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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지 새넌 맥큔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1905년 선교사로 입국, 1919년 3.1운동 지원

1928년 평양 숭실학교 교장 취임

1935년 숭실학교 학생들에 대한 신사참배 요구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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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새넌 맥큔

조지 새넌 맥큔 George Shannon McCune ,1873.12.15 ~1941.12.04 . 외국 미국 , 독립장 1963
"양심적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학생들에게 시킬 수 없다."

1. 머리말

선생은 일제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을 강요하기 2달전인 1905년 9월 미북장로회 교육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는 매우 배일적·친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늘 일제 헌병과 경찰의 주목과 감시를 받았다.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바로 직전 해인 1909년 12월 일제 헌병대의 기밀 보고서에서도 "그곳(평양) 기독교에서 합방(合邦)에 대해 가장 반대의견을 가진 자는 장로파 미국인 선교사 리길함(李吉咸, Graham Lee)·마삼열(馬三說, S. A. Moffett)·소안륜(蘇安倫, W. L. Swallen)·방위량(邦韋良, W. N. Blair)·편하설(片河雪, C. F. Bernheisel)·윤산온(尹山溫, G. S. McCune)·우월씨(禹越氏, J. H. Wells) 등이라고 들었으나 그들은 아직 행동상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 하여 선생이 합방반대 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선생은 1873년 12월 15일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 주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피츠버그(Pittsburg) 한 은행의 보조 점원(Assistant Casher)으로 일하던 22살 때까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돌보았다. 그후 그는 1893년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장로교 학교인 파크중학교(Park Junior High School)에 들어가 1897년에 졸업하고, 이어서 파크 칼리지(Park College)에 들어가 1901년에 졸업했다. 그는 1903년 피츠버그 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아이오와(Iowa) 주 코에대학(Coe College)에서 교육심리학을 교수하였으며 그 대학 부속 고등학교 교장을 겸했다. 그는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미북장로회 아이오와 대회(the Iowa Synod)의 목회자 연수과정을 거쳐 1905년 5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선생은 1904년 파크대학 설립자 맥아피(John Armstrong McAfee)의 딸 헬렌 맥아피(Helen Bailey McAfee)와 결혼하고, 같은 해 미북장로회 해외선교사에 임명되어 1905년 9월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그는 평양선교지부(Pyeng Yang Station)에 배치되어 한국어를 배우면서 숭실학교(崇實學校)에서 교수했다. 그는 이곳에 있으면서 1907년 1월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하고, 브라운(A. J. Brown) 총무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중요한 대목은 추신으로 쓴 그의 한국인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계획과 열정이다. 그는 추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저는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실질적으로 대학 사역을 시작하는 계획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미국에서 여러해 동안 쌓은 경험으로, 교과과정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것을 보조하는 일뿐만 아니라 이 상급학교 단계를 위한 모든 계획과 선교사들의 회의에서 여러모로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대학 건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학생들이 남자 사랑방에 혼잡하게 몰려있으며, 한 학급에 약 100명의 학생이 있어서 수학이나 대수학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올 봄에는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내년 가을에는 800명의 학생들이 입학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을 어디에 수용해야 합니까? 지금은 한국 교회를 위한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선생은 이미 평양 시절부터 한국인 교육에 열정을 다하고 기초를 다지고, 교과 과정과 교육 시설은 물론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하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마다 선생의 활동과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105인 사건과 선생

선생의 한국인 교육에 대한 꿈은 1909년 9월 평북 선천선교지부(Syen Chun Station)로 전임하여 중학교 과정인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장을 맡게 되면서 실행되었다. 그리고 그 전까지 신성학교는 한국인들이 재정과 운영을 담당했지만, 이 무렵부터 미북장로회에서 이 학교의 재정과 운영을 담당하게 되었고, 미국의 독지가 휴 오닐(Hugh O’Neill) 부인으로부터 거금을 기부받아 학교 시설을 확충하였다. 또한 학비가 없는 학생들도 학비를 벌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근로사업부를 설치하여 철공장, 목공소, 목장, 양잠실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것은 선생이 자신의 모교인 파크대학의 교육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 무렵 소년 백낙준이 선생 교장을 찾아가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자 학교에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런데, 1911년 10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구속되기 시작했다. 백낙준도 이 사건으로 체포될뻔 하였으나, 미리 피하여 숨어 있다가, 1913년 중국 톈진(天津)을 거쳐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도 선생의 권고와 추천으로 파크대학의 부속 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가, 파크대학까지 졸업하게 되었다.

선생은 자신도 105인 사건의 연루자로 알려지자, 이 사건을 선교 본부에 보고하고, 이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일제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근거로 기소된 123명 중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항소하여 1913년 3월 20일 양기탁(梁起鐸), 윤치호(尹致昊), 이승훈(李昇薰)을 비롯한 이른바 주모자 6명을 제외한 99명이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선생은 이들이 무죄로 풀려나는 것을 보고나서 1913년 3월 하순경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전에 그가 교수로 재직했던 코에대학에서 1914년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4년 11월 가족과 함께 다시 내한하여 선천선교지부에 복귀하였다. 그는 설교, 부흥회 등에서 배일사상을 고취하여 1915년 1월 평안북도 경찰부장에게 불려가 '훈계'를 들어야 했다.

3. 3․1운동과 선생

선생은 1918년 8월 장로회 평북노회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인 1919년 초 다시 내한하던 길에 일본 도쿄(東京)에서 하숙하던 이광수의 하숙집에 들렀다. 이광수는 마침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그 교정을 받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선생은 이광수가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친한파 선교사였고, 믿을만 했기 때문에 그에게 번역문 교정을 부탁하였다. 위험이 따를지도 모르는 이런 막중한 부탁을 받고 선생은 눈을 감고 잠깐 생각하더니 "이 선생, 나는 이 글을 안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이니까. 그러나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랜디스 박사, 그는 일간 미국으로 떠나갑니다. 내가 이 선생을 랜디스 박사께 소개할 수 있습니다."하고 자신의 명함을 꺼내주었다.

선생은 임지인 선천으로 가는 길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도 들렀다. 3․1운동의 학생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壁)이 그를 만나 조언을 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후에 김원벽이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때 선생을 언제 만났는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李태왕(고종 황제) 전하가 훙거한 2·3일 뒤의 일이었다. 세브란스병원 안에 있는 로드 선생을 방문했었는데, 동인은 부재중이었고, 尹山溫이 있었으므로 동인과 만나서 이야기했었다."

대략 1월 24, 25일경 세브란스병원에서 김원벽이 선생을 만나 내외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일은 자신이 개척해야 한다"는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 격려의 말은 김원벽이 3.1운동에 학생 지도자로 참여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조지 새넌 맥큔(윤산온)이 캐나다를 경유해 시카고 컨티넨탈社로 보낸 편지 내용을 소개한 기사. 조지 새넌 맥큔(윤산온)과 선교사들이 3.1운동 당시 목격한 일제의 잔학성을 고발한 내용(신한민보 1919년 4월 19일자)
조지 새넌 맥큔(윤산온)이 캐나다를 경유해 시카고 컨티넨탈社로 보낸 편지 내용을 소개한 기사. 조지 새넌 맥큔(윤산온)과 선교사들이 3.1운동 당시 목격한 일제의 잔학성을 고발한 내용(신한민보 1919년 4월 19일자)

1919년 3월 8일 선천에서도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일제 군경의 탄압, 만행이 일어나자, 목격 상황을 친필로 기록하여 일제의 우편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캐나다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맡겨 캐나다에서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하였다. 이 잡지 1919년 4월 10일호에서 "불쌍한 한국! 능히 한국을 도와줄 수가 없는가? 현금(現今) 정형은 참으로 견딜 수 없도다. 이 산골(선천을 가리킴)에서 한인들이 3월 8일에 대(隊)를 이어 평양으로 모여 들어가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양성 안에 사는 인민의 애국정신을 고취하여 일본이 한국을 그네들에게 돌려줄 때까지 싸움하자 결심하였는데, 이 아래 기록한 사실은 나(尹山溫)와 다른 선교사들이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목견(目見)한 것이라."하며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그는 이 밖에도 3․1운동 당시 많은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선생은 1920년 9월 1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거를 하다가 체포된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朴致毅)를 변호하여 '온량한 학생으로 결코 폭탄을 던질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관헌들의 고문에 마지 못해 자백했을 것'이라는 고문설을 유포시켰다. 그는 이런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 '극단적인 배일자(排日者)'로 지목되어 신성학교장 직에서도 물러나고, 감시를 받다가 1921년 2월 22일 장남의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에서는 1921년 3월 28일 센프란시스코에서 환영 만찬회를 열어주었다. 이 후 언론과의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을 설명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1921년 8월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주 휴론대학(Huron College) 학장에 취임하여 7년동안 학장을 맡았다.

4.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선생

숭실전문학교 교장 시절 사진
숭실전문학교 교장 시절 사진

선생은 1928년 5월 다시 내한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신사참배를 다시 강요하기 시작하고, 평안남도 지사가 1932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1주년 전몰자위령제'에 학생들을 참배시키도록 통첩했으나 다른 기독교 학교들과 함께 이를 무시하고 불참하였다. 그러다가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1935년 10월 24일부터 3일간 각도의 학무과장과 사범학교장을 포함한 시학관들을 중앙으로 불러 회의를 갖고, "국가관념의 함양에 관한 건, 경신숭조에 관한 건, 국어사용의 보급 철저에 관한 건, 사립학교 지도 감독에 관한 건, 심전개발에 관한 건, 교화사업에 관한 건" 등을 지시하였다. 평안남도 지사는 같은 해 11월 그 지역 공사립 초등학교장 회의와 중등학교장 회의를 잇달아 소집하여 이러한 상부의 지시를 전달하고 실행을 독려하였다. 그런데 초등학교장 회의가 끝나는 날 이들을 평양신사에 참배하게 하였으나 그들 중 기독교인 학교장들이 빠져나가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이어서 1935년 11월 14일 개최한 평남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야스타케[安武直夫] 지사는 회의를 개회하기 전에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나서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자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 M. Lee, 李希滿)와 함께 그런 일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상 그 지시에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평남 지사는 금후 교장으로서 자신들의 신사참배 여부는 물론 학생들의 신사참배 여부를 명확하게 서면으로 회답하도록 요구하고 그 회답의 내용에 따라 관련자의 학교장직 파면은 물론 학교의 강제 폐교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는 그날로 이 사건을 긴급전보로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 許大殿)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홀드크로프트는 11월 24일에도 평양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심도 있게 의논하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선교본부에 스피어(Robert Speer) 총무를 파송하여 주도록 요청하여 그에게 상황을 보고한 후 대책을 마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다음 날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트는 베커 선교사와 함께 야스타케 평남지사를 방문하여 "숭실학교, 숭의여학교 및 같은 학교 교장의 신사불참배문제에 관하여 학교 및 학교장 측의 정식 회답 제출을 1936년 9월경까지 연기해달라는 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같은 날로 실행위원들이 연명하여 북장로회 조선선교부 실행위원회 명의로 우가키(宇垣一成) 총독에게 진정서 제출하였다.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나오는 지원병들(1940년대 초)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나오는 지원병들(1940년대 초)

그러나 이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12월 2일 야스타케 평남지사로부터 홀드크로프트에게 학교장의 회답 연기를 거절하며 오히려 그 회답을 독촉하는 편지가 왔다. 그러자 홀드크로프트는 12월 7일 우가키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총독이나 총독부 관리들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에서 선교부 실행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인 목회자들의 자문도 받아 최종적인 결정은 아니지만, 종교의 자유와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회신을 보내도록 선생 교장에게 권고하고, "평양학교와 관련된 상황이 심각하다"는 취지의 전보를 해외선교부에 보내기로 하며 당국자와 협상하기 위해서 로드(H. A. Rhodes, 盧解理), 솔토(T. S. Soltau, 蘇悅道), 홀드크로프트 3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선임하였다. 홀드크로프트는 12월 13일 와타나베 학무국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이 회의에서 논의한 결과를 알리고 선처를 호소하였다. 선생도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 12월 13일 야스타케 평남지사에게 최종적인 회답 유보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 다음 날 홀드크로프트도 평남지사에게 편지를 보내 12월 13일자 선생의 편지 내용이 실행위원회에서 권고한 내용임을 확인해 주었다. 홀드크로프트는 12월 17일에도 우가키 총독에게 12월 7일자 편지와 11월 25일자 진정서 사본을 다시 보내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선교부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재차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야스타케 평남지사는 그러한 요청을 거절하는 의미로 선생의 회답을 돌려보내고 12월 19일 홀드크로프트에게도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도지사는 총독부 학무국에도 요청하여 숭실전문학교 교장을 겸하고 있는 선생에게 경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와타나베(渡邊豊日子) 학무국장은 12월 30일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트, 위원 솔토, 숭실전문학교장 선생을 학무국으로 불러 신사참배에 따르도록 설득하고 경고하였다.

선생은 이미 12월 20일에 숭실학교 이사회에 교장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이사회는 교장으로서 잘못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 자신도 여러 사람들의 자문을 얻은 결과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사퇴하기보다는 파면당하는 것이 오히려 떳떳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야스타케 평남지사는 총독부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1936년 1월 16일 선생을 도청으로 불러들여 신사참배 여부에 대한 회답을 독촉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우가키 총독에게 "사립학교 규칙에 의한 학교장 인가 취소의 건 내신"이라는 공문을 보내 1월 18일자로 선생의 숭실학교장 인가를 취소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고하고 아울러 그의 숭실전문학교장 인가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선생이 최종 답장을 1월 18일에 보냈는데, 이미 이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숭실학교장 인가취소를 결정했을뿐만 아니라, 숭실전문학교장 인가 취소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최종 답장의 주요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정부 선언들은 신사에 참배하는 행위에 대한 나의 양심적인 거부감을 제거하거나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드릴 필요가 있게 됨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① 현재 봉재하고 행하는 신사의식들은 나에게는 분명히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②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실제로 거기서 신령들을 예배한다고 믿기 때문에 ③ 기독교인들은 효도와 구분하여 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죄라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④ 나도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의해 기독교인들에게 그같은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학교 교장으로서의 나에게 요구한 행위를 한 개인으로서 양심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개인으로서 신사에 참배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학생들에게도 그것을 하도록 할 수 없음도 알려드리게 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조지 새넌 맥큔(윤산온) 서거 소식을 전한 기사(신한민보 1941년 12월 11일자)
조지 새넌 맥큔(윤산온) 서거 소식을 전한 기사(신한민보 1941년 12월 11일자)

이와 같이 선생은 1936년 1월 18일자로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최종 서면으로 답변함으로써 그날로 숭실학교장직과, 1월 20일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를 취소당했다. 그는 1936년 3월 21일 안식년에 해당하는 해이기도 하여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선생은 4월 초순경 미국에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들러 한국인들의 환영을 받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비판했고, 귀국해서도 비판 강연과 기고를 계속했다. 그는 그해 재미 유학생 단체인 북미대한인학생회(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North America) 자문위원을 맡았고,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미국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교수하였다. 선생은 1938년 1월호 『프레스비테리안 트리뷴(The Presbyterian Tribune)』지에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목으로 신사참배 절대불가론을 게재하여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학교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 순응'을 주장하던 언더우드(H. H. Underwood)와 논쟁하였다. 그는 1941년 12월 4일 저녁 12시경 시카고 장로회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는 12월 8일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치러져 미국 미주리주 파크빌에 있는 월넛 그로브 묘지(Walnut Grove Cemetery)에 안장되었다.

조지 새넌 맥큔(윤산온) 묘비(미국 미주리주 파크빌 소재)
조지 새넌 맥큔(윤산온) 묘비(미국 미주리주 파크빌 소재)

5.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생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병탄, 1911년~1915년 ‘105인사건’, 1919년 3․1운동, 1935년~1936년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 한국 사회와 교회의 중요한 사건마다 현장에서 목격했을뿐만 아니라, 기록과 자료를 남겼고, 그 중심에 서서 한국인을 사랑하였고, 한국인편에 섰다. 그는 1905년 9월 미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1936년 3월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하기까지, 미북장로회 한국선교부 평양선교지부와 선천선교지부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며, 선천 신성학교 교장,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105인 사건과 3․1운동 때 한국인 학생들을 변호하고 지원하였으며, 1930년대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에 끝까지 거부하고 저항한 반일적·친한적인 선교사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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