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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옥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2009년

주요공적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사원 활동

1921년 일본 동경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 서무부장, 1924년 재동경유학생학우회 대표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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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 / 유원우

이옥 , 1895 ~1928 , 애국장 (2009) 유원우 , 1902 ~1938 , 애족장 (1990)

1. 일제강점기 유학생과 학우회

일제강점기 한국인에게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는 일제의 교육정책으로 인해 대학 등 고등교육을 받고자 하는 한인 학생들은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 미국 등 외국으로의 유학이 쉽지 않았던 당시 실제로 유학이 가능했던 곳은 거의 일본으로 한정되었다.

한국인 학생의 일본 유학은 1881년 신사유람단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학업을 연마하는 한편 단체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면서 계몽활동을 펼쳤다. 최초의 유학생 단체는 1895년에 설립된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였다. 이후 제국청년회(1898년), 태극학회(1905년), 대한유학생회(1906년), 대한학회(1908년) 등을 거쳐 1909년 첫 통합단체인 대한흥학회가 탄생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한흥학회 회원인 유학생들이 일본의 국권침탈에 항의하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어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910년 ‘강제병합’에 저항하여 다수의 유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대한흥학회는 해산되었다.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이러한 단체 활동의 흐름 속에서 재탄생한 유학생 조직이었다.

1912년 10월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는 7개의 출신지방별 유학생 친목회의 연합체로 설립되었다. 한동안 친목회의 분회 조직이 남아 있었지만 1916년 1월 모두 해산되면서 학우회는 동경 지역 유학생을 망라하는 통합·대표조직이 되었다. 1931년 2월 스스로 해체를 선언할 때까지 유학생 단체를 넘어 일본 지역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이기도 했다.

학우회의 목적은 회원 상호간의 지덕체의 발달과 학술연구 및 의사소통 도모였고 동경과 인근 지역에서 유학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회원이 되었다. 학우회에 참여하지 않는 유학생들은‘국적(國賊)’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학생들 사이에서 학우회의 조직력과 통합력은 매우 컸다.

1910년대에는 정세윤, 백남훈, 신익희, 노익근, 김명식, 이태영, 백남규, 김규호가 차례로 회장을 맡았다. 이들 외에도 학우회 설립 준비 과정을 포함하여 안재홍, 송진우, 김성수, 신석우, 김철수(金錣洙), 현상윤, 최두선, 김효석, 김철수(金喆壽), 장덕수, 최팔용, 전영택, 서춘, 김도연 등이 1910년대 주요 멤버였다.

학지광 제12호 표지ⓒ독립기념관
학지광 제12호 표지ⓒ독립기념관

학우회는 회원들의 회비와 졸업생 및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고, 기관지 『학지광』 발행, 운동회·연설회·웅변회·신입생 환영회·졸업생 환송회 개최 등의 활동을 했다. 특히 『학지광』에 실린 글과 연설·웅변의 내용에서 당시 유학생들의 세계관, 일제 통치에 대한 비판적 인식, 조국에 대한 자부심 등을 엿볼 수 있다.

1910년대 유학생 활동의 정점은 1919년의 2.8독립선언이었다. 일제의 군국주의적 침략과 식민 통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전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언하며 한국의 전망을 제시한 2.8독립선언은 3.1운동뿐 아니라 1920년대 유학생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을 경험하고나서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더욱 고조되었으나 여전히 교육의 기회는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고등교육 기관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2.8독립선언 이전 약 600명에서 3여 년이 지난 1922년에는 3000명 가까이 증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및 러시아혁명이라는 굵직한 세계사적 전환기에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유학생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신 사조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게다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오는 한국인 노동자가 늘면서 재일한국인 노동운동과도 적극 연대하였다. 바로 이러한 역동적인 1920년대 초중반 학우회 및 일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그 궤적을 함께 한 인물이 이옥이다.

2. 관동대지진 이후 유학생 운동을 주도한 이옥

이옥은 1895년 6월 11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안동의 보문의숙과 서울의 휘문의숙에서 공부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안동사립보통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경북 안동 지역의 유력가,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에서 유학하며 학우회의 서무부장, 총무 등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이 자행되자 유학생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꾸려진 임시재경일본유학생회 및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학우회 조직이 종래의 평의원제에서 대표위원제로 바뀌었을 때 위원으로서 동경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요시찰인물‘을호’로 항상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일본 경찰이 동경 지역 한국인 청년 학생 운동의 주요인물 7명 중 1명으로 이옥을 꼽을 정도였다.

1924년 2월, 동아일보에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이 연재되자 학우회를 비롯한 일본의 7개 유학생, 청년, 노동단체는 이 사설의 내용이 민중을 기만하는 타협적, 굴종적 타협운동을 종용한다고 비판하는 성토문을 공동으로 작성, 발표했다.

3월 1일에는 학우회, 여자학흥회, 조선노동동맹회 등 동경의 한국인 학생, 청년, 노동단체가 연합으로 개최한 3.1운동 기념 강연회에서 불온한 언동을 한다고 검거되었다. 5월 재일한국인 노동운동 단체인 동경조선노동동맹회(1922년 설립)의 간부로도 활동했던 이옥은 같은해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학우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해에 졸업한 이옥은 조선으로 돌아가 11월 시대일보 이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4월 퇴직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창립대회 때 간사로 선임되어 동맹휴학의 원인 조사 및 대책 강구를 위한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간회 경성지회 정기대회 대표회원 및 간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같은해 6월에는 사회사정조사연구회를 창립했고 이듬해 1928년 신간회 정치문화부 총무간사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3. 20년대 중후반 학우회와 동경지역 한국인 운동세력 통합에 앞장선 유원우

이옥이 유학에서 돌아와 신간회 활동을 하던 무렵, 유원우는 동경에서 유학을 하며 신간회 지회 활동에 앞장섰다.

유원우는 1901년 3월 13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20년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일본인 순사의 부당한 폭력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을 주동한 혐의로 3개월 구금되었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7년경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서 유학하며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2월 설립) 실행위원, 신간회 동경지회(5월 설립) 초대 총무간사로 선임되었다. 당시 동경 지역에서는 이옥의 운동 경력에서 알 수 있듯 학우회를 비롯한 유학생, 청년, 사상, 노동운동 등 다양한 단체가 각각 또는 연합하여 독립운동,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보다 집중적이고 통합된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이 단체들이 연합체를 형성한 것이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서의 본부 창립 3달 만에 신간회 동경지회가 탄생할 수 있었다. 유원우는 이러한 일본 지역 운동세력 통합 과정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협동조 강연-공주에서 성황. 유원우가 공주에서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동아일보 1927년 7월 30일자)ⓒ국사편찬위원회
협동조 강연-공주에서 성황. 유원우가 공주에서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동아일보 1927년 7월 30일자)ⓒ국사편찬위원회

그뿐 아니라 협동조합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26년 6월 140여 명의 유학생들이 한국의 농촌 상황을 개선하고자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사의 재무부 임원을 맡았고 유학 중이던 1927년 4월 상주협동조합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해 여름방학에는 협동조합운동사 선전단 일원으로 조선 순회강연에 참여하여‘협동조합의 사적고찰과 세계적 대세’,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 등을 강연했다.

물론 학우회에서도 주도적 활동을 했다. 1928년 여름방학 때 경북 상주에서 열린 유학생 강연회에서 ‘변증법에 대하여’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이듬해 1929년에는 학우회가 전년도 일제 경찰의 대검거로 인해 간부 대부분이 구속되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각 학교 동창회 중심의 확대집행위원회로 학우회 조직을 개편했는데 이때 유원우가 대표로 선임되었다.

1931년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가 1932년 고려국제무역회사 지배인, 1935년에는 도곡서당 재산으로 상주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유치원을 설립하여 이사로 활동했다. 이외에도 농촌 지역의 경제개선과 농민계몽을 위한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4. 이옥과 유원우

이옥과 유원우는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경상북도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서 유학했고 유학 중에는 학우회 핵심간부를 역임하며 유학생운동뿐 아니라 동경 지역의 한국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옥은 1923년 관동대지진과 학살의 여파로 활동정지 상태에 빠져있던 유학생 조직을 재건하고 20년대 중반 학우회 이외의 다양한 한국인 운동단체와 함께 일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유원우 또한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불가능해진 학우회 조직을 재편하여 대표를 맡았을 뿐 아니라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와 신간회 동경지회에 참여하여 일본 지역 운동세력의 통합을 이끌어냈다. 동시에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옥씨 영면. 신간회 총무간사인 이옥이 1928년 12월 25일 0시 20분 식촌의원에서 별세했다.(동아일보 1928년 12월 26일자)ⓒ국사편찬위원회
이옥씨 영면. 신간회 총무간사인 이옥이 1928년 12월 25일 0시 20분 식촌의원에서 별세했다.(동아일보 1928년 12월 26일자)ⓒ국사편찬위원회

귀국 후에는 각자 20년대와 30년대 후반 한국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던 신간회와 농촌운동에 투신하였지만 30대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유학생으로서,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엘리트로서 일본과 한국에서 독립을 위해 민족을 위해 애쓰다가 이옥은 1928년 12월 25일에 병으로, 유원우는 1938년 2월 24일 강연 중에 쓰러져 사망하였다.

이들의 활동과 생애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청년 학생들에게 공부와 취직 등 자신의 삶이 중요하겠지만 그만큼 내가 속한 공동체, 그 공동체 속의 약자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이고 모두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남겨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옥에게 애국장(2009년), 유원우에게 애족장(1990년)을 각각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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