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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익중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0년

주요공적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의 지휘부로 활동, 고창읍성 전투에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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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중 / 기우만 / 박원영

김익중 , 1851 ~1907 , 애국장 (1990) 기우만 , 1846 ~1916 , 독립장 (1980) 박원영 , 1848 ~1896 , 애국장 (1995)

위에서는 나라를 파는 대신들이 의병에게 군사를 멋대로 일으킨 반역자라는 이름을 씌우면서 왜놈의 털 한 오라기도 상할까 두려워하고, 아래에서는 행실이 좋지 않은 부호들이 의병에게 폭도의 괴수라는 이름을 씌워서 제 집 창고에 쌓아 둔 반 톨의 곡식이라도 손해볼까 겁을 낸다. -기우만-

1. 기우만,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

1) 단명한 형제를 대신하여 조부의 학문을 잇다

기우만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 탁곡(卓谷)에서 아버지 기만연(奇晩衍, 1819-1876)과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회일(會一), 호는 학정거사(學靜居士)·송사(松沙) 등이다. 행주기씨인 그의 집안은 16세기 이래 장성에 세거해왔지만 그는 조부인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을 따라 장성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였다. 그는 살았던 마을이나 산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었다. 즉, 학정거사는 그가 살았던 창촌의 학정산(學靜山)에서 연유한 것으로, 조용히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정이(程頤)의 가르침을 실천하리라는 의미가 배여 있다. 그는 만년에 송사라는 호를 즐겨 썼는데, 그가 살았던 장성의 하사(下沙)와 월송(月松) 마을에서 한 글자씩 따서 호로 삼은 것이다. 한편, 노사의 백형 우기(宇虁, 1839-1867)와 중형 우번(宇蕃, 1842-1872)은 서른살 내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10년 후 계제인 우업(宇業, 1856-1882)이 타계했으며, 하나 남은 동생 우몽(宇蒙, 1852-1907) 역시 그보다 약 10년 앞서 세상을 떴다. 형제들의 계속된 죽음을 지켜 본 그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기우만 선생 영정ⓒ독립기념관
기우만 선생 영정ⓒ독립기념관

그는 일찍부터 기정진의 학문을 익혔다. 그의 조부가 밝힌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은 이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으로 독특한 사상인데,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 혹은 근세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기정진의 학설은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논쟁적이고 실천성이 강했는데, 그는 병인양요 당시 위정척사운동을 선도하는 상소운동에 앞장섰다. 1840년대에 이르러 그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이 크게 늘어나 이른바 노사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는 약 600명의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재전(再傳) 제자까지 합하면 노사학파는 무려 4천여 명이나 되었다.

기정진은 제자들 가운데 이른바 ‘노문삼자(蘆門三子)’로 불렸던 김석구(金錫龜)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하였다. 물론 그의 제자이자 친손자이기도 한 기우만이 조부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1870년에 기우만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874년의 동당시(東堂試)에서 낙방했다. 1876년에 그는 부친을 잃었고, 그 3년 후에 조부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거듭된 슬픔 속에서도 그는 조부의 학풍을 전수하여 강학 활동에 힘쓰는 한편, 조부의 흩어진 유고를 정리하여 『노사집(蘆沙集)』(1883)을 간행했다. 이후 그는 노사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약 1,200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창평의 명문 유생 고광순(高光洵)은, 그를 ‘노사학파를 이끄는 영수(領袖)로서 기산림(奇山林)’이라 불렀다.

2) 전라도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

1890년을 전후하여 전라도에는 동학이 크게 확산되었다. 당시 수령과 탐관오리의 학정(虐政)과 가혹한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대거 동학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를 기반삼아 최시형(崔時亨)은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을 전개했으며, 전라도 고부에서는 1894년 음력 정월 농민들이 떨쳐 일어났다.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을 내쫓기 위해 가렴주구에 시달린 농민들과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고부농민봉기에서 비롯한 동학농민혁명은 삽시간에 전라도에 확산되었는데, 기우만이 살던 마을은 휩쓸리지 않았다. 그의 명성만큼 신망도 두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수습에 앞장서서 향음주례를 시행하였고, 광주부 관찰사 이도재(李道宰)에게 국가의 은혜와 의리를 베푸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나주목사 민종렬을 비롯한 나주 수성군의 공로를 칭송하는 「나주평적비(羅州平賊碑)」를 지었고, 장흥읍성을 지키다 사망한 박헌양(朴憲陽)을 기리는 「장흥부사박공제단비(長興府使朴公祭壇碑)」를 찬술하였다.

전라도는 동학농민혁명의 후유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지만, 조선 정국은 어지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1895년 음력 8월 명성왕후가 일본의 사주를 받은 낭인배에 의해 시해되었다. 음력 11월에는 모든 국민이 상투를 잘라야 한다는 이른바 단발령(斷髮令)이 내렸다. 이에 기우만은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단발령을 거두어 달라고 상소하였다.

대개 국모의 원수는 곧 신하들이 와신상담해야 할 것인데, 국가의 형세가 날로 깎이어 설욕할 희망이 없습니다. 전장과 문물은 여러 성조에서 전수된 옛 법도인데 하루아침에 변개하여 다시 회복할 기약이 없습니다. 지금 훼발령(毁髮令)이 이르니 괴란됨이 지극합니다. (중략) 하물며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상투를 자르고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상투를 보존하고 망하는 것이 나으며,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상투를 자르고 사는 것보다 상투를 보존하고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을미소」,『송사선생문집』권 2, 경인문화사, 1990).

기우만은 명성왕후를 시해한 역적의 복수와 단발령의 철폐, 그리고 옛 제도의 복구와 개화세력의 척결을 주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상소는 국왕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전라도의 모든 고을에 이러한 내용의 통문을 보내어 함께 호소할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가 대규모 연명상소를 계획했던 것이다.

이 무렵 단발령에 충격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고 일어났다.

체두관(剃頭官)을 각부에 파견하여 날짜를 정하여 단발을 독촉하였다. (중략) 이때부터 온 나라가 물 끓듯 하고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강원도의병은 서상렬(徐相烈) 등이 일으키고, 유인석(柳麟錫)은 경기도에서 일어나고, 주용규(朱庸奎)는 충청도에서 일어나고, 권세연(權世淵)은 안동에서 일어나고, 노응규(盧應奎) 정한용(鄭漢鎔)은 진주에서 일어나니 원근에서 호응하였다.(황현,『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55, 192쪽).

체두관들이 사람들의 상투를 강제로 자르자, 온 나라가 물이 끓듯 시끄러웠다는 것이다. 단발을 반대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한 것이다.

하지만 전라도에서는 의병의 움직임이 없었다.

전 참봉 기우만이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고 참판 기정진의 손자로, 가풍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대를 받았으나 다른 재간은 없었다. 이때 호남사람들이 다른 도에서는 모두 의병이 일어났으나 전라도만이 의병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겨 기우만에게 권유하여 기치를 세우도록 하였다(『매천야록』, 198쪽).

호남에만 의병이 일어나지 않음을 수치로 여긴 사람들이 기우만을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라도는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로 말미암아 의병을 일으킬 형편이 못되었다. 유학자들은 전라도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겨 노사학파를 대표하는 기우만더러 의병을 권했던 것 같다. 앞서 기우만은 복수토적과 단발령 반대를 주장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한 바 있었다. 그것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마침 영남의 예안과 안동에서 단발령과 변복령을 성토하는 통문이 장성에 도착했으며, 충북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의 격문도 전달되었다. 기우만은 국가와 왕실을 부흥시키는 일은 오직 의병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였다. 1896년 음력 1월, 그는 전라도 각 고을에 격문을 발송함으로써 비로소 호남의병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임진년 이래 우리의 원수인 왜적의 구축, 개화파 처단, 고종의 환궁, 옛 제도의 복구와 단발령을 철폐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고 촉구하였다.

바야흐로 지금 주상은 몽진(蒙塵)하시고 국사가 혼란하여 의병이 메아리처럼 일어났는데도 호남은 오래도록 적막하였습니다. 의기가 유독 뒤쳐져 그런 것이 아니라 동학란 이후에 민력(民力)이 소생하지 못하여 시일이 늦어진 것입니다. 충신과 의사가 아침저녁으로 부심하여 지금에야 이렇게 통문을 보냅니다. (중략) 다만 각 고을의 군위가 조금 진작되고 약속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려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자는 뜻으로 마땅히 다시 통고함이 있을 것입니다(「격문」,『송사선생문집』2).

그동안 전라도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못한 원인은 동학농민혁명이후 백성의 힘이 회복되지 못한 때문으로 보았다. 그는 군량과 무기의 확보, 연해 고을의 방곡(防穀), 정예의 의병 선발, 토색 금지 등을 강조하였다. 근왕의병으로서의 대의명분에 걸맞게 활동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1896년 음력 2월 7일(양 3월 20일), 기우만은 장성향교를 도회소(都會所), 양사재(養士齋)를 향회소(鄕會所)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호남 최초의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기우만이 주도하는 장성의병은 근왕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장성출신으로서 의병에 적극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기삼연(奇參衍) 기동관(奇東觀) 기우익(奇宇益) 기재(奇宰) 기주현(奇周鉉) 김익중(金翼中) 김양섭(金良燮) 박원영(朴源永) 양상태(梁相泰) 이승학(李承鶴)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기삼연 기재 김익중 박원영은 기정진의 제자들이었다. 행주기씨와 노사학파가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창평 출신의 고광순이 기우만이 주도한 의병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12대손이자, 고경명의 아들 인후(因厚)의 11대 사손(祀孫)이었다. 그는 왜란 당시 세 부자가 순절한 의병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하였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그에게 창평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키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제안을 뿌리치고 장성의병에 참여하여 상소문과 통문을 작성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적극 협력하였다.

한편, 음력 2월 10일 나주에서도 의병장 이학상(李鶴相)을 중심으로 의병의 편제를 갖추었다. 나주의 경우에도 1895년 음력 섣달 중순 충청도 홍성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을 받았다. 1896년 음력 정월 29일에는 기우만이 보낸 격문을 받은 후 의병 준비를 서둘렀다. 나주의 양반 유생과 향리들은 기우만이 보낸 격문을 관내에 발송한 후 음력 2월 1일 향교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사흘 후 이들은, ‘사람마다 난신적자를 베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중략) 근왕하자고 이미 으뜸으로 외쳤으니 선비치고 누가 따르지 않으리오.’라는 내용이 담긴 통문의 말미에 100여 명이 서명하여 장성향교로 보내며 호응하였다.

나주의병은 먼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봉기의 배경과 정당성을 알렸다. 즉,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근왕에 있다는 점과 개화파 참서관 안종수의 잘못을 낱낱이 밝힌 것이다. 또한 이들은 복수토적하기 위해 개화파와 일본세력을 구축하고, 옛 제도의 복구와 국왕의 환궁을 추진할 것임을 내세웠다. 요컨대, 나주의병의 거병 목표가 복수토적과 단발령 철폐 등 반개화·반침략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음날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 장성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나주향교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모습을 본 사람이 “옛날 임진왜란에 김건재(金健齋)는 나주에서 창의하고, 고제봉(高霽峰)은 광주에서 창의했는데, 오늘날 그대들이 본주(本州)에서 창의하고 송사는 장성에서 창의하였으니 진실로 추앙할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나주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양반 유생과 향리 계층이 연합하여 읍성을 지킨 유일한 고을이며, 전라도의 연해 방어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우만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장성의병과 나주의병 사이에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장성의병은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 나주의병은 나주의소(羅州義所)로 명칭을 확정했다.

3) 장성의병의 활동과 해산

음력 2월 14일, 장성의병의 의병장 기우만과 나주의병의 의병장 이학상은 나주의 민고(民庫)에서 모든 장졸(將卒) 의유(義儒)와 함께 의병으로서의 예를 갖추고 하늘에 맹세하였다. 이틀 후 기우만과 이학상은 함께 제문을 만들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사우고지(祠宇故址)에 제를 올렸다.

저 옛날 임진년에 나라 운수 비색하니

선생이 먼저 외치자 의병이 모두 일어났네 (중략)

역적의 무리 농간을 부려 섬 오랑캐 다시 날뛰니

선왕의 옛 제도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네

우리 백성 상투 잘라 왜놈을 만들고야 말겠으며

임금은 밖으로 파천하여 하마 한 달이 지났으니

신하 백성 원통하고 절박하나 분을 풀 땅이 없구려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 원수 갚길 맹세했소 (중략)

선생께 명령을 받자고 온갖 정성 다하오니

선생은 부디 도우시어 큰 난리를 맑혀 주소서

(이병수,「금성정의록」,『독립운동사자료집』3, 1971, 77-79쪽)

임진년의 원수로 국권을 침탈한 일본을 물리치고 파천한 임금을 모셔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니 김천일 의병장의 도움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제문에도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음력 2월 18일, 기우만은 장졸과 함께 나주의 진산(鎭山) 금성산에 있는 금성당(錦城堂)에 제사를 올렸다. 금성산신에게 일본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다음날 기우만은, 관군과 선유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시 상소문을 지어 올렸다. 그는 선유사의 파견과 몽진의 부당성을 언급하며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개화 세력을 섬멸하고 임금을 모시고 환궁하여 옛 제도를 복구하는 날이 바로 의병을 해산하는 날이라 하였다.

아울러 전라도 모든 고을에 세 번째 통고문을 발송하여 음력 2월 그믐날 광주의 객사인 광산관(光山館)에 집결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때 기우만은, 유생과 향리가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입술과 치아처럼 서로 도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음력 2월 22일 기우만은 호남대의소, 즉 장성의병을 이끌고 광산관으로 나아갔다. 그는 광주에 별도의 통문을 보내어 의병에 적극 동참해달라고 요청했다.

광주는 예부터 사림의 연해이며 충의의 고가로써 호남에서 제일이라고 일컬어졌다. 오늘의 이 의거는 ‘광산에서 마땅히 가장 먼저 창의해야 한다’고 일컬었지만 귀를 기울인 날이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이렇게 고요하니 사기(士氣)가 막히고 상한 것이 이렇게까지 심한가. (중략) 귀 고을은 호남에서 길과 마을이 고루 적합하여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땅이며 지리적 조건이 매우 합당하여 이에 먼저 통고하니 삼가 잘 헤아리길 바란다(「윤시광산제장사」,『송사선생문집』2).

기우만은 호남의 대표적 충의의 고을인 광주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점을 상기시키고, 기개가 굳센 선비들의 동참을 기대하였다. 기우만은 광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불러모아 서울을 향해 북상할 계획이었다. 기우만의 이러한 계획에 대해 나주의병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주의병의 이름으로 담양 창평 순창 장성 광주 등 5개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했다.

한편, 선유사(宣諭使)와 관군이 의병을 해산하기 위해 전주까지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기우만은 전주에 도착한 친위대(親衛隊) 및 전주 감영 병사들에게 함께 근왕척왜(勤王斥倭)하자는 글을 보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에 대해 조칙(詔勅)을 소지한 선유사를 파견하여 해산을 종용하는 한편, 친위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남로선유사에 임명된 신기선(申箕善)은 친위대를 대동하고서 1896년 3월초부터 5월 중순까지 선유활동을 펼쳤다. 그는 기호학파(畿湖學派)를 대표하는 유학자였으므로 그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남로선유사에 임명된 것이다.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에 들어와 호남의병의 해산을 촉구하였다.

당시 의병장들은 대부분 명문가의 양반 유생이었던 관계로 국왕의 명령을 따랐다. 이들이 성리학적 근왕이념(勤王理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의병들은 국왕의 해산조칙에 따라 1896년 봄을 전후하여 해산하였다. 나주의병은 음력 2월 26-27일 사이에 해산하였고, 광주 광산관에 주둔 중이던 장성의병 역시 음력 2월 28-29일경 해산하였다. 이에 따라 음력 2월 30일 광주에 집결하기로 한 이른바 광산회맹(光山會盟)은 무산되고 말았다.

의병의 해산 과정에서 친위대를 지휘한 이겸제(李謙濟)는 전주진위대 중대장 김병욱(金秉旭)으로 하여금 호남의병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전주진위대는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장성의병에 가담한 생원 기항지(奇恒之)가 체포되었고, 광주향교의 임원 박원영(朴源永)이 붙잡혀 효수되었다. 담양 거의와 관련하여 유생 구상순(具相淳)이 처형되었고, 담양부사였던 민종렬(閔種烈)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특히, 나주의병의 주도 인물들이 가혹한 처벌을 받았는데, 해남군수 정석진(鄭錫珍)을 비롯한 김창균-석현 부자 등이 처형되었다. 이들이 참서관 안종수의 처단에 앞장선 때문이었다.

이 때의 상황을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서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의병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심의(深衣)와 대관(大冠) 차림을 하였고, 서로 만나면 읍양(揖讓)하고 길을 나설 때도 차례로 줄을 지어 걸었다. 이들은 군량이나 병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율도 없었으므로 이들을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패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은 광주로 나아가 주둔하고 있었다. (중략) 이때 신기선은 호남에 있으면서 기우만을 강력히 비호하였던 까닭에 체포하지 못하였다(『매천야록』, 200-201쪽).

광산관에 집결한 대부분의 의병들이 유생들이었으므로, 이들의 의병활동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로선유사 신기선이 기우만을 적극 비호하여 겨우 목숨을 구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신기선은 기우만을 체포할 경우 참살을 금지하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기우만이 노사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라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은 단발령의 철폐, 왜적의 구축, 개화정책의 반대, 옛 제도의 복구 그리고 국왕의 환궁 등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들은 북상근왕을 추진했으나 국왕의 해산조칙에 따라 광주에서 해산하였다.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은 반개화·반침략적 근왕의병을 지향했던 것이다.

4) 호남의병 기록의 백미(白眉), 기우만의 「호남의사열전」

1906년 이후 기우만은 두 차례나 경무서에 구금되었다. 처음에는 백낙구(白樂九) 의병장과 연관되어 체포되었다. 백낙구는 1906년 11월 구례 중대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양 군아를 점령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구례에서 체포되었다. 백낙구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기우만이 거론되자, 광주경무서에서 음력 10월 체포한 것이다. 일제 경찰은 백낙구와의 연관성을 집요하게 추궁했으나, 기우만은 “마음이 같고 의리가 같으면 시키지 않아도 시킨 것과 같다.”고 답변할 뿐이었다. 결국 백낙구와의 관련성이 입증되지 않아 풀려났다.

1907년 음력 3월 그는, 이른바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강상원(康相元)과 연관되어 영광경무서에 체포되었다. 며칠 뒤 광주경무서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음력 4월에는 목포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두 달여 만에 방면되었다. 을사늑약이후 일제는 기우만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확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우만은 스스로 의병항쟁의 주도가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또한 그는 1895년부터 1905년까지 다섯 차례나 상소운동을 펼쳤다. 그의 첫 번째 상소인 「을미소」에서는 복수토적과 단발령 철폐, 옛 제도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두 번째 「병신소」(1)는 의병을 일으킨 직후에 올린 것으로, 환궁을 요구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의병을 해산한 후에 올린 「병신소」(2)에서는 선유사 파견을 비판하며 국가와 임금에 충성하는 의병만 억울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으며, 「병신소」(3)에서는 언로의 개방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상소문이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에 올린 「을사소」에서는 일본의 침략과 매국노를 격렬히 규탄했지만 성과가 없었으며, 의병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1896년부터 1906년까지 그야말로 국가와 임금을 위해 ‘아픔을 참고 원한을 품고(忍痛含寃)’ 의병을 도모했었다. 하지만 거의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의병의 역사를 찬술하는 일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일본과 그 앞잡이들을 단죄하고 의병의 절의정신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1909년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대부분 패산(敗散)하였다. 특히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해온 호남의병이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년 9-10월)에 의해 거의 전멸되었다. 이 과정을 직접 지켜 본 그는 수많은 의병의 정의로운 투쟁이 먼지와 연기처럼 사라지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호남의사열전의 저술을 시작한 시기가 바로 1909년이라는 점이다. 호남의병이 ‘폭도’의 이름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춘추(春秋)』의 의리사상에 입각하여 의병전을 찬술하였다. 그를 비롯하여 노사학파의 오준선(吳駿善)과 조희제(趙熙濟)도 같은 생각으로 의병전을 저술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오늘의 거의는 옛날보다 훨씬 어렵다. 옛날에는 의병을 일으키라고 위로부터 애통조(哀痛詔)가 내리고, 거의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높은 벼슬을 주고 친필 조서를 내려 특별한 은총으로 포상하였다. (중략)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적신이 임금을 빙자하고서 나라를 팔고 임금을 협박한 병신년간(1896)의 일은 내가 직접 겪은 바이다.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것이 이 무슨 큰 죄인가. (중략) 온 나라가 왜놈과 더불어 의병이 혹시 성공할까 두려워 금고를 왜놈에게 가져가면서도 의병들이 사용하게 될 것을 겁내어 위아래가 합심하여 낌새를 정탐하여 좌절시키는 것을 능사로 삼으니, 충의(忠義) 두 글자는 쓸어버린 듯 남은 것이 없다. 다행히 초야에는 외로이 실추되지 않은 양심이 있는 자가 있어 윤리가 쇠락한 가운데 강상(綱常)을 키우는 기반으로 삼는다면 비록 한 때 좌절을 면하지 못했으나 어느 시기에 광복이 되면 혹시 장차 이것으로 종자의 한 뿌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혹 살고 혹 죽는 것, 언행 하나하나가 의절(義節)에 관계된 것은 들은 대로 기록하여 뒷날의 참고가 되게 하고자 한다. 생사를 초월한 이들의 한마디의 말과 하나하나의 일이 절의(節義)에 관계된 것이라면 들은 대로 적어서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하려 한다(기우만, 홍영기 외 옮김,『노사학파가 기록한 호남의병열전』, 상상창작소 봄, 2019, 68-69쪽).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키면 임금이 벼슬과 함께 특별한 포상을 내렸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우만은 험난한 시기에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을 ‘폭도(暴徒)’라는 이름의 굴레를 씌워 화적처럼 처벌하는 상황을 지극히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충의로 봉기한 호남의병의 삶과 죽음, 그리고 언행을 일일이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마땅한 의무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기우만은 호남의병만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점에 대해 그는, ‘의병은 남북의 구별이 없는데, 호남의 의사(義士)만을 기록한 것은 내가 아는 것을 거론한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는 대로 기록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자신이 보고 들어 아는 사실만을 정확하게 기록하다 보니 호남의병만을 찬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훗날 나라를 되찾을 것에 대비하여 의병이 올바로 평가받을 수 있는 조그만 근거만이라도 후세에 전할 목적으로 의병전을 지었다. 그리하여 기우만은 12명의 의병 전을 전술하였다. 즉, 기삼연 김용구 김봉규 박경래 김준 전수용 김영엽 김익중은 의병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의병이며, 김치곤 박영건 정원숙 성경수는 고창 출신으로서 물심양면으로 의병을 적극 후원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유생 출신으로, 호남창의회맹소에서 활동했던 의병이거나 후원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병전은 기우만의 문집에 포함되지 못했으나 일제강점기에도 비밀리에 전승되었다. 해방이 된 후에야 빛을 보았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기우만은 천인(賤人)을 자처하며 은인자중하다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방대한 유고는 제자인 양회갑의 주도로 여러 해 동안 준비하여 1931년에 『송사집(松沙集)』(52권27책)으로 간행되었다. 연보와 행장 등은 『송사선생문집부록』(2권1책, 1947)으로, 그 이후에 의병전을 포함한 유고는 『송사선생문집습유』(3권1책, 1980)로 간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1980)을 추서하였다.

2. 박원영과 김익중의 의로운 순국

1) ‘광주회맹’에 앞장선 박원영

박원영은 전남 광주에서 광휴(匡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주옥(周玉), 호는 포류재(蒲柳齋)·아산(鴉山)이며 본관은 충주이다. 그의 어머니의 성씨라든가, 그가 태어나 살았던 구체적인 지명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노사 기정진의 제자였다는 점과 기우만과 비슷한 연배라는 점이 확인될 뿐이다. 그의 행적과 사상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만, 기우만이 찬술한 장문의 제문(祭文)이 거의 유일한 기록인데, 이로써 기우만과 매우 각별한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직한 성품과 기개를 타고난 박원영은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이름이 알려졌고, 1896년 전후에 광주향교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었다.

1894년에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휩쓸자, 그는 밤중에 기우만을 찾아가 ‘저들이 국가를 어지럽히고 선비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의병을 일으켜 토멸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공이 격문을 사방으로 보내주시면 저는 당연히 밑에서 돕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기우만은 가슴에 품은 그의 올곧은 마음을 알게 되었다.

박원영은, 일본의 사주를 받은 개화파 관료들이 제도를 변경하고 단발을 강요하며 임금까지 위협한 상황에 대해‘나라는 나라가 아니고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인식하였다. 이 무렵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영은 곧바로 달려와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어떤 이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의병의 군량조차 협조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박원영은 기우만을 도와 계책을 제시하며 적극 도왔다. 그는 기우만이 지은 격문을 함께 읽으면서, ‘물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이 어찌 맛있는 곰 발바닥같이 좋을 수 있으며, 기왓장이 온전하더라도 부서진 옥만 못하다(魚之欲曷若熊之美 瓦而全不如玉而碎)’라는 구절이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라 했다. 즉, 박원영은 『맹자』 <告子篇>의 사생취의(捨生取義)를 자신이 지향하는 의병정신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1896년 음력 2월 22일 그는 나주에서 광주로 이동한 장성의병을 맞이하는 실무를 주관하였다. 의병의 깃발을 광주향교의 문 앞에 높이 걸었으며, 의병의 규칙을 정하고 전략의 기획에 앞장섰다. 또한 당황해하는 기우만의 손을 맞잡고 ‘공은 몸을 아끼시오. 하늘은 화를 후회하여 보답할 날이 있을 것’이라 격려하였다. 이때 의병을 해산하라는 선유사의 명령이 전달되고, 친위대와 진위대가 군대로 압박하였다. 결국 기우만은 의병을 해산한 후 잠시 입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음력 2월 그믐날 기우만의 주도로 ‘광산회맹’을 추진하던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박원영 선생이 임원으로 있던 광주향교ⓒ독립기념관
박원영 선생이 임원으로 있던 광주향교ⓒ독립기념관

기우만이 떠나면서 박원영에게 자중할 것을 거듭 부탁하자, 박원영은 ‘공이 살면 나도 살고 공이 죽으면 나도 죽겠습니다.’라고 말하여 안심시켰다. 광주향교 임원이었던 그는 ‘광산회맹’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향교에 남았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전주진위대에 체포되었지만, 박원영의 기색은 평소와 다름없이 늠름하였다. 그들이 협박하기를 ‘우리의 마부가 되면 살려주겠다.’라고 하자, 이에 박원영은 큰소리로 ‘너희를 따라 공경(公卿)이 된다 해도 나는 더럽게 생각할 것인데, 너희의 마부가 되란 말이냐.’라고 꾸짖었다. 그들이 다시 ‘그렇게 하면 묶은 손을 풀어주겠다.’고 하자, 그는 ‘머리를 자른 장부(丈夫)는 있어도 손을 묶인 유생은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그는 이겸제가 파견한 전주진위대 중대장 김병욱(金秉旭)에 의해 처형되었으니, 1896년 음력 3월 3일이었다. 그들은 박원영이 기우만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체포 즉시 효수한 것이다. 선유사 신기선은, 박원영이 기우만과 더불어 사면 대상이었으나 갑자기 효수되어 한스러운 일이라 하였다.

박원영의 순절 소식을 들은 기우만은 자신을 책망하였다. 그는 제문의 말미에서 박원영의 기상이 눈이 쌓인 깊은 산에 외로운 소나무와 잣나무가 묵묵히 서 있는 모습과 같다고 추모하였다. 박원영의 아들 경주(景柱)는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했다며 평생 백립(白笠)을 쓰고 다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 번 죽으매 나라에 사람 있음을 드날리고

역사의 빛나는 산은 오직 정신이라네 (중략)

지금 사람들 어떻게 천하의 선비를 알까

눈부신 사적으로 인을 이루어 전하네. - 기우만의 추모시 -

2) 호남창의회맹소의 최초 순국자 김익중

김익중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맥동(麥洞)에서 기홍(基弘)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맥동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본향으로 울산김씨의 세거지이다. 그 역시 하서의 12대손에 해당되며, 중부(仲父) 기흥(基興)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자는 봉거(鳳擧) 호는 녹동(鹿洞)이며, 하동정씨와 혼인하여 4남1녀를 두었다.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노사는 그의 고모할머니와 혼인하였으니 두 집안이 돈독한 사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깊이 배우지 못한 때문인지 그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기우만이 저술한 「김익중전」이 거의 유일한 자료인 셈이다. 그의 천성으로 어려서부터 의리를 좋아하였다. 그래서인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그는 친구들의 동학 입도를 막는데 앞장섰다. 유학자로서의 소신을 분명하게 실천한 것이다.

김익중 선생 편지ⓒ독립기념관
김익중 선생 편지ⓒ독립기념관

1896년 봄 기우만이 사방에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모으자, 그는 포수들에게 참여를 권하며 나라를 위해 충의를 다하자 했다. 자신도 적극 가담하여 나주와 광주를 오가며 종군하였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이 그를 ‘글을 읽지 않은 학자’라 불렀다. 하지만 고종의 조칙으로 의병이 해산되었다. 그는 기우만과 상의하여 ‘지금 국가의 형세가 극도로 위태로우니 마땅한 계책이 필요한데, 향약 복구를 명분삼아 모임을 갖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향약을 명분삼아 매월 한 차례씩 선비들과 모여 강학을 이어갔다.

한편,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전국 각지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자 도적의 봉기는 혼란한 정치 때문이므로 공평한 법 집행과 신중하게 지방관을 선정해야 한다는 등 여론이 비등하였다. 김익중은 마을에 횡행하는 도적을 방어하기 위해 집집마다 무기를 준비하도록 했는데, 아마도 을사늑약 전후였을 것이다. 그는 도적을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마을 주민을 총칼로 무장시켰다. 이는, 만일에 있을 의병 봉기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을 것이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내정간섭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에 기우만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라남도에서 기우만이란 자가 의병을 초모(招募)하려고 통문을 판각(板刻)으로 간출(刊出)하여 각 군에 나누어 보냈는데 전라남도 관찰사 주석면씨가 일일이 거두어 모아서 내부로 올려 보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6년 3월 29일자 「의문간포(義文刊佈)」-현대문으로 고침).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 각 군에 통문을 인쇄하여 발송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거되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유포된 통문은 「만인회동진소통문(萬人會同陳疏通文)」이었을 것이다. 기우만은 곡성 도동사(道東祠)에서 연명상소 및 의병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이 사전에 누설되자 중단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통문으로 짐작된다. 이 무렵 일진회는, 기우만이 향약소를 기반삼아 의병을 일으킬 것이라고 관찰부와 경찰기관에 보고한 사실도 있었다. 이 때문이었는지 기우만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와 같이 기우만은 1906년을 전후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노력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둔 것 같지 않다.

한편, 전라북도에서는 최익현과 그 제자들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들은 기우만과 협력하여 전라도를 아우른 의병 봉기를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1906년 음력 윤 4월 8일(양 5.29) 기우만과 최익현은 담양 추월산의 용추사(龍湫寺)에서 회동하였다. 이들은 호남의 대표적인 유학자 50여 명과 함께 대일항전 방법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동의하여 112명이 서명한 동맹록을 작성했다. 그러나 의병 봉기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기우만은 향리로 돌아갔으며, 최익현을 따르는 유학자들은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김익중은 기우만의 활동을 적극 도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기우만은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서 멀어졌지만, 김익중은 동학(同學)이자 동갑(同甲)인 기삼연을 도와 의병 봉기에 앞장섰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기삼연은 1907년 10월 말 장성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菴)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 기삼연은 의병장, 김용구(金容球)는 통령, 김태원(金泰元)은 선봉장, 이철형(李哲衡)은 중군장, 이남규(李南奎)는 후군장, 그리고 김익중은 종사를 맡았다. 이들은 대부분 노사학파 유학자들이었다. 당시 김익중은 집안일은 젖혀두고 포수와 보부상 등을 의병으로 합류시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인생은 한 번 죽는다. 진실로 죽었다면 죽더라도 그 죽음 또한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삼연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을 정도였다.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는 전라도 서해안에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고창읍성(高敞邑城, 일명 牟陽城) 공격에 나섰다. 호남창의회맹소 포대장 박경래와 고창 사람 정원숙(鄭元淑)이 ‘모양성은 비록 작으나 성곽이 견고하고 무기가 정예하니 이 성을 차지해야 오래 버털 수 있습니다.’라는 조언에 따라 고창읍성 공격에 나선 것이다. 1907년 11월 1일(음 9.26) 이들은 읍성을 점령하여 상당량의 무기와 전곡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이들은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아 격렬한 공방전을 펼쳤다. 포대장 박경래가 김익중에게 ‘일이 급하니 빨리 피하라’고 하자,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며 성첩을 방패삼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김익중은 호남창의회맹소 결성이후 최초의 순국자였다.

음력 12월 16일(양 1908.1.19), 고창읍민들이 몰래 거두어 가매장한 그의 시신을 반장하였다. 이때 기삼연은 의병을 거느린 상황이라 부득이 종사를 보내어 문상하였다. 기삼연이 직접 쓴 ‘호남의사녹동김공지구(湖南義士鹿洞金公之柩)’라는 명정(銘旌)도 전달되었으며, 기삼연이 지은 제문 역시 김익중의 영전에 올려졌다. 기삼연은 제문에서 김익중이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1896년 이후 의병에 세 번 가담한 점을 칭송하였다. 아울러 고창읍성의 동문에서 공격할 때 김익중은 자신이 넘어질 때 붙잡아 주었는데, 북문에서 후퇴할 때 자신은 김익중을 데리고 나오지 못해 고인을 저버렸노라 자책하였다.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기삼연 의병장이 김익중의 죽음을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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