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공적개요
2023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오덕홍

훈격아이콘 훈격: 애족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7년

주요공적

1907년 나주에서 소규모 유격부대로 의진을 편성, 일본군과 교전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오덕홍 / 김일언 / 정래의

오덕홍 , 1885 ~1909 , 애족장 (1997) 김일언 , (1859) ~미상 , 애족장 (2010) 정래의 , 1872 ~미상 , 건국포장 (2022)

1. 군대해산과 의병전쟁의 발발

대한제국은 헤이그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불법 침략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특사를 계기로 대한제국의 내정에 대한 전권을 장악하여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서울에는 일본의 박해로 황제가 강제퇴위 당하고 일본에 유치(誘致)될 것이라는 등 고종에 대한 각종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외무대신의 방한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황제 강제퇴위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정미7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그 부속 각서로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추진하였다. 군대해산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대한제국군의 반발에 대비해 일본군을 재배치하였다.

대한제국 군대해산은 1907년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가 한국주차군사령관 관저로 대한제국군 각 대대장을 소집하여 해산조칙을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조칙 낭독 후 시위대 병력을 오전 10시까지 도수체조를 한다는 명목으로 훈련원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이 군대해산에 분개하여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중대장 보병 정위 오의선도 자결하였다. 이에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시위대 병사들이 봉기하자 한국주차군사령부는 일본군 제13사단 51연대 제3대대 병력을 주축으로 공병, 기관총 3문 등을 동원하였다. 시위대와 일본군의 전투는 오전 내내 치열하게 전개되다가 제1연대 제1대대의 탄약이 떨어지면서 점차 줄어들고 결국 시위대의 병영이 점령당하였다. 시위대의 봉기가 실패로 끝났지만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확산되었다.

2. 유격의병장 오덕홍 선생

오덕홍(吳德弘) 의병장은 1885년 6월 16일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8월 12일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 20여 명을 이끌고 나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한 1909년은 1907년 8월 전국으로 확산된 의병전쟁이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대응하여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을 때였다.

1907년 8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때 1907년 9월 기삼연 의병부대가 장성에서 봉기하였다. 9월 이후 일정기간 동안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새로운 의병부대들은 대부분 기삼연 의병부대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주지역 의병들도 기삼연 의병부대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특히, 김태원 의병부대는 기삼연 의병부대와 연대하여 9월 24일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다. 김태원 의병장은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으로 활동하였고, 때로는 별동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또한 1907년 11월에는 전해산 등과 독립된 의병부대를 창설하여 나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8년 4월을 기점으로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나주지역에서는 전해산, 오성술, 조경환 등이 ‘대동창의단’을 창설하여 1908년 8월부터 다시 의병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후 나주 등지는 일본군의 탄압이 집중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지만 권택, 박사화, 나성화, 박민홍, 정도홍, 김도숙 의병부대 등이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일까지 30여 일간 전개된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위축되었다.

호남창의 영수 기삼연선생 순국비(전라남도 장성군)
호남창의 영수 기삼연선생 순국비(전라남도 장성군)

이와 같은 시기에 오덕홍은 의병들을 모집하여 30여 명 규모의 유격부대를 창설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소규모 유격부대가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작전을 위해 보병 2개 연대 2,260명과 해군 및 현지의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였다. 그리하여 호남 동북에서 서남으로 포위망을 압축하였고, 해안선에는 육지에서 밀려오는 의병들을 공격하기 위해 수뢰정대를 출동시켜 해안을 봉쇄하였다. 일본군은 1909년 여름에 들어서도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전쟁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했던 것이다.

오덕홍은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대항하여 의병부대를 이끌고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거나 배신자 등을 처단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오덕홍 의병부대 등의 유격전은 성과를 보여 10월 1일로 종료하려고 했던 남한대토벌작전이 10월 25일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오덕홍 의병장은 1909년 9월 23일 나주군 아계면(芽界面) 일동(日洞)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이틀 후인 25일 피살 순국하였다. 오덕홍 의병장은 의병전쟁 마지막 시기 가장 치열했던 의병전쟁 전장지에서 의병전술의 전형을 보여준 의병장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산남의진 김일언·정래의 선생

김일언 의병장은 1907년 4월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재기한 산남의진(山南義陣) 참여하여 우포장(右砲將)에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정용기 의병장이 순국한 이후 총대장직을 이어받은 정환직 의병장, 최세윤 의병장 휘하에서도 활동하였다. 최세윤 의병장 휘하에서는 도포군(都砲軍)으로 활동하였다.

정래의 의병장도 정용기 의병장이 재기한 산남의진의 우익장, 좌익장, 참모장으로 경상북도 흥해·영해·청하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1926년 3월 산남의진 생존자 모임인 참동계(叅同契)를 조직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김일언 의병장과 정래의 의병장이 참여하여 활약한 산남의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측근으로 시종관이었던 정환직(鄭煥直)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규모의 의병봉기를 계획한 것에서 출발한다. 정환직은 1905년 12월 관직을 사임하고 상하이에서 신식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아들 정용기를 불러 뜻을 전하고, 군자금으로 하사금 5만 냥과 전 참찬 허위(許蔿)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난 동료들의 모금액 2만 냥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정용기·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이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1906년 3월 29일 정용기를 총대장으로 하는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1906년 4월 28일, 흥해군(興海郡) 우각(牛角, 포항시 북구 신광면)을 지나던 중, 경주진위대에서 ‘정환직이 서울에서 구속되었으니 협상하자’는 연락을 받고, 정용기는 중군장 이한구에게 모든 지휘권을 위임하고 경주진위대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이한구 의병장을 중심으로 영천, 강구, 청하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7월 하순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산남의병 항왜혈전 기념비(경상북도 포항시)
산남의병 항왜혈전 기념비(경상북도 포항시)

1906년 9월 석방된 정용기 의병장은 1907년 봄이 되면서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부장들과 만나 제1차 산남의진처럼 다시 결성하기로 하였다. 4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의병 모집을 시작하여 4월 중순에 산남의진을 다시 결성하였다. 제2차 산남의병 총대장에 정용기 의병장을 추대하고 김일언 의병장은 우포장(右砲將)에, 정래의 의병장은 우익장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산남의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7년 7월경이었다. 산남의진은 본진 약 300명을 2대로 나누어, 1대는 죽장에서 천령(泉嶺, 함양군)을 넘고, 1대는 신광에서 여령(麗嶺)을 넘어 7월 17일 청하읍(포항시 청하면)을 공격하였다. 청하읍내로 입성하여 창고의 무기 등을 몰수하고 분파소 등을 파괴한 뒤 한인 순사 1명을 처단하였다.

청하를 장악한 뒤 천령으로 돌아와 몰수한 무기 일부를 산속에 은닉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군 대부대가 포항으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현 상황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천령을 넘어 죽장으로 이동하였는데 무기와 탄약의 부족으로 북상은 지연되었다. 이 무렵 대구진위대 참교 출신 우재룡(禹在龍)이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함께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산남의진이 영천 화북면 자천(慈川)을 거쳐 청송지역으로 이동하자 일본군이 영천에서부터 추격해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부대를 2대로 나누어 영천 화북에서 청송 현서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청송 안덕으로 이동했다.

1907년 8월 14일 청송 안덕면 신성(薪城)에 도착한 후 신돌석 의병부대로부터 일본군이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주요 지점마다 매복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제12중대의 1개 소대 병력 약 30명이 신성지역으로 들어오자 밤새도록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8월 15일 새벽 현동 추강(秋江) 뒷산으로 패주하였다.

청하군 죽장면 절골 개흥사(開興寺)에 머물고 있을 때인 8월 18일 강릉의병부대가 내려와 합류하였다. 이날 김일언 의병장은 죽장면 침곡(針谷)에서 일본군 척후 1명을 사살하였고, 8월 24일에는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유인하여 일본군 1명과 영천관포들을 체포하였다. 관포는 타일러 보내고, 일본군 1명은 처단하였다. 일본군은 자양전투의 보복으로 영일수비대와 청송수비대가 연합작전을 전개하였지만 산남의진은 오히려 8월 25일 청하읍을 공격하여 일본군 1명이 사살되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 등이 소각되는 피해를 입혔다.

산남의진 죽장 입암리 사적비(경상북도 포항시)
산남의진 죽장 입암리 사적비(경상북도 포항시)

산남의진은 음력 9월 초순까지 강릉에 도착할 계획을 세우고 북상 준비를 하면서 8월 29일 본진 병력을 (淸河郡) 죽남면(竹南面)의 매현(梅峴,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매현리)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8월 29일 오후 4시, 9월 1일(양력 10월 7일) 척후병으로부터 두차례 "추격하는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따라 김일언 의병장은 조암(瞗巖)으로 이동하여 매복하였고, 우재룡 의병장은 작령(雀嶺)으로, 이세기 의병장은 광천(廣川)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이세기 의병장이 입암리 뒷산을 지나던 중 골짜기 개천에서 일본군이 안동권씨 문중 회관 영모당(永慕堂) 대청에서 모두 누워 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 시각이 저녁 9시 30분경이었기에 이세기 의병장은 기습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잠복해 있던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한참을 사격한 뒤 반응이 없자 일본군이 죽거나 도망간 것으로 판단하고, 입암서원(立岩書院) 근처 주막으로 이동해 늦은 저녁식사를 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공격을 피해 있다가 추격하여 주막을 기습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기습에 저항하였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이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였다.

정용기 의병장이 순국한 후 입암전투로 의진의 지휘부가 무너지자 남은 장령들이 정환직 의병장에게 총대장으로 산남의진을 이끌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정환직은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수락하였다.

산남의진은 영일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근거지를 마련하고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이때 정래의 의병장은 좌익장, 김일언 의병장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청송의 보현산과 영일의 북동대산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7년 10월 9일에 청하분파소를 공격하여 순검 1명을 처단하고 분파소를 소각하였다. 또 10월 21일(양력 11월 26일) 흥해를 공격하여 우편취급소와 분파소를 불태우고 취급소장 등 3명을 처단하였다. 11월 4일에는 신녕(新寧, 영천시 신녕면)을 공격하여 분파소에 보관되어 있던 총기 등 60여 점을 확보하였다. 이튿날인 5일에는 의흥(義興)을 공격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총 49자루를 확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11월 7, 8일 청송 두방리(斗坊里)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비가 내려 화승총을 쏠 수 없었고, 탄약도 거의 떨어졌으며 통신도 두절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일본군은 이틈을 노려 기습적으로 공격해 왔는데, 11월 8일, 청송 유전(楡田)에서 크게 교전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11월 10일에는 추격하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보현산으로 모인 뒤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청송으로, 다른 하나는 영일군 기계(杞溪)로 이동하였다. 11월 16일에는 흥해를 공격하게 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검 1명씩을 처단하였다.

대장 정공 양세 순국기념 산남의진비(경상북도 영천시)
대장 정공 양세 순국기념 산남의진비(경상북도 영천시)

그러나 일본군과의 지속적인 전투과정에서 주요 의병장이 전사하거나 무기와 탄약을 보충하기 힘든 상황에서 산남의진의 전력이 점점 약화되고, 일본군의 포위망도 계속 좁혀져 왔다. 이 때 13도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자 북상을 추진하여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각자 상인 또는 농부로 변장하여 관동으로 집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정환직 의병장이 영일군 흥해면 마산리(馬山里)에 머물다가 일본군 수비대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1907년 11월 7일(양력 12월 11일) 죽장면 각전 고천(高川)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에 잡혀 대구로 압송되던 중 11월 16일(양력 12월 20일)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정환직 의병장의 순국으로 관동집결도 무산되었다.

정환직 의병장이 순국한 이후 최세윤이 새롭게 산남의진 총대장으로 추대되었고, 산남의진도 재정비되었다. 재정비된 산남의진에서 정래의 의병장은 참모장에, 김일언 의병장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정래의 의병장과 김일언 의병장은 최세윤 의병장을 보필하면서 경상도 일대에서 장기전을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남동대산을 근거지로 하고 부대를 소규모 유격대로 나눠 보현산, 팔공산, 주왕산, 철령, 주사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최세윤 또한 1908년 8월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이세기와 서종락 김사곡 등이 전사, 체포되면서 산남의진은 와해되고 말았다. 김일언 의병장의 의병활동도 산남의진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김일언 의병장은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한편, 정래의 의병장도 역시 산남의진이 해산됨과 동시에 의병활동을 멈추었지만 산남의진 생존자 모임인 참동계를 조직하여 의병으로 다시금 활동하고자 하였다. 정래의 의병장은 조성목, 정순기, 정호용 등과 은밀히 모임을 갖고 산남의진의 재건과 의병을 잇는 구국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순국의병추모사업 등을 하기 위한 단체로 위장한 참동계를 조직하였다. 참동계는 흥해, 영천 등 영남일대에서 취지를 알리고 동지를 규합하는 등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밀정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이 때 정래의 의병장은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자백 강요, 심한 고문 등을 당하였지만 체포 직전에 주요 서류 등을 소각했기에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결국 1927년 10월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정래의 의병장은 202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 > 오덕홍(관리번호:9278)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
이전달 다음달
맨 위로 이동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