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인사회를 통합하려고 노력한, 안원규
안원규는 1877년 8월 30일 서울에서 아버지 안문학(安文學)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2세 때인 1889년부터 1902년까지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문산포(汶山浦) 상리(上里)에서 살았다. 그의 「이력서」 의하면, 12세부터 25세까지 파주군 문산포에서 살면서 상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안원규는 당시 하와이 이민 광고를 보고 1903년 3월 3일 두 번째 이민배인 캡틱(Coptic)호로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이민자 명단」에 보면, 이민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이고, 홀아비(widower)로 적혀있다.
하와이에 이민을 온 후에는 사탕수수농장에서 1년 동안 노동을 하였고, 1903년부터 1907년까지 잡화점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1907년부터 계속해서 제봉업에 종사하여 양복점을 경영하였다. 그의 「이력서」에 최장기능(最長技能)으로 ‘재봉 커팅’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양복 재단 기술을 배워 양복점을 운영하였다.
하와이로 이민을 온 한인 노동자들은 이민 초기부터 단체를 결성하여 약 20여 개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1903년에 홍승하·윤병구 등이 호놀룰루에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를 필두로 친목회 등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같이 조국의 국권이 침탈당하자, 하와이의 에와친목회와 북미의 공립협회는 재미한인공동대회를 개최하여 일본배척을 공결(公決)하고 대한제국정부에 「배일결의문」을 발송하는 등 항일운동의 기치를 본격화하였다. 1906년 3월 10일 오아후섬 와이파후에서 안원규가 중심이 되어 전도원·정상교 등과 함께 환난상구(患難相救)·일화배척(日貨排斥)을 내걸고 와이파후공동회를 결성하였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한국 특사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해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국권을 빼앗기 시작하였다.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소식이 전해진 후 하와이의 한인들은 이를 ‘정변’으로 표현하면서 이에 적극 대응하고자 하였다. 정미조약 이후 하와이에서 국망 사태임을 인식하고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각 섬에 여러 단체가 통일하여 ‘한인합성협회’가 탄생되었다. 한인합성협회는 하와이 각 지방에 조직되어 있었던 단체 대표자들이 1907년 9월 2일 오전 9시 하와이의 여러 단체가 합하기로 하고 호놀룰루에서 각 단체 주무원들과 정원명·임정수·김성권·이태수 등이 회합을 가진 뒤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인합성협회 합동발기대회 결의안은 다음과 같다.
합성협회 합동발기대회 결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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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국의 국권광복운동은 후원하며 재류동포의 안녕을 보장하며 교육사업을 증지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힘을 모아 단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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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된 단체들을 결합하여 통일기관을 설립하고 그 명칭을 한인합성협회라 하며, 호놀룰루에 총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 있던 단체들은 일체 폐지한 후에 한인합성협회 지방회를 설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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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인합성협회 총회는 시찰원을 각 지방에 파송하여 아직까지 합동에 참가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들에게 합동의 의사를 설명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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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인합성협회 총회는 기관신문을 발행하되 그 명칭을 『한인합성신보』라 하며, 기왕에 각 단체가 발행하던 회보들을 『합성신보』에 부합하여 실력을 집중하고 언론일치를 도모하게 함.
하와이 한인단체들이 한인합성협회로 통합하게 된 배경은, 정미조약의 소식을 듣고 하와이 한인단체들이 통합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한인합성협회의 취지서는 『한인합성신보』 창간호에도 게재되었으나, 이 신문이 현재 남아있지 않아 그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한인합성협회 창립 당시 취지서는 1907년 9월에 제작된 『합성협회장정(合成協會章程)』 첫 번째 장에 실려 있다. 그런데 위의 장정에 실린 취지서는 한문투로 작성되어, 일반민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한인합성신보』에 실린 취지는 이를 보다 쉽게 풀어서 게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인합성협회 취지서는 다음과 같이 거의 한문투로 작성되었다.
절유아한지시국정형(窃惟我韓之時局情形)컨대 참불가인언야(參不可忍言也)로다. 연즉고아한민(然則顧我韓民)이 처금일지세(處今日之勢)하야 부득불(不得不) 공공(公共)한 권리(權利)와 진취(進就)할 방침(方針)을 자치(自治)하야 독립적(獨立的) 정신(情神)을 생존경쟁(生存競爭)할지니 구비단체지합성(苟非團體之合成)이면 실효(實效)를 난득(難得)이기로 선자해외유종(先自海外流踪)으로 일치단결하야 일회(一會)를 창기(唱起)하니 명왈(名曰) 합성협회(合成協會)라. 일대주의(一大主義)가 자유(自由)의 기관(機關)을 활동(活動)하야 국권(國權)을 만회(挽回)코져 함이니 유아동종(惟我同種)을 환난(患難)에 선구(先救)하며 교육(敎育)에 급무(急務)하야 문명독립(文明獨立)을 각자기도(各自期圖)하시기 유차절요(惟此切要).
하와이의 한인들은 ‘합성협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창설되었다고 하였다. 합성협회는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동포들 간의 어려움을 먼저 구제하고, 교육에 힘써 문명 독립을 하자고 하였다. 당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었던 『해조신문』 1908년 3월 19일자 논설에 「미국 하와이에서 발간하는 합성신보에 기재한 합성협회의 창립설을 좌에 번재함」이라고 하여 창립 취지문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실었다.
국권을 만회할 주의로 합하여 일회(一會)를 창기(創起)한 자는 문제가 여출일구(餘出一口)함에 일회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합성협회라. 크다. 합성이여, 장하다 합성이여. 멀리 행하는 자는 가까운데서 시작하고 높이 오르는 자는 낮은데서 시작함은 만고에 불역한 정수라. 그런 고로 급선무는 동포를 환란에서 구원하며 교육에 발달케 하여 우리 삼천리의 독립과 이천만의 생활에 무거운 짐을 우리 어깨에 독담할지라도 능히 사양치 아니하노라.
한인합성협회는 오아후섬을 비롯하여 하와이섬, 마우이섬, 카우아이섬에 산재한 각 단체가 참여하였으며, 크게 공진회·자강회·의성회·국민동맹회의 4개의 단체가 연합한 단체였다. 기존의 공진회의 기관지 『공진회보』와 친목회의 기관지 『친목회보』를 인수 통합하여 10월 22일부터 기관지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발행하였으며, 47개 지방에 지방회를 설립하고 회원을 확보하였다.
『국민보』 1955년 2월 9일자 「국민회 역사 소개」에는, “1907년에 합성협회가 되고 첫 회장은 정원명 씨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원용의 『재미한인오십년사』에 의하면, 한인합성협회 창립 당시 총회장에 임정수, 부회장에 안원규가 당선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창립 당시 임정수가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나, 얼마 후 사임하고 정원명이 총회장에 취임한 것같다. 협회의 회원은 1908년 2월경에 800여명이었고, 그후 자강회가 합성협회에 통합되면서 회원이 1,000명이 넘었다. 즉, 합성협회가 창립되고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면서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던 자강회가 1908년 3월에 병합을 하였던 것이다. 회원들은 매년 2달러 25센트의 회비를 예납금으로 하였으며, 지회에서는 지방마다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인합성협회 전성시대에는 하와이 각 섬에 지방회와 경찰소가 없는 곳이 없었고, 많은 동포가 재류하는 지방에서는 농장주의 허가를 얻어 자치를 실시하여 치안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하와이의 한인사회가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자, 북미지방의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의 합동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북미에서도 우선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합동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 한인들의 여론이었다. 이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의 최유섭(최정익)이 대동보국회 총무 장경에게 합동문제를 협의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08년 11월부터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북미 공립협회의 합동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해 12월에는 두 단체의 대표들이 ‘국민회’라는 명칭으로 합동할 것을 합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미본토의 공립협회가 하나로 합하여 1909년 2월 1일 ‘국민회’로 탄생되었다. 국민회의 창립은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이후인 1908년 11월 23일 미주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의 합동하자는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장·전 양 의사 재판후원을 같이하는 가운데 두 단체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합동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와이의 발기인으로는 안원규를 비롯하여 고석주·김성권·민찬호·이내수·강영소·한재명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양 단체가 통합되기 전인 1908년 11월 23일 합동발기회를 개최하고, 30일 「발기문」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합동조례」를 결정하였다.
합동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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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한 규칙하에 합동하고 피차에 회명을 고쳐 국민회라 칭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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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시하는 날은 융희 3년(1909) 2월 1일로 정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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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회의 규칙 기초위원을 각 3인씩 선정하여 회동 제정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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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규칙 기초위원회의 회집처는 양회에서 편의를 따라 지정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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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민회에 관한 제반 설비의 규모를 일정케 하기 위하여 공식의 행용할 제구도 규칙위원에게 전임할 일.
위의 「합동조례」에서 결정된 대로 1909년 2월 1일 미주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합동을 하고 정식으로 ‘국민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하와이 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되었으며, 공립협회는 북미지방총회가 되었다. 하와이지방총회는 1909년 6월 26일 총부회장 선거에서 총회장에 이내수, 부회장에 안원규를 선출하고, 총무 겸 구제원에 한재명, 서기 겸 재무에 박상하, 학무 겸 외교원에 민찬호, 법무원에 임정수를 임명하였다. 이후 하와이지방총회가 성립된 초기에는 1,000여 명의 회원과 24개의 지방회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방회의 조직과 회원 확보에 노력하여 1909년 10월 현재 하와이지방총회 산하에 60여 곳의 지방회와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미의 유력한 단체인 대동보국회는 국민회에 참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미주 한인단체의 통합은 시대적 대세였고 여기에 대동보국회도 더 이상 이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이에 따라 두 단체의 통합에 합의를 하게 되었고 대동보국회의 ‘대’자와 ‘국민회’를 합쳐, 1910년 2월 10일부터 ‘대한인국민회’라는 명칭으로 미주 한인단체가 모두 통합되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병탄을 당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노예가 되었다는 소식은 하와이 시간으로 8월 28일 오후 9시 50분에 즉각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한인들은 모두들 통곡을 하였고, 그날 아무도 일을 나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모여 일본에 반대하기로 하였으며, 집안에 있는 일본물품을 모아다가 불을 질렀다. 소위 「한일합방 선고문」이 9월 6일자 『신한국보』에 게재되었다. 하와이의 영자신문 『애드버타이저』 1910년 8월 31일자에는 광무와 융희 황제의 사진과 하와이지방총회 부회장 안원규의 사진을 실었다. 이같이 강제 합방의 소식을 들은 재미 한인을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에서는 58명이 국민회관에 모여 “일본국기에 복종치 않을 것과 죽기를 아끼지 않고 독립전쟁을 일으키겠다”라고 선언하였다.
하와이에서는 일본계 신문인 『니퓨지지(日布時事)』의 기자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부회장 안원규를 찾아와 한일합병에 대한 의향과 한인들의 의향을 물었다. 이에 안원규는 “일본의 포만무례(暴慢無禮)함은 우리의 통증(痛症)히 여기는 바 오, 우리의 의향을 너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하와이 한인들 사이에는 “혹 군비를 모집하여 사람을 파송한다”거나, “교련을 부지런히 한다”라고 하는 등 독립전쟁의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현지의 영자신문에 게재되었다. 하와이지방총회에서도 즉각적으로 별다른 행동을 개시하지는 않았지만 망국의 비참함을 깨닫고 장래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하와이지방총회는 1911년 12월 18일 대의회에서 총회장에 정칠래, 부회장에 노재호를 선출하였으며, 총무에 박상하, 서기에 박원걸, 재무에 김종학, 학무에 이관묵, 법무에 안원규, 구제원에 김익성, 외교원에 홍치범을 임명하였다. 또한 회원과 동포를 막론하고 매년 의무금 5원을 받기로 하였으며, 하와이지방총회 헌장을 편찬하기 위한 기초위원으로 한재명·박상하·고석주·주인준·박기홍이 피선되었다. 실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상부를 설치하고 부원으로는 안원규를 선정하였고, 무예를 교련하기 위해 군무부를 설치하였는데 부원으로는 박상하로 선정하였다. 하와이지방총회는 매년 2월 1일 국민회 창립기념식과 8월 29일 국치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하와이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안원규는 1913년 10월 하와이 농상주식회사 사무원이 되었다. 1914년 2월 하와이지방총회 대의원회에서 총회장이 선정된 후, 총무 정병섭, 서기 박기홍, 재무 홍인표, 학무원 한재명, 법무원 조병요, 구제원 홍인표, 농상부원 안원규, 군무원 정병섭이 선임되었다. 안원규는 하와이 호놀룰루 킹스트리트(King Street) 272번지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매우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한인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한인중앙학원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계기독교청년회에 관여하던 최상호가 1914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들렀을 때, 한인기독청년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즉시 발기하여 청년회를 성립시켰다. 최상호는 원래 북미로 가서 각지의 청년회를 순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마침 하와이를 지날 때 이승만이 교섭하여 그가 하와이에 체류하게 된 것이다. 하와이의 기독청년회는 우선 중앙학원내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회장에는 이승만, 부회장에는 박상하, 서기에는 홍한식, 장재에 안원규가 임명되었다.
그러던 1919년 1월 광무황제가 붕어하였다는 소식이 하와이에도 전해졌다. 그리고 3월 9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있던 현순이 3월 9일 미주에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보로 알렸다. 상하이에서 현순은 미주시간으로 3월 9일 상오 11시경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와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종관 앞으로 3·1운동의 소식을 알렸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하와이의 모든 단체에서는 국내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4월 12일 카이무키 스트리트(Kaimuki Street)에 있는 한인기독학교에서 ‘독립축하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 독립축하회에는 하와이 한인 1,000여 명이 모였고, 안원규 등이 연설을 하였다.
3·1운동 이후 하와이에서는 간장·된장 등 일본 장류를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1919년 9월 일본제품 장류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중한장유회사(Chinese Korea Sauce Company)’를 설립하게 되었다. 중한장유회사는 간장·된장·고추장을 제조하기 위해 자본금 1만 달러로 정하고, 주식금 1매에 10달러로 하였다. 이 회사의 임시 이사원에는 안원규·정원명·이내수·강영소·한재명·여양·류복구·완해·로죠·소전례·류당·리류·양장을 선임하고, 임시회계에는 중국인 여양, 한국인 정원명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중·한 공동으로 장유회사를 설립하자는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고, 1921년 10월에 다시 제장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앞의 중한장유회사와 같이 자본금 1만 달러로 하고 주식금은 1매에 50달러로 하기로 하였다. 이 제장회사의 임시주무원은 안원규·정원명·정인수·이호직·정운서·김경운·이창준·장봉희·이인수·류한흥·안정송·전영택·서정일·강영소 등이었다.
미주의 한인사회는 이민 온 지 상당 시간이 경과하면서 내부적 갈등과 분쟁이 발생되었는데, 3·1운동은 이같은 내부적 갈등을 봉합하고 분쟁과 대립을 청산하고 하와이 한인사회를 일치 단결시켰다. 그러나 1919년 말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식어가면서, 단합된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대립과 분쟁이 발생하였다. 1920년 1월 새로 성립된 하와이지방총회의 대의회에서는 중앙총회에 예납금을 보내지 않기로 하고, 대표원도 뽑지 않기로 하고 중앙총회와 연락을 끊기로 결의하였다. 안원규는 황사용·이내수·정원명·정칠래·이종홍 등 한인감리교회 목사들과 대조선독립단의 중심이 된 공동회에 참여하여 하와이지방총회에 대립하였다. 그해 2월 하와이지방총회는 총부회장 선거에서 총회장에 안현경, 부회장에 김성기, 총무 안원규, 서기 겸 재무 최선두, 학무원 민찬호, 법무원 손덕인을 임명하였다. 한편, 1921년 3월 22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임시정부 교민단령에 따라 ‘대한인교민단’으로 만들었다. 초대 하와이 교민총단장에는 민찬호가, 부단장에는 안원규가 임명되었다.
안원규는 1921년 5월 한인 실업가인 정원명 등과 20여 명이 모여 호놀룰루한인상업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안원규, 총무에 박승준, 재무에 정원명을 선출하였다. 안원규는 호놀룰루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경영하였는데, 1923년 7월에는 호놀룰루 시내 베르타니아 스트리트(Bertania Street)에 잡화상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양물화무역회사에서 이사원으로 선임되어 자본금 모집을 담당하였으며, 국내에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진행되자 하와이에도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에는 신홍균, 서기에 염달욱, 재정 모집원은 안원규·이태성·김이제가 맡았다.
한편,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1925년 7월 16일 서재필의 초대형식으로 이승만·김영기·현순·황사용·안원규·박용만·민찬호 등 하와이의 대표자들이 모두 모여 지나간 일을 타협하고 단결을 하기 위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1928년 2월 26일에도 하와이에서 한인사회의 합동을 위한 모임이 호놀룰루의 한 식당에서 열렸다. 조용하의 초청형식으로 열린 모임에서 대한인교민단측 인사들과 대조선독립단측 인사 등 29명이 참석하였다. 안원규도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이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각파 인사들은 ‘대한민족통일촉성회’를 조직하기로 의결하였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의 설립목적은 “대한 민족의 통일을 촉성하여 독립운동의 단일기관을 창설함에 재함”이라고 하여, 최종 목표는 독립운동의 단일기관을 만드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를 조직하기 위한 촉성회 준비회를 만들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1933년 1월 국민회가 다시 복구되어, 1935년 1월 하와이 국민회에서는 독단적 운영을 막기 위해 입법기관인 참의부가 설치되었을 때 안원규는 참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에 하와이 국민회 임원선거가 있어 총회장 후보에는 조병요와 임성우가, 부회장 후보에는 유동면과 안원규가 출마하여, 총회장에는 조병요가 부회장에는 안원규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1월 20일 개최된 대의원회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인구세를 수봉하기로 결정하였다.
1937년도 하와이 국민회 총부회장을 뽑는 선거에서 총회장 후보자 박상하·김윤배·양유찬과, 부회장 후보자 박종수·김윤배가 사양하고, 총회장 후보 조병요와 부회장 후보 안원규만이 승낙을 하였다. 이에 대의장 안원규가 각 대의원들에게 후보자 1명씩을 더 추천하라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2월 대의회에서 총회장에 조병요, 부회장에 안원규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서기에 김현구, 재무에 황인환, 실업부원에 권도인, 연무부원에 이정건, 청년부원에 양유찬, 외교원에 조세은, 법무원에 김원용, 학무원에 김윤배, 사교원에 박봉집을 각각 임명하였다. 1938년 11월 18일 국민총회관에서 제1차 연합의회를 개최하여 대의원·참의원·대표원 전부를 그대로 인정하고, 의장에는 안원규, 찬의에는 이종관을 선정하였다. 1941년 3월 13일에는 국민회와 동지회가 연합한 대한광복군 후원금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안원규, 재무에 손승운·조병요, 위원에는 김원용·도진호가 선출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미본토와 하와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미주지역 한인사회가 하나로 뭉쳐져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해외한족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재미한족 9개 단체 15명의 대표들이 1941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13일 동안 호놀룰루에 회집하여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었다. 해외한족대회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 한시대를 비롯하여, 김호와 송종익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국민회 대표는 김원용과 안원규·김현구가 선임되었고, 동지회는 이원순·안현경·도진호가 대표가 되었다. 해외한족대회에서 나온 의결사항은 4월 27일 공동대회를 통해 조정되었고, 최종안은 4월 29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으로 발표되었다. 이 가운데 미주지역 독립운동과 관련된 두 가지 사항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외교활동을 위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이승만을 대미외교의 대표로 선정하였으며, 미국 국방공작을 원조하기 위해 한길수를 봉사원으로 선임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13개조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규정」을 결의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결성은 1910년 모든 한인단체가 대한인국민회의 기치아래 통합된 것과 맞먹는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미주지역 최고기관으로 탄생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지역적 차이로 미본토에 집행부를 두고, 하와이에 의사부를 두는 이원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와이의 의사부는 원래 12명으로 조직되기로 하였으나, 1941년 5월 4일 전체 12명 가운데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대표 1명이 빠진 11명으로 조직되었다. 위원장은 이원순, 부위원장은 안원규가 맡았으며, 비서위원으로 국문서기에 도진호, 영문서기에 김원용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미국국방에 대한 후원을 강화하기 위해 국방부를 확대하여, 김현구를 국방위원장에, 유진석·도진호·조광원·정월터·이태성·김영기·강영각·민찬호·전경무·윤용선 등을 국방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42년 4월 하와이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는 처음 조직보다는 확대하여 위원의 수를 총 16명으로 늘렸다. 그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 이원순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에 임명되면서, 1943년 9월 20일부터 안원규가 의사부 위원장이 되었다. 하와이 의사부는 그해 10월 4일 이승만을 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승차시켜 외교위원부를 재조직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청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통보하였다.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자 하와이 의사부는 그 활동의 중점을 워싱턴사무소 개설에 집중하기로 하였고, 12월 27일에는 의사부 위원장 안원규 명의로 이승만의 외교실책을 규탄하면서 워싱턴사무소 설립방침을 발표하였다.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는 1944년 당시 위원장 안원규, 부위원장 유진석, 집행서기 김원용, 영문서기 김현구, 국문서기 정두옥, 재무 조병요, 협동재무 김공도 등이 선출되었다. 1944년 9월 24일부터 26일까지 하와이의 9개 단체 대표들로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 의사부 위원 전체대회의 의사제와 실무부서인 6부로 나누는 2원체제로 하고, 위원장에 박상하, 부위원장에 안원규를 선출하였다. 그후 1944년 11월 21일 임시정부는 직접 임명한 주미위원부 위원을 통보하였는데, 위원장 이승만, 부위원장 김원용, 총서기 정한경으로 하고, 위원은 한시대·김호·이살음·변준호·안원규·송헌주 등 총 9명이었다.
1940년 5월 9일 중국에 있는 우파 독립운동가들은 광복운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이에 따라 하와이애국단도 그해 8월 10일 ‘한국독립당 하와이 총지부’라고 개칭하고, 한국독립당 중앙집행부의 지부가 되었다. 안원규도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에 참여하여, 김구와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는 1944년 5월 14일 제4주년 연례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 궐임된 부당장에 조병요를 임명하고, 평의원으로 안원규·강영효·유동면을 선정하였다.
안원규는 1947년 5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 퀸병원에서 입원 치료하다가 향년 70세로 별세하였고, 그의 유해는 다이야몬드헤드 기념공원묘지(Diamondhead Memorial Park)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한인합성협회 회장, 정원명
정원명은 1881년 11월 20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대흥부(大興部) 5리 열녀동(烈女洞)에서 아버지 정창규(鄭昌奎)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력서」에 의하면, 1888년부터 1892년까지 평양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그후 1894년까지 상무방(商務房)의 사환(使喚)으로 있었으며, 1894년부터 1898년까지 과일상점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99년부터 1902년까지 기독교 학교에서 학업을 하였고, 1902년부터 1903년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의 그래함 리(Graham Lee, 李吉咸) 목사의 요리사(cook)로 고용되어 일을 하였다. 차의석의 회고록에 의하면, 정원명은 평양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저녁마다 ‘면학회(Hard Learning Club)’를 열심히 다녔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선생보다도 더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였기 그는 장대현교회 선교사의 요리사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원명은 기독교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또 미국인 선교사의 요리사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영어는 거의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와이 이민이 시행될 당시 한인 노동자들의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정원명의 「이력서」에 의하면, 그는 1903년에 하와이로 와서 1908년까지 영어 통역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와이 이민자 명단」에 보면, 정원명은 1904년 2월 8일 차이나(China)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하였고, 당시 나이는 25세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아마도 이력서를 기재할 당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정원명은 하와이에 와서 에와(Ewa)농장에서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한인들을 위한 통역을 하였다. 하와이 이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통역’들이었다. 하와이 이민 당시에는 ‘통변(通辯)’이라고 불리던 ‘통역들은, 영어를 능숙하기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와이 농장에서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이민의 실질적인 주역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통역 일을 하던 현순·안정수 등은 한인사회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주도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원명도 자연스럽게 한인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통역의 역할은 매우 컸다. 통역은 농장주측과 한인 노동자 사이를 중재하는 일을 하였다. 통역들은 백인감독(Luna)의 지시사항을 한인노동자들에게 알려주었으며, 농장지배인의 명을 받아 캠프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점검하고, 병이 난 사람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등의 일을 하였다. 사탕수수농장의 통역이었던 정원명도 이같은 일을 맡아서 처리하여야만 했다. 통역들은 이밖에도 농장의 보스, 사회적 리더, 영어선생, 편지 전달자, 심지어 당시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예배 때는 설교도 하였다. 정원명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통역을 맡아 한인동포들의 각가지 어려움을 돌봐주는 등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와이 에와농장에 있던 김익룡이라는 사람은 정원명과 이만춘의 말에 감동하여 회개하게 되었다고 표창을 하여달라는 편지를 『공립신보』에 보낸 일도 있었다. 정원명은 이민 초기부터 에와농장에서 통역을 하다가,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에와상점의 점원(clerk)으로 일을 하였다.
하와이 한인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농장 캠프에는 대개 동회(洞會)라는 자치조직이 만들어져 있었다. 동회와 더불어 초기 한인조직으로는 친목회가 있는데, ‘친목회’는 1906년까지 하와이 각처에서 친목을 표방하는 단체나 조직이 여러 곳에서 결성되었다. 에와친목회는 1905년 정원명·윤병구 등 통역 등과 같이 지식층이 주도가 된 단체였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어려운 한인동포들의 환난상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단체였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1906년 5월 17일 당시 에와친목회 회장에는 정원명, 서기에는 백윤조(白允祚; 白一奎) 등이었으며, 1907년 5월경에 『친목회보』를 간행하였다. 정원명이 친목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하여 북미 한인들이 어려움을 당하자, 하와이 동포들과 협력하여 동정금 27달러를 거두어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와친목회는 단순히 친목만을 도모하는 단체만은 아니었다. 에와친목회는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동참하면서 국권회복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황성신문』 1907년 5월 16일자에 의하면, “미국 하와이에 재주(在住) 동포들이 친목회를 조직하였는데, 회원 정원명·이성칠·이만춘 등이 국채보상의 발기함을 문지(聞知)하고 불망조국(不忘祖國)의 사상으로 특별개회하고 의금(義金)을 모집하여 미화 56달러 25센트를 보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하와이의 초기 친목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국권회복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는 등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갔다. 하와이의 에와친목회와 북미의 공립협회는 재미한인공동대회를 개최하여 일본배척을 공결(公決)하고 대한제국정부에 「배일결의문」을 발송하는 등 항일운동의 기치를 본격화하였다. 하와이 각 지역에서는 일제를 배척하는 한인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오아후에서는 와이파후공동회·공진회 등이 결성되었고, 하와이섬에서는 혈성단·노소동맹단, 마우이섬에서는 의성회 등이 결성되었다.
1907년 6월 헤이그 한국특사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조약을 강요하였다. 이와 같이 조국의 국권이 상실되어 가자, 하와이 한인들도 국권을 만회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정미조약 이후 하와이의 한인들은 국망 사태임을 인식하고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각 섬에 여러 단체가 통일하여 ‘한인합성협회’가 탄생되었다. 한인합성협회는 하와이 각 지방에 조직되어 있었던 단체 대표자들이 1907년 9월 2일 오전 9시 하와이의 여러 단체가 합하기로 하고 호놀룰루에서 각 단체 주무원들과 정원명·임정수·김성권·이태수 등이 회합을 가진 뒤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민보』 1955년 2월 9일자 「국민회 역사 소개」에는, “1907년에 합성협회가 되고 첫 회장은 정원명 씨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원용의 『재미한인오십년사』에 의하면, 한인합성협회 창립 당시 총회장에 임정수, 부회장에 안원규가 당선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창립 당시 임정수가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나, 얼마 후 사임하고 정원명이 총회장에 취임한 것같다. 한인합성협회는 창립 당시부터 정원명이 줄곧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김성권이 총무로서 각종 업무를 맡았다. 합성협회의 회원은 1908년 2월경에 800여명이었고, 그후 자강회가 합성협회에 통합되면서 회원이 1,000명이 넘었다. 한인합성협회가 창립되고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면서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던 자강회가 병합을 하였던 것이다. 회원들은 매년 2달러 25센트의 회비를 예납금으로 하였으며, 지회에서는 지방마다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인합성협회 전성시대에는 하와이 각 섬에 지방회와 경찰소가 없는 곳이 없었고, 많은 동포가 재류하는 지방에서는 농장주의 허가를 얻어 자치를 실시하여 치안을 유지하였다.
이같이 하와이의 한인사회가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자, 미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의 합동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북미에서도 우선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합동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 한인들의 여론이었다. 이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의 최유섭(최정익)이 대동보국회 총무 장경에게 합동문제를 협의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08년 11월부터 하와이 합성협회와 북미 공립협회의 합동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해 12월에는 두 단체의 대표들이 ‘국민회’라는 명칭으로 합동할 것을 합의하게 되었다.
북미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는 그 명칭과 위치는 비록 상이하나, 그 목적과 주지는 동일하니, 발기인 명의로 공립협회 총회장 정재관과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총회장 정원명이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와이 합성협회와 미본토의 공립협회가 하나로 합하여 1909년 2월 1일 ‘국민회’로 탄생되었다. 양 단체가 통합되기 전인 1908년 11월 23일 합동발기회를 개최하고, 30일 「발기문」과 함께 「합동조례」를 결정하였다.
하와이 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되었으며, 공립협회는 북미지방총회가 되었다. 하와이지방총회에서는 총부회장 선거를 거행하여 정원명을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국민회 장정에 따라 장정의 범위안에서 소관 각 지방회에 통용할 「세칙」을 정하였는데 하와이에서는 세칙을 정하여 시행하였다. 이후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1909년 6월 26일 총부회장 선거에서 총회장에 이내수, 부회장에 안원규를 선출하고, 총무 겸 구제원에 한재명, 서기 겸 재무에 박상하, 학무 겸 외교원에 민찬호, 법무원에 임정수를 임명하였다. 그래서 초대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인 정원명은 6월 29일 퇴임식을 거행하였고, 이어서 그는 에와지방회 대의원에 선출되어 지방회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성립 초기에는 1,000여 명의 회원과 24개의 지방회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방회의 조직과 회원 확보에 노력하여 1909년 10월 현재 하와이지방총회 산하에 60여 곳의 지방회와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북미의 유력한 단체인 대동보국회는 국민회에 참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통합은 시대적 대세였고, 여기에 대동보국회도 더 이상 이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이에 따라 두 단체의 통합에 합의를 하게 되었고 대동보국회의 ‘대’자와 ‘국민회’를 합쳐, 1910년 2월 10일부터 ‘대한인국민회’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1910년 7월 들어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할 것이라는 ‘합방론’이 미주 전 지역에 전해졌고, “한국황제를 핍박하여 통치권을 들어서 일본황제에게 위탁”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되었다. 이에 1910년 7월 5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각 지방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대동공진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정원명을 선출하고 일제의 한국강점을 반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일제의 강제병탄에 반대하는 외교와 선전활동은 북미의 대한인국민회가 담당하고, 군인 양성사업은 하와이의 대동공진단에 일임하기로 하였다. 정원명의 이력서에 의하면, 소긍(所肯)이 ‘무예(武藝)’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아 그는 평소에도 무예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고, 무예 실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군인을 양성하는 대동공진단의 단장이 될 수 있었다.
정원명은 1910년 7월 8일 오아후섬 에와지방회 통상회에서 궐임된 학무원으로 선출되었고, 1911년 8월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중앙총회 대표원에 선정되었다. 1912년에도 정원명은 윤병구·박상하와 함께 중앙총회 대표원이었으며, 1914년에는 에와지방회 참의원회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1915년 하와이지방총회장 김종학과 재무 홍인표의 재정 흠축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반발한 세력들에 의해 기존의 임원들이 총사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후 정원명은 귀국하였으나 1918년 10월 상순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서 한인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정원명은 안원규·박원걸·이내수·김학수 등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1915년 12월 13일자로 흥사단 이사부장 안창호에게 입단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정원명 등이 흥사단에 입단하기 위해 강영소·황사용·홍언 세 사람의 이름으로 된 보증서와 이력서, 입단 회비 10달러를 내고 흥사단에 가입을 청원하였으나 입단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1919년 1월 말 미주지역에도 광무황제가 승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3월 9일 3·1운동을 국외에 알리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견된 현순이 미주 대한인국민회에 독립선언의 소식을 알렸다. 3·1운동의 소식이 하와이 한인사회에도 전파되자, 4월 12일 하와이지방총회 주최로 독립축하식을 거행하였다. 미주의 한인사회는 이민 온 지 상당 시간이 경과하면서 내부적 갈등과 분쟁이 발생되었는데, 3·1운동은 이같은 내부적 갈등을 봉합하고 분쟁과 대립을 청산하고 하와이 한인사회를 일치 단결시켰다. 그러나 1919년 말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식어가면서, 단합된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대립과 분쟁이 발생하였다. 1920년 1월 새로 성립된 하와이지방총회의 대의회에서는 중앙총회에 예납금을 보내지 않기로 하고, 대표원도 뽑지 않기로 하고 중앙총회와 연락을 끊기로 결의하였다. 정원명은 황사용·이내수·안원규·정칠래·이종홍 등 한인감리교회 목사들과 대조선독립단의 중심이 된 공동회에 참여하여 하와이지방총회에 대립하였다.
에와상점 점원을 그만둔 후 정원명은 개인사업으로 가구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일제의 정보자료에 따르면 1920년 당시 1∼2만 달러의 자산을 가졌다고 하였고, 1923년에는 4만 엔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독립적인 자영업을 경영하였다고 하였다. 1921년 5월 호놀룰루에 거주하는 한인 실업가들인 정원명·안원규 등 20여 명이 모여 호놀룰루한인상업회를 조직하였는데, 회장에 안원규, 총무에 박승준, 재무에 정원명이 선출되었다. 1922년 당시에는 호놀룰루한인상업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23년에는 한인기독교청년회의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정원명은 1923년 한인감리교회 학생 기숙소가 설립되었을 당시 안원규와 함께 이사부원으로 임명되었다.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된 이후 이를 적극 후원해 왔으나,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와이 한인들은 1925년 1월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신한민보』 1925년 3월 12일자 기사에 의하면, 하와이 유지 30여 명이 임시정부가 청사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인구세 1달러씩을 거두어 재무부로 보내기로 하였다고 한다. 임시정부후원회의 회장에는 정원명이 선출되었고, 서기는 강영효, 회계는 함삼여, 그리고 회원으로는 황사용·최두숙 등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4월 15일 재무총장 이규홍의 이름으로, 임시정부후원회 회장 정원명에게 하와이에서 인구세와 기타 기부금은 모집할 수 있는 위임 공문을 보냈다. 그래서 정원명은 5월 20일자로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재정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보낸다는 공포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해 11월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백암 박은식이 별세하자, 임시정부후원회 주최로 한인감리교회에서 회장 정원명의 사회하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이 무렵 태평양지역의 민족문제를 다루는 태평양회의가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범태평양 YMCA회의(Pan-Pacific YMCA Conference)로 발의되었던 것이나, 준비과정에서 태평양문제연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로 명칭이 바뀌었다. 제1차 태평양회의는 1925년 6월 30일부터 7월 15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렸는데, 여기에는 미국과 하와이·필리핀·일본·조선·중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지에서 파견된 140여 명이 참석하였다. 국내에서도 신흥우(조선기독교청년회)·송진우(동아일보)·김양수(조선일보)·유억겸(연희전문)·김종철(보성전문) 5명이 파견되었고, 북미에서는 서재필도 합류하였다. 6월 27일 저녁 7시 반에 국내에서 온 대표 5명을 위하여 하와이 각 한인단체에서 연합환영회를 누아누우 기독청년회관에서 열었다. 정원명을 비롯한 양유찬, 조광원, 김영기, 한길수, 김리제, 신홍균 등의 한인위원회에서 국내 대표단의 환영을 준비하였다.
1920년 후반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고 있었고, 이같은 분위기는 하와이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8년 2월 26일 정원명을 비롯한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 29명이 모여 ‘대한민족통일촉성회’를 결성하였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의 회장에는 조용하, 서기에는 최창덕, 집행위원에는 정원명 등 27명이 선출되었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준비회의 조직은 서무부·선전부·의사부로 구성되었는데, 정원명은 의사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제1차대회가 그해 5월 20일 개최되어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대립과 분쟁을 청산하고 통일과 단결을 역설하였으며, 민족독립을 위해 분투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에는 새로운 통일운동이 일기 시작하였다. 1930년 1월 13일 안원규의 집에서 하와이 지도자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한인협회의 임시위원장에는 조용하가 맡았고, 정원명 등 15명이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대 초반 하와이 한인사회에 커다란 분파투쟁이 일어난 후, 1933년 1월 하와이 교민단 대의회 결의안에 의하여 교민단을 해체한 후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복구되었다. 1934년에 들어 하와이 국민회의 재정상태가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그해 4월 26일 국민회 임원들이 총사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해 5월 27일 와이키키공원에서 야유회를 열어 정원명 등 지도적 인사들이 참여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의 문제를 연구할 목적으로 ‘하와이 사회문제연구대회’를 개최하였다. 그후 정원명은 1936년 1월 하와이 국민회 대의원회에서 참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2월에는 역사편찬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임시정부의 군사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찬무회를 조직하였는데, 정원명은 찬무회의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정원명은 1936년 3월 하와이 한인교회연합회의 정식 이사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교회를 핍박하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천도교 교조 수운 최제우를 경축하는 1937년 4월 5일 에 호놀룰루천도교회 종리원에서 천일(天日) 경축일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1937년 6월에는 그가 그 전에 경영하였던 사우스 킹스트리트(South King Street) 1401호에 있던 가구상점을 다시 구입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2년 6월 23일 갑자기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별세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오아후 공동묘지(Oahu Cemetery)에 안장되었다. 정원명은 국내의 국채보상운동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독립금 등 각종 독립운동자금을 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