호가 임명되었다. 교민단 선전부에서는 제네바 국제연맹 의장인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에게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호소장을 선전부 국장 정두옥, 구미부위원 한길수, 한국부위원 승용환, 원동부위원 김현구의 이름으로 보냈다.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1932년 말에 접어들어 ‘국민회’로 복구하자는 여론이 있어 났고, 1933년 1월 3일 하와이 교민단 대의회 결의안에 의하여 교민단을 해체한 후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복구하기로 하였다. 새로 복구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총회장에 이정건, 부회장에 강영효가 선출되었고, 총무에 한길수, 서기 겸 재무에 김현구, 법무에 김원용, 학무에 서진수, 군무에 송진중, 실업부에 유명옥, 구제원에 김백수를 선거하였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이봉창의 의거 직후 ‘한인애국단 하와이지부’가 비밀리에 만들어졌고, 1934년 4월 10일에 하와이애국단이 조직되었다. 김원용은 조병요·안창호·이대진·최찬영·유진석·이봉수·김예윤·박이조·김형택·안영호·양성학·김현구 등과 함께 하와이애국단 조직에 참여하였다.

1937년 2월 하와이 국민회 대의회에서 총회장에 조병요, 부회장에 안원규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서기에 김현구, 재무에 황인환, 실업부원에 권도인, 연무부원에 이정건, 청년부원에 양유찬, 외교원에 조세은, 법무원에 김원용, 학무원에 김윤배, 사교원에 박봉집이 임명되었다. 그해 7월 중일전쟁이라는 새로운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하와이 국민회에서는 8월 7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회의를 개최하여 독립운동에 방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의를 하였다. 8월 18일 국민대회를 열어 혈성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하와이 국민회에서 거둔 혈성금의 80%는 임시정부에 보내고, 나머지 20%는 독립운동 선전비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8월 27일 임시정부의 활동을 전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찬무부(贊務部)를 조직하기로 하였는데, 찬무부에는 재무부·선전부·기밀부를 두고 혈성금의 수합과 관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재무부에는 권도인·고덕화·임성우·정운서, 선전부에는 김원용·정두옥·한길수·홍한걸, 그리고 기밀부에는 박상하·김진호·정봉관·김현구를 임명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에 대미외교의 활성화를 위해 사무확장과 외교방법의 개선을 요구하였고, 주미외교위원부 조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원용과 이원순을 워싱턴에 보냈다. 김원용은 임시정부의 동의를 얻어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생각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독자적인 외교사무소 설립을 반대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1943년 10월 4일 이승만을 외교고문으로 승차시키고, 주미외교위원부를 새로 조직하는 결의안을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후 임시정부의 명확한 답변이 없자, 12월 27일 의사부 위원장 안원규 명의로 이승만과의 공식 단절을 선언하고 워싱턴사무소 설립을 선포하였다.

1943년 12월 23일 워싱턴사무소 개설 등의 문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동지회가 탈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미한족연합회에서는 독자적으로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1944년 6월 10일 워싱턴에 외교사무소를 설립하였다. 워싱턴사무소에는 의사부에서 김원용·도진호·전경무 3명과 집행부에서 김용중 등 4명을 선임하였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위원장 김원용과 대외교섭 업무를 맡은 선전부장 전경무만으로 외교사무를 진행하였다.

연합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과 같은 국제기구를 조직하기 위한 대규모 국제회의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워싱턴사무소의 김원용과 전경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45년 2월 22일 중한민중동맹단의 한길수·정덕근과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대비하기 위한 공식적인 회합을 하게 되었다. 그후 충칭의 임시정부에서도 주미외교위원부에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대비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을 단장으로 하고, 김원용 등 9명을 임시정부 대표로 선정하여 통보하였다. 그러나 김원용은 하와이 의사부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하면서 대표를 사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에서는 워싱턴사무소의 김원용과 전경무를 반드시 샌프란시스코회의 정부대표단에 참가시킬 것을 특별히 지시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개최되기 전인 1945년 4월 1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다. 해외한족대회에서는 연합국의 국제연합창설대회에 참가할 해외한족대표단 8명을 구성하였다. 해외한족대표단은 한시대를 단장으로 재무 유진석, 단원에는 전경무 등 6명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에 가입된 국가들만 참가자격이 있기 때문에, 주미외교위원부나 해외한족대표단 모두 국제연합창설대회에 참가권을 얻지 못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원용은 1945년 5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개년 계획」이라는 문건을 발표하였다. 이 문건에서 김원용은 재미한인들은 해방된 조국의 국가건설을 위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다고 하면서, 1년 동안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야만 하는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으로 조국이 해방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해방된 조국건설을 위해 대표들을 국내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1945년 10월 24일 하와이 의사부 국내파견대표로 김원용·도진호·최두욱 등 9명을 선정하였고, 집행부는 한시대·송종익·김호·김병연·김성락을 대표로 선임하여 총 14명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내파견대표단’을 구성하였다. 대표단은 제1차로 1945년 11월 4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이듬해 2월 12일 제2차 대표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국내활동을 벌였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한국파견대표단을 초청하여 이들이 국내의 정세와 내부사정을 자세히 조사해서 보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국 파견 대표단ⓒ국사편찬위원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국 파견 대표단ⓒ국사편찬위원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들은 국내의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 협력을 통해 민생경제를 일으키고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기반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내 대표단은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대부분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표단 단장 한시대와 전경무·안정송은 1946년 9월 초 선편으로 서울을 떠나 9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김호는 국내에 남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피선되어 정치활동을 하였다. 김원용도 하와이로 돌아갔으나, 미군정청의 민정장관으로 발탁된 안재홍의 후임으로 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1947년 2월 10일 다시 국내에 들어왔다. 김원용과 김호는 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중간파 세력의 결집을 통한 정당통합운동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이 크게 타격을 받게 되자, 김원용과 김호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정당 통일운동에 매진하였다. 그후 김원용·김호는 신진당을 탈당하고 건민회의 이극로와 함께 중간 정당 통일을 위한 신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김원용은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가 주도한 민주독립당의 공동의장으로 선임되었고, 10월 20일에는 170명의 중앙집행위에 선출되었다. 그후 중간파 정당의 협의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48년 1월 24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김원용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미주지역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8년 간 모으고 많은 동포들과 인터뷰를 하였다. 그리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같이한 중가주 리들리(Reedley)에 있는 김호의 저택에서 『재미한인오십년사』라는 저술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 책자는 미주지역에 한인들이 발을 디딘 이후 50년간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집대성한 것으로, 미주 동포들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공헌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였다. 1976년 2월 9일 신장염으로 향년 79세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전경무(田耕武, 1898~1947)

전경무는 「흥사단 단원 이력서」에 의하면, 1898년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아버지 전낙준(田洛俊)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1900년까지 거주하였다고 한다. 황해도 곡산에서 출생하여 본적지인 평북 정주군 아이포면(阿耳浦面)에서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1904년이나 1905년 경 전 가족이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고 기재되어 있다.

어릴 때 하와이에서 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학원에서 1년간 수학한 후 미 본토로 와서 미시건대학(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에 입학하였다. 미시건대학 재학 당시 토론반 대표로 영국 캠브리지대학과 토론대회에서 잇달아 2년간 우승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교류를 하면서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고국에 가서 1년간 국내 사정을 연구하면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26년 6월 17일 하와이로 돌아왔고, 1930년 6월 농장지대인 캘리포니아 생거(Sanger) 지방에서 한인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주선소를 설치하여 노동주선 활동을 하였다.

대학생 때부터 전경무는 청년 웅변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1932년 1월 일제가 중국 상하이(上海)를 침공하자 대한인국민회 외교부에서는 외교원으로 임명하였다. 일제가 상하이를 불법적으로 침략하자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원동사변임시위원부를 설치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원동사변임시위원부에서 전경무는 김병연과 함께 상무원으로 안창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1932년 시카고에서 3년 가량 활동하다가, 1934년 12월 다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가족들이 있는 하와이로 돌아갔다.

1930년대 후반부터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통합을 통해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재미 한인단체들은 1941년 4월 독립운동의 통일과 강화를 위해 호놀룰루에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열었다. 해외한족대회에는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봉대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라는 연합기관을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재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어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호놀룰루에 의사부로 구성된 이원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와이의 의사부 위원장은 이원순, 부위원장은 안원규가 맡았으며, 민함나와 심영신이 부인구제회 대표로 의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일제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한국독립에 대한 선전을 강화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선전부를 새로 설치하고 1942년 1월 전경무를 선전부장에 임명하였다. 또한 의사부에서는 특별조직으로 국방위원회를 두고 위원장에 김현구, 조사연구위원회에 전경무 등을 임명하였다. 하와이에서는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와 동지회의 기관보 『태평양주보』를 합동하기로 하고, 『태평양주보』는 영문으로 발행하기로 하였다. 1942년 1월 21일부터 『국민보』와 『태평양주보』가 합동으로 발행되면서, 신문의 영문난을 첨부하였는데 전경무가 영문난의 주필을 맡았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중국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고 미주 한인단체와 긴밀한 협조를 위해 1942년 전체회의에서 ‘중경특파원’을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집행부의 특파원으로는 김호를, 의사부 중경특파원으로는 전경무를 선임하였다. 전경무는 1942년 6월 13일 미국 국무장관 헐(Cordell Hull)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경특파원의 목적은 만주와 중국에서 일제와 싸우는 한인들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영어로 임시정부 외무부의 대외업무를 지원하는 활동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미주 한인대표가 충칭에 갈 수 있게 교통편의를 제공해 달라고 하였다. 중경특파원 준비를 하면서 전경무는 1942년 10월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로 가서 이승만에게 협조를 구하였으나, 중경특파원 계획은 이승만의 비협조와 임시정부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더이상 추진되지 못하였다.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남태평양 지역에 징용된 한인들이 미군 포로가 되어 미 본토 및 하와이로 들어왔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의 경우 통역으로 온 한인 2세들과 목사들에 의해 한인 전쟁포로의 실체가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1943년 12월경 전경무는 직접 호놀룰루로 가서 확인하고, 한인 전쟁포로들이 일본군 군인·군속 출신의 청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전경무는 1944년 2월 하와이 군정(Office of the Military Governor of Hawaii) 당국에, “한인들이 일본정부에 전혀 동조하지 않고 한인으로서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도록 신중히 고려해 줄 것과, 그 사람들이 태평양 전역에서 연합군의 병력에 도움이 되고자”하는 의지와 희망에 따라 일종의 군사 작전에 참여하게 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는 미국 전쟁부의 맥클로이(John J. McCloy) 차관보에게 「미군 포로수용소에 있는 한국인과 그들의 노동력 이용」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한인 전쟁포로를 이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전쟁포로의 이용은 현실적으로 국제조약에 위반될 수 있기 때문에, 한인 포로들이 직접적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여하기는 힘들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중경특파원으로 임명된 전경무는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에 파견되어, 대미외교의 활성화를 위해 사무확장과 외교방법의 개선을 이승만에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미외교위원부에서 한인들의 실제 활동과 계획에 필요한 외교방법 개선을 하기 어려우니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자체 외교사무소를 마련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같은 전경무의 제안에 재미한족연합위원가 동의하면서 워싱턴 외교사무소 설립을 추진해 나아갔다. 전경무의 주장으로 재미한족연합회에서는 1943년 10월 4일 이승만을 외교고문으로 승차시키고, 주미외교위원부를 새로 조직하는 결의안을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후 임시정부의 명확한 답변이 없자, 그해 12월 27일 의사부 위원장 안원규 명의로 이승만과의 공식 단절을 선언하고 워싱턴사무소 설립을 선포하였다.

1943년 12월 23일 동지회가 워싱턴사무소 개설 문제 등을 이유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탈퇴를 선언하게 하였다. 그래서 재미한족연합회에서는 독자적으로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1944년 6월 10일 워싱턴에 외교사무소를 설립하였다. 원래 중경특파원 파견을 위해 모금된 하와이 의사부의 자금은 대부분 전경무의 워싱턴 활동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워싱턴사무소에는 의사부에서 김원용·도진호·전경무 3명과 집행부에서 김용중 등 4명을 선임하였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위원장 김원용과 대외교섭 업무를 맡은 선전부장 전경무만으로 외교활동을 하였다.

전경무는 워싱턴사무소에서 선전외교 활동의 일환으로, 뉴욕 콜럼비아 라디오 방송본부에서 전 미국을 상대로 ‘한국은 왜 독립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세 번이나 방송을 하였다. 미국의 라디오 방송이나 교육부 등 주요기관, 그리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여 연설로 한국문제를 선전하고 미국인의 동정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 우정국의 한국 우표 발행에 참여해 1944년 11월 2일, 미국사회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들어간 한국우표를 소개하였다.

미국에서 발행한 태극기 우표
미국에서 발행한 태극기 우표

1944년 11월 동지회가 탈퇴한 가운데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전체대표회가 개최되어 주미외교위원부를 재조직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서 위원장에 김원용, 부위원장에 한시대, 총서기에 전경무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충칭의 임시정부에서는 동지회 대표가 선출되지 않은 주미외교위원부의 조직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는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을 통보하였다. 이렇게 되자 전경무는 워싱턴사무소의 김원용을 위원장과 함께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전경무는 1944년 9월 15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되는 국제연합구제부흥회(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에 참가하기 위해 교섭하여, 김용중과 임병직에게 참관자 자격을 획득하게 하였다. 이 대회는 비정치적인 대회로 미주 한인이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였다는 점에서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45년 1월 5일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스(Hot Springs)에서 열린 태평양국제대회(International of Pacific Relation)의 참가 교섭을 주선하여 참관자의 자격을 얻었고, 1944년 10월 19일 전경무·정한경·유일한을 공동대표로 선정하였다. 이 대회에서 전경무 등 한인대표들은 카이로선언에서 결정된 한국독립을 6개월 내에 달성될 수 있도록 결의하게 하였다. 이밖에 국제기업인대회와 국제연합통화회담 등 국제회의에 참가교섭을 벌였으나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1945년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과 같은 국제기구를 조직하기 위한 대규모 국제회의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워싱턴사무소의 김원용과 전경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45년 2월 워싱턴에 있는 한인단체 대표들의 공식적인 회합을 하게 되었다. 전경무와 한길수는 1945년 3월 9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중한민중동맹단을 대표하여 미 국무부 장관 스테티니우스(Edward R. Stettinius Jr.)에게 한인 참가를 청원하는 공식서한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국제연합창설대회에는 연합국에 가입된 국가들만 참가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주미외교위원부나 해외한족대표단 모두 국제연합창설대회에 참가권을 얻지 못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는 1945년 4월 25일 46개국 대표와 1,500여명의 신문기자, 35,000여명의 방청객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참가권을 얻지 못한 주미외교위원부나 해외한족대표단에서는 합동으로 대외활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공동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5년 워싱턴사무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김원용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이 되어 하와이로 돌아가자, 전경무가 워싱턴사무소에서 외교활동을 주도적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및 의사부와 협의하여 워싱턴사무소에 연구부·선전부·교섭부를 두고 인원도 증원하여 조직을 크게 확충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해방된 조국건설을 위해 대표들을 국내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세부적인 것은 워싱턴사무소 선전부장인 전경무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미국 국무부와 전쟁부에 편지를 보내, 한국의 자치행정을 돕고 또 미군정청의 영어통역을 통해 행정사항을 협력하기 위해 한국 입국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미국정부에서 이같은 요청을 받아들였고, 의사부에서는 전경무를 비롯한 9명의 한국파견대표단을 선정하였고, 집행부에서는 한시대 등 5명을 대표로 선정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 제1진 한시대·김호·전경무·송종익·김병연·김성락 6명은 미국 육군부에서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1945년 11월 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제2진은 다음해 2월 12일 호놀룰루에서 미군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한국파견대표단을 초청하여 이들이 국내의 정세와 내부사정을 자세히 조사해서 보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경무 등 대표단들은 국내의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 협력을 통해 민생경제를 일으키고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의결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에 대해, 전경무는 미국정부의 방침을 수용하되 가능한 그 기간을 단축시키자는 의견을 밝혔다. 그후 한국파견대표단의 전경무·한시대·김호는 충칭에 있던 신한민주당, 만주에 있던 조선혁명당, 신한민족당내의 합동반대파 등과 협의하여 중간세력 결성을 모색하였다. 대표단과 중간세력은 1946년 9월 15일 김원용이 사회를 보고, 김호가 의장으로 선출된 통합대회를 개최하여 ‘신진당’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였다.

한국파견대표단의 외교원을 맡은 전경무는 국내에서 중립을 표방한 외교협회(회장 조소앙)의 총무로 선임되어 국제적인 외교활동을 하였다. 조선체육회에서는 제14회 런던올림픽에 한국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치기 위해 그를 영입하였다. 조선체육회에서는 1946년 6월 6일 올림픽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유억겸, 부회장에 전경무와 이상백을 선임하였다. 전경무는 한국선수들의 런던올림픽 참가를 위해 미국 올림픽위원회의 후원을 교섭하는 등 국제적으로 활동을 하여 1947년 5월 16일 조선체육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내 대표단은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대부분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돌아간 전경무는 한국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 상업 발전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전경무는 1948년 런던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에 한국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국제회의에 참석하러 가다가 1947년 5월 29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장례는 6월 18일 서울운동장에서 체육장(體育葬)으로 치루어졌다. 전경무의 외동딸 패트리시아 던(Patricia Dunn)은 ‘지붕위의 말괄량이(1955)에 주연으로 라이프지에 소개되었으며, 많은 뮤지컬 영화나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여 재즈무용을 새로운 예술로 대중화한 유명한 무용가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심영신(沈永信, 1882~1975)

심영신은 황해도 송화군에서 1882년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16년 하와이의 조문칠의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오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우리 민족이 자주민이며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소식은 3월 9일 하와이 한인사회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하와이의 한인들은 3월 15일 오후 7시 30분 국민회 총회관에서 대한인부인회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일어나면서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자, 시국문제를 들어 ‘대한인부인 적십자회’를 조직하고, 회장에는 송매리(송헌주 부인), 부회장에서는 김마줄, 서기에는 김유실을 선출하였다. 3월 29일에 열린 제2차 대회에서 심영신 등 각 지방 여성대표들이 참여하여 대한부인구제회 결의안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하와이에 있는 모든 단체의 여성대표들이 모여 다음과 같이 대한부인구제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대한부인구제회는 하와이의 대표적인 여성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심영신은 1929년 대한부인구제회 구제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분파투쟁이 1930년 말 절정에 다다랐고, 대한부인구제회는 1930년 12월 22일 개최된 동지식산회사의 주주총회에 참석할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임원들 사이에 의견이 충돌되어 몸싸움이 있은 다음 부인구제회는 교민단(국민회)파와 동지회파로 분열이 되었다. 1931년 반이승만 세력들이 분파투쟁에서 승리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파와 그에 반대하는 교민단파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이에 따라 하와이를 대표한 부인구제회도 동지회와 교민단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심영신은 국민회측 대한부인구제회에 참여하였으며, 1937년 대한부인구제회 부부장을 거쳐 회장이 되었다. 그후 국민회와 동지회 대한부인구제회의 합동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국민회측 회장으로서 찬의 박신애와 서기 승정한 등 11명의 임원과 함께 대표회에 참석하였다.

하와이 한인들은 미국 국방을 조직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1940년 10월 13일 6개 단체 24명의 대표들이 모여 ‘연합한인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심영신은 국민회측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곽명숙·김차순·김매들린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였다. 한편, 1940년 9월 2일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에 대해 광복대업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서로 합동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따라 11월 5일부터 북미와 하와이의 국민회와, 동지회의 대표가 하와이에 모여 합동준비위원회를 열고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1941년 4월 20일부터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북미 2개 단체와 하와이 7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그리고 해외한족대회에서의 결정에 따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라는 미주지역 최고기관이 결성되었다.

해외한족대회에는 북미지역에서 두 단체(북미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연합회)와 하와이에서 7개 단체(하와이 국민회, 동지회, 중한민중동맹단, 대조선독립단,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국민회쪽 대한부인구제회와 동지회쪽 대한부인구제회) 대표 15명이 참석하였다. 9개 한인단체 15명의 대표들이 호놀룰루에 회집하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심영신은 민함나와 함께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에 따라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총괄하기 위한 최고 지도기관으로, 지역적 특성상 크게 두 조직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를 두고, 북미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두었다.

하와이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조직되었는데, 위원장 이원순, 부위원장 안원규 등이 선임되었고, 심영신은 강상호·민함나와 함께 의사위원이 되었다. 1942년 2월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대적으로 모금하기 위해, 독립금 예약 수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심영신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각 단체에서 모두 26명의 독립금 수봉위원에 선임되어 독립금 예약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미주지역에서는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확대되자, 1943년 12월 23일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심영신은 1944년 5월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외교위원이 되었다. 1944년 8월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명령에 의거해 미주 한인사회에 전체대표회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하와이 의사부에서는 이를 기회를 의사부 조직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의사부는 위원 전체대회의 의사제와 실무 부서인 6부로 나누는 이원체제로 하고, 6부 위원을 상근직화 하였다. 이때 심영신은 하와이 의사부의 교제부 부원으로 선출되었다.

심영신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미국 육군부 소속 건축부에서 사업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데에도 앞장을 섰다. 그래서 1943년 8월 월급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또한 심영신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 주요한 활동을 수행하면서도,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심영신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위하여 정성을 보내주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그 외 1945년 3월 10일 하와이 여성들은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국내 동포들을 위해 연합부인구제회를 조직하였는데, 민함나가 회장에 심영신이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심영신은 대한부인국민회의 중앙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75년 2월 16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민함나(閔함나, 1888~1952)

민함나는 경기도 부평군에서 1888년 태어났다. 1914년 1월 20일 차이나호를 타고 민의식의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하와이로 이민을 온 이후 대한부인구제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대한부인구제회는 3·1운동의 소식이 하와이에 전해진 1919년 3월 10일 국내에서 만세시위 운동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와이 각 지방 여성 대표자들도 3월 15일 「부인공동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을 후원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9일 제2차 대회에서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하고, 4월 1일 하와이의 모든 단체의 여성대표들이 모여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그후 대한부인구제회는 하와이의 대표적인 여성단체로서 한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1930년 12월 22일 동지식산주식회의 주주총회에 참석할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모인 회의에서, 임원들 사이에 의견 충돌과 몸싸움이 있은 다음 대한부인구제회는 교민단파와 동지회파로 분열되었다.

민함나는 동지회측 대한부인구제회에 주로 참여하였으며, 한인기독교회의 평신도대표회 대표원으로 정치적으로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였다. 1938년 대한부인구제회 연례대표회에서 와히아와(Wahiawa)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39년 연례대표회에서는 부회장 겸 힐로(Hilo) 지방대표가 되었다. 1941년 3월 3일 대한인부인구제회 제19차 대표회에서 중앙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미주지역의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통일하기 위해 1941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13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었다. 해외한족대회에는 북미지역에서 두 단체(북미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연합회)와 하와이에서 7개 단체(하와이 국민회, 동지회, 중한민중동맹단, 대조선독립단,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국민회쪽 대한부인구제회와 동지회쪽 대한부인구제회) 대표 15명이 참석하였다. 9개 한인단체 15명의 대표들이 호놀룰루에 회집하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민함나는 심영신과 더불어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에 따라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총괄하기 위한 최고 지도기관으로 결성되었다. 그 조직은 지역적 특성상 크게 두 조직으로 나뉘었는데,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를 두고, 북미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두었다.

하와이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조직되었는데, 위원장 이원순, 부위원장 안원규 등이 선임되었고, 민함나는 강상호·심영신과 함께 의사위원이 되었다. 동지회측 대한부인구제회에서 활동하던 민함나는 1941년부터 중앙부장을 맡게 되었다. 1942년 2월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대적으로 모금하기 위해, 독립금 수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민함나는 호놀룰루의 누아누우(Nuanuu Street)에서 릴리하(Liliha Street)까지 독립금 예약을 담당하였고, 1943년에도 독립금 예약을 받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미주지역에서는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확대되자, 1943년 12월 23일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말았다. 동지회가 연합회에서 탈퇴하자 동지회 대표로서 의사부에 참여해 온 민함나를 비롯한 김영기·안현경·도진호·정영옥 등 5명은 반이승만 성향으로 돌아섰고, 도진호는 동지회를 탈퇴하고 국민회에 가입하였다. 1944년 5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외교위원이 되었다.

민함나는 1945년 3월 10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해 결성된 전후조선구제위원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어, 해방 이후에도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을 위해 많은 물품을 모아 국내에 보냈다. 또한 하와이에 온 이후로 1945년까지 독립금 등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1952년 9월 4일 63세로 별세하였으며, 호놀룰루시내 오아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의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미주지역 한인독립운동 단체가 통합되어 성립한 단체인 것이 가장 큰 의의다. 기존의 미주지역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은 다양한 단체로 분열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이들 단체는 서로 반목까지 하고 있어 독립운동 역량이 저해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한족대회를 통하여 미주지역 주요 단체인 국민회, 동지회 등이 하나의 단체에 소속되어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또한 한족연합위원회는 기존의 단순한 재정후원 범위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외교역량을 통하여 독자활동을 하는 단체로 변화했으며 이는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가 단순히 후원차원에서 머물렀던 상황을 일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주체적이고 단일화된 독립운동 지원 역량은 임시정부에도 영향을 끼쳐 중국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촉진하여 독립운동 역량이 임시정부로 모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해방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국내에 대표단 파견했고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 협력을 통해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기반을 마련하려 노력했다. 이는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에서 새로운 공간을 열며 좌우합작운동의 촉진제가 되었으며 통일국가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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