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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희경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8년

주요공적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대표위원으로 활동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차장 등으로 활동, 독립운동 자금 모금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이희경 , 1889 ~1941 , 독립장 (1968) 나용균 , 1895 ~1984 , 애국장 (1990) 황기환 , 1886 ~1923 , 애국장 (1995)

1.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의 전개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점한 후 국제사회에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세계열강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부정한다는 것과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열강들이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외교활동이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외교활동을 주요한 독립운동 방략으로 삼았다.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각지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한국독립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국 정부의 후원과 지원을 얻는 일이었다.

유럽지역 외교활동을 주도했던 파리위원부가 있던 건물ⓒ독립기념관
유럽지역 외교활동을 주도했던 파리위원부가 있던 건물ⓒ독립기념관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발맞추어 추진되어 나갔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파리강화회의는 그 첫걸음이었다.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프랑스 파리에서 전후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외무총장에 선임된 김규식을 파리위원부 대표로 임명하였다. 파리위원부는 「통신전」(Circulaire)을 발행하여 유럽 언론기관에 한국독립운동 관련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의 처지와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또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문 등을 보내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파리강화회의 이후 유럽에서 개최되는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지속적인 외교활동을 펼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당대회에서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이 통과된 것, 1919~1920년 영국 하원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되고 ‘대영제국 한국친우회’가 조직될 수 있었던 것 등이 대표적인 외교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각국 정부의 후원과 지원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상은 중국과 러시아 정부였다. 임시정부는 쑨원(孫文)을 수반으로 하는 호법정부(護法政府)가 세워지자, 외무총장 신규식을 파견하여 국서를 봉정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호법정부는 광둥(廣東)국회에서 ‘한국독립승인안’을 상정·통과시키고, 임시정부의 외교관을 광둥에 머물도록 허용하고 재정을 원조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러시아에 대한 외교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임시정부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정부를 구성한 후, 러시아에 대한 외교활동에 나섰다.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레닌(Lenin)에게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요청한 것은 그 시작이었다. 레닌은 200만 루블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고, 그 중 60만 루블을 지원하였다. 1922년 1월에는 코민테른 주관으로 모스크바에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가 개최되자, 대표들을 파견하면서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유럽 각국과 열강들을 대상으로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한국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부각시키고, 한국민족의 존재와 위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러시아 등의 국가들로부터 협력과 지원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2023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황기환(黃玘煥)·이희경(李喜儆)·나용균(羅容均) 등 세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전개한 외교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인물들이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활동의 지원군, 이희경

이희경(李喜儆, 1889~1941)은 1889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관하리 66에서 태어났다. 순천군 사립 시무학교(時務學校)에서 수학하였고, 1905년 4월경 일본 도쿄 고이카와구 야나기쵸 용전관(龍田館)에 머물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다.

1905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오하이오에서 보통과 중학과정을 마쳤다. 웨슬리대학에 1년 재학한 후, 1911년에 일리노이대학 의학전문과에 진학하여 1916년 5월 31일 졸업하였다.

1911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에 참여하여 임원과 총무를 맡았다. 지방회의 자치제도와 규칙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1916년 6월 하와이로 가서 병원을 운영하며 한인사회 의료체계 마련에도 기여하였다.

1917년 9월 29일 한국으로 돌아와 평양에 머물던 중 1919년 3·1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하였다. 직접 만세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평양·개성·서울로 이동하며 만세시위의 열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외교활동 분야에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5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군무위원장, 임시회계검사원,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제1기 간호원(1919. 08)
대한적십자회 제1기 간호원(1919. 08)

안창호·서병호 등과 함께 대한적십자회 재건에도 앞장섰다. 대한적십자회는 1905년 10월 대한제국 칙령 제47호에 의해 조직되었다가 1909년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적십자사에 통합되었던 단체이다. 발기인 대표로 1919년 8월 29일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대한적십자회 재건을 이끌었다. 회규를 제정하고, 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초창기 대한적십자회의 토대 구축과 체제 확립에 힘썼다. 간호원양성소와 병원 설립도 추진하여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력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필요한 재정 마련을 위해 1919년 10~11월 미국 시애틀·샌프란시스코·워싱턴·로스앤젤레스·시카고 등지의 한인사회를 직접 찾아가 선전·홍보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미주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이끌어냈다. 대한적십자회 회원 모집과 지부 설립에도 적극 나서 대한적십자회 북미지부를 설립하고, 의연금 4,000여원을 모집하여 상하이 본부로 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미의원시찰단(美議員視察團)’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교제위원에 선정되어 외교활동을 펼쳤다. 8월 5일 상하이 아스타하우스 호텔에서 개최된 환영회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진정서」를 미국 의원들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실상을 알렸다.

치체린 접견을 요청한 이희경의 서신(1922.03.22.)
치체린 접견을 요청한 이희경의 서신(1922.03.22.)

1921년 5월 러시아와 외교교섭을 위해 임시정부 특별전권대표로 안공근과 함께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 파견목적은 모스크바 자금 문제와 관련하여 한형권의 활동 내역을 파악하고, 임시정부와 러시아 정부·국제공산당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 그리고 이들로부터 자금지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22년 1월경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6개월여 간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3년 1월경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다시 의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베를린대학 부속병원에 근무하면서 호흡기 분야를 전공하였다. 그러면서 독일에 체류하는 한인 유학생들의 실태와 관련 소식을 미국 한인사회에 알렸다.

1924년 미국으로 돌아와 독일에 유학하는 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뉴욕지방 한인들과 함께 구제금을 모집하여 유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1925년 4월에는 서재필(徐載弼)·유일한(柳一韓)·정한경(鄭翰景) 등과 함께 유한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서기로 근무하며, 각종 사무·출장업무를 수행하는 등 회사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29년경부터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2년 여간 미국 뉴저지의 위생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건강 회복 후, 펜실베니아 소재 병원에서 의원으로 근무하였다.

1937년 중순 국내로 돌아와 호흡기 전문의로 활동하였다. 서울 인사동에 병원을 개업하고, 언론에 위생과 관련된 글을 게재하는 등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1941년 6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2·8독립선언과 국민대표회의의 든든한 조력자, 나용균

나용균(羅容均, 1895~1984)은 1895년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운학동에서 나도진의 8남 7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호는 백봉(白峰)이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학부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대두로 독립운동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되자, 한국인 유학생들과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8년 최팔용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1919년 2·8독립선언 발표에 기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09.17.). 가운데 붉은색 원으로 표시된 분이 나용균이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09.17.). 가운데 붉은색 원으로 표시된 분이 나용균이다.

1919년 7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21년 5월 제8회 임시의정원 회의 때까지 적극적인 의정 활동을 펼쳤다. 임시의정원 법제위원회 이사와 위원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관제 및 헌법 개정에 힘썼다. 또한 국제연맹회의 안건 수정 특별위원과 정무조사특별회원을 지냈다.

1921년 5월 12일과 19일 상하이에서 두 차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촉진연설회에서 발기인으로 활약하였다. 김병조(金秉祚)·이영열(李英烈)·서병호(徐丙浩)·한진교(韓鎭敎)와 함께 연설회 개최를 주도하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5월 19일 제2회 연설회 직후에는 참석자 300여명의 동의를 얻어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조직을 촉진하기 위한 조직위원 20인중에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독립신문』 1921년 5월 21일자에 게재된 국민대표회의 촉진 제2회 연설회 관련 기사ⓒ독립기념관
『독립신문』 1921년 5월 21일자에 게재된 국민대표회의 촉진 제2회 연설회 관련 기사ⓒ독립기념관

1921년 8월 상하이·베이징(北京)·톈진(天津)의 대표들이 협의하여 국민대표회주비회를 조직하자,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11월,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로 향했다.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몽골 등 각국 민족운동 단체 대표들의 모임이다.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인 러시아와 결합을 통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르쿠츠크를 거쳐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조선대표단에 합류하였다. 공식·비공식으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다. 또 조선대표단 50여명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속히 개최하자는 것을 결의하였다. 대회 기간 중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원과 가깝게 지내고, 대회선언문에 서명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이르쿠츠크파 인사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후 1922년 2월 2일 대회가 종료되자, 같은 해 3월경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 활동을 재개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에 참여하였다.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에 관한 모든 사항을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새롭게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12명의 위원 중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서기에 임명되어 1922년 5월 10일, 남형우·김철·원세훈·서병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선언서(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宣言書)」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을 통해 “본 주비위원회는 시세의 추세와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과거의 모든 분규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이 재차 통일적·조직적으로 진행하도록 하는 양대 안건 하에 국민대표회 소집사항도 준비하고 책임을 부담하여 성립 되었”음을 밝혔다.

1923년 유학을 위해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대학교에 재학하며 정경학(政經學)을 전공하였다. 1927년 3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를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한국민주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제헌국회 의원과 제4·5·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제6대 보건사회부장관과 제6대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이후 서울 명륜동에 거주하다가 1984년 7월 6일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 유럽지역 외교운동의 개척자, 황기환

황기환(黃玘煥, 1886~1923)은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영문 이름은 Earl K. WHANG이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립협회(共立協會)에서 활동하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이다. 1906년 6월까지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09년까지 지방회원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소대장으로서 중상자 구호를 담당하며 독일 베를린에 입성한 부대를 이끌었다. 1918년 11월 종전 이후 유럽에 남아 있다가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프랑스 파리로 이동하였다.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후, 파리위원부에 합류하여 서기장을 맡았다. 「통신전」을 발행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한국문제를 국제문제로 부각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파리위원부 직원들. 둘째 줄 맨 오른쪽이 황기환이다.
파리위원부 직원들. 둘째 줄 맨 오른쪽이 황기환이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맡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고, 같은 해 10월 이관용마저 학업을 마치기 위해 스위스로 향하자,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인력의 부재와 재정의 곤란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프랑스·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의 한국 침략과 통치의 실상을 널리 알렸다.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부각시키는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1919년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 문제를 보고하였고, 1920년 1월에는 국제평화촉진회가 주최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회복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한국인 노동자와 유학생 지원에도 앞장섰다. 1919년 10월~11월,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러시아 무르만스크의 한국인 노동자 500여명을 돕기 위해 프랑스·영국 정부와 교섭을 벌여 그 중 일부가 프랑스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19년 1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는 프랑스로 오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학교와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1920년 1월 8일 프랑스 인권옹호회와 협의하여 ‘한국문제대연설회’ 개최를 이끌어냈다. 파리지리연구회대회장에서 열린 이 연설회에는 정치가·언론인 등 각계인사 5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같은 해 4월 23일에는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열린 평화회의 최고회의에 이미 제출한 「한국독립안 토론 요구」를 갱신하는 취지의 전보를 보내기도 하였다.

파리위원부에서 간행한 『자유한국』 제2호 표지
파리위원부에서 간행한 『자유한국』 제2호 표지

1920년 5월, 월간잡지 『자유한국』(La Corée Livre)을 간행하였다. 불어로 제작하였으며, 한국독립운동 관련 소식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만행과 관련된 내용을 담았다. 유럽의 각 언론기관과 정부의 저명인사들에게 발송하여 한국의 현실과 역사·문화를 알리는데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1920년 9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런던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외교활동을 펼쳤다. 1920년 10월 26일 영국의 언론인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와 협의하여 ‘대영제국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the Korea in Great Britain) 결성을 주도하였다. 영국의 국회의원·학자·신문기자 등 60여명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통해 영국인들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냈다. 아울러 한국친우회에서 ① 한국 내 사회·정치·경제·종교에 대한 현황을 조사하여 널리 선전할 것, ② 한국민족의 정의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에 동정적 원조를 제공할 것, ③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옹호할 것, ④ 한국에서 박해받고 있는 과부와 고아 또는 정치상·종교상의 희생자에 대한 위안 구호할 것 등이 결의되는데 앞장섰다. 그밖에 런던의 자유교회·세례교회·예수교연합회에서 한국의 참상을 보고하는 등 영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파리위원부에서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
파리위원부에서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

1920년 12월, 『구주의 우리사업』 간행에 참여하여 파리위원부가 설립 이후부터 추진한 대유럽 외교활동을 소개·정리하였다. 1921년 6월 12일에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이사회 수상회의에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 사람의 청원」이라는 인쇄물을 배부하고,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도 보냈다. 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수탈에 대한 실상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하였으며, 「日英同盟반대안」을 공식으로 제출하였다. 같은 해 6월 23일에는 프랑스 한국친우회(Les Ami De la Corée) 결성식에 참석하였다.

1921년 8월경 이승만의 요청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워싱턴회의에 제출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위함이었다.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열린 워싱턴회의에 참석하였고, 이 기간 중에 하와이에 파견되어 민찬호와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적극 나섰다.

이후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활동을 계속 하던 중 1923년 4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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