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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익상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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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김익상 , 1895 ~(1941) , 대통령장 (1962)

1894년 갑오변란, 즉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를 계기로 봉기한 의병전쟁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은 지속성과 광범성, 근대성과 다양성, 그리고 강력한 투쟁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국내는 물론 국외 각지 한민족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는 광범성을 가졌고, 대한제국시대의 전제군주국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국민국가 즉 민주공화국으로 새롭게 독립하려는 근대성을 가졌다. 또한 운동 노선과 이념의 다양성 또한 한국 독립운동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매우 격렬하게 전개된 한국 독립운동, 목숨을 바치는 의열투쟁도 있어

게다가 한국 독립운동은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시작부터가 무장투쟁인 의병전쟁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은 한말 국민적 의병전쟁을 거쳐 1920년대 만주·노령의 독립군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930·40년대 항일 빨치산 투쟁이나 조선의용대(군),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투쟁성의 상징으로 무장 독립투쟁의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었고, 무장 독립투쟁은 여러 독립운동 노선과 방략의 원천이자 동력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한국 독립운동의 독특한 방략인 의열투쟁도 있었다. 이는 자신의 한목숨을 바쳐 온 인류에게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의 대의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열투쟁은 테러와 매우 다르다. 우선 목적부터 큰 차이가 있다. 테러는 개인이나 일부 집단 혹은 단체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의열투쟁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공격대상 또한 테러는 불특정 다수로 삼아 선량한 시민의 피해가 크지만, 의열투쟁은 침략 원흉이나 공공의 적 또는 식민기관이나 단체 등으로 특정한다. 또한 의열투쟁은 정정당당하게 거사의 목적∙이유∙주체를 밝히지만, 테러는 그렇지 않다. 달리 말하면 의열투쟁은 부귀와 영화를 위한 것도, 개인의 공명심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직 한목숨을 던져 민족의 대의를 구현하고, 역사를 바꾸고,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의열투쟁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거기에는 의사와 열사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사상과 철학, 조국애와 민족혼이 녹아 있는 것이다.

의열단 출신의 김익상

김익상은 의열단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폭파와 상해 황포탄 의거를 결행한 독립운동가이자 천추에 길이 남을 의사(義士)이다. 의사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922년 상해 황포탄 의거 당시 나이가 28세로 보도된 사실을 감안하면, 1895년생으로 생각된다. 의사의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공덕리(孔德里) 286번지로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이다.

김익상의 본가는 시외 공덕리로 판명
김익상의 본가는 시외 공덕리로 판명

조실부모한 의사는 넉넉하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려서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마포에 있던 삼호보성소학교(三湖普成小學校)에 재학 중 집안이 어려워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한 뒤, 의사는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호구지책을 삼았다. 1919년경에는 서울 교북동(橋北洞)에 있던 연초회사인 광성연초공사(廣盛煙草公司)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고, 1921년 6월경 봉천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이 나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의사는 매우 기뻤다.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중국으로의 전보 발령은 그 같은 꿈을 이룰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는 비행기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천진과 상해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는 광동(廣東)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 광동의 호법 정부는 북벌(北伐)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사는 크게 낙심하여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여기서 인생의 큰 전기가 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게 되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창단된 이후 본격적으로 대규모 암살∙파괴 투쟁을 계획하여 실천하고 있었다. 김원봉은 3.1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한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로써 의열투쟁 단체를 조직하여 암살∙파괴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민중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구상 아래 김원봉은 1919년 11월 윤세주∙이성우∙곽경(곽재기)∙ 이종암 등의 동지들과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발족시켰다. 여기서 김원봉과 동지들은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열단 공약 10조]를 결의하였다.

①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히 실천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 단의(團義)를 앞세우고 단원의 의(義)를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하지(何時何地)에서나 매월 한 차례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하지에서나 부르면 반드시 응함

⑧ 피사(避死)치 아니하며 단의에 진(盡)함

⑨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를 배반하는 자는 처단하여 죽임

이 같은 공약을 결정하여 동지적 결합과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을 확인한 이들은 김원봉을 의열단의 의백, 즉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1920년 3월부터 의열단은 곽재기∙이성우∙신철휴∙윤세주 등의 핵심 단원들을 행동대원으로 국내에 잠입시켰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를 폭파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최초의 대규모 암살∙파괴 활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열단은 같은 해 9월 14일 박재혁(朴載赫)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였고, 또 12월 27일에는 최수봉(崔壽鳳)으로 하여금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게 하는 등 연쇄적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였다. 1921년에는 더욱 대담하게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이때 의사는 김원봉을 북경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조선의 독립은 2천만 민족의 10분지 8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우리는 이때에 선두에 나아가 희생이 됨이 마땅하다.”는 김원봉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의사는 의열단에 가입한 뒤, 조선총독부 폭파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일제의 문화통치가 허황된 것임을 세상에 알리다

폭발된 총독부 회계과장의 응접실 모습
폭발된 총독부 회계과장의 응접실 모습

의사는 1921년 9월 9일에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받고 즉시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결행하기 위해 나섰다.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여 의사는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양복 속에 폭탄과 권총을 감추고 9월 10일에 북경을 떠나 1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도 의사는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교묘히 부부 행세를 하여 기차 안에서 검문을 피했다. 폭탄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있어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편했지만, 남대문역에서는 동행하던 일본 여자의 3살짜리 아이를 안고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뒤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이태원(梨泰院)에 살던 아우 김준상(金俊相)의 집을 찾아가 하루를 묵었다. 이날 밤 아우와 3살짜리 딸을 데리고 살던 부인 송씨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여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다음날 아침 의사는 일본 전기 수리공 차림으로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 청사로 갔다. 그리고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위해 온 것처럼 대담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먼저 2층에 있는 비서과(秘書課)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會計課)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광음을 내며 폭발하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 왔다. 의사는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다.

이날의 거사는 대단하였다. 우선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맹렬하게 폭발하여 15센티나 되는 깊이로 마룻바닥이 팼고, 파편은 벽과 아래층으로 튀어 응접용 탁자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여러 개의 책상과 걸상이 파손되는 등 조선총독부 청사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물샐틈없는 경비가 한순간에 뚫려 식민통치의 심장부가 공격당한 사실이었다. 이로써 일제가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를 펴 식민통치체제가 안정되어 가고, 더 나아가 식민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수그러져가고 있다는 선전이 허황된 사실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의거 직후 의사는 이태원의 아우 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이튿날 평양(平壤)으로 몸을 피했다. 여기서 다시 일본 의복으로 변장하고 국경을 벗어난 뒤, 9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김약산을 만나 의거 사실을 보고하였다.

상해 황포탄 의거를 통해, 의열투쟁이 어떤 것인지 보여줘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반성하는 기색이 없자 의사는 재차 의거를 결심하였다. 그래서 1922년 2월 3일에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서 김원봉과 앞으로의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의사는 김원봉의 소개로 동지 오성륜(吳成崙)을 만났는데, 그때 마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방문한 뒤 3월 28일 상해로 온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의사는 크게 기뻐하여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다나카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상해 황포탄 의거를 함께한 김익상과 오성륜
상해 황포탄 의거를 함께한 김익상과 오성륜

다나카는 장주(長州, 조슈)군벌의 우두머리로 일제 군부의 거물이며, 평소 대외 침략정책을 강력히 주장하는 침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의사는 물론 동지들인 오성륜과 이종암이 서로 다나카 처단 의거를 결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김원봉과 논의 끝에 ‘명사수’로 알려진 오성륜이 제1선에서, 그리고 의사가 제2선에서,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제3선에서 순차적으로 권총과 폭탄으로 다나카를 응징하기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상해 황포탄 세관 부두에서 먼저 오성륜이 다나카에게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으나 앞서 나오던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맞고 말았다. 이에 다나카는 황급히 대기 중인 자동차로 도망치자 두 번째로 의사가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지만, 모자만 꿰뚫고 지나갔다. 의사는 다시 폭탄을 다나카에게 던졌으나 폭발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다나카가 탄 자동차에 던진 폭탄조차 바로 터지지 않자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 넣어 버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폭탄 사건이 일어난 상해 부두 모습
폭탄 사건이 일어난 상해 부두 모습

의거 직후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의사는 피신 중 추격하던 영국 경찰 톰슨이 쏜 총탄에 손과 발에 맞아 중국 순경에게 붙잡혔고, 이종암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피신 중에 벌어졌던 일화는 의열투쟁이 어떤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의사는 피신 중 중국 순경이 달려들자 그에게 총탄을 발사하였는데, 그것은 그를 향해 발사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발사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를 의사는 재판정에서, “우리에게 아무 관계도 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을 하기 위하여 쏜 것이오. 하늘을 향해 쏘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그때 총 쏜 흉내를 내며 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장이 “오성륜의 탄환이 전중 대장에게 맞았으면 그대는 폭탄을 던지지 아니할 생각이었느냐고 물으매, 아니오, 탄환이 맞더라도 나는 나의 폭탄을 전중에게 던지려고 작정하였소.”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의열투쟁이다. 침략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응징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것이 바로 의열투쟁인 것이다.

법정투쟁과 순국, 그리고 불타는 독립의지

나가사키에 도착한 김익상 의사의 사진
나가사키에 도착한 김익상 의사의 사진

피체된 의사에 대한 제1회 공판은 1922년 6월 30일 오전 9시 40분경에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마츠타(松田) 재판장과 이시카와(石川) 검사 입회 아래 열렸다. 이때에도 의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법정에 섰다. 당시 재판광경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김익상은 푸른 미결수의 옷을 입고 벙글벙글 웃는 낯으로 의기가 충천한 듯한 태도로 앉아서 자주 방청석과 신문기자 좌석을 돌아보며 은근히 눈인사를 했다.”라고 한다. 또 재판정을 들고날 때, 의사는 태연자약하게 말하기를 “나는 2년 전에 경성에서 철공장 직공 노릇을 하였는데, 중간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을 말함)에 가입하여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금년 정월에 상해로 와서 일본의 동지에게 전중 대장이 상해로 온다는 말을 듣고 암살을 계획한 것이며, 우리 동지는 3백 50명 가량인데 일본의 대관과 군인 윗 두목 가는 자를 암살할 목적이라. ‘우리는 한국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바’이니 이 일로 형벌을 당하게 되면 처음부터 달게 받은 셈 잡고 한 일이라.”라고 당당하게 밝혔으니, 그 담대함과 불타는 독립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더욱이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의 김익상, 제3의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무리 문화정치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나의 이번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고 하여, 일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러니 일제가 ‘의열단’이라는 말만 들어도 전율하였다고 하는 사실이 과언은 아니다.

김익상 의사 사형 언도
김익상 의사 사형 언도

나아가 일본인 검사 미요시(三好)가 “피고의 뒤에는 조선독립의용군(朝鮮獨立義勇軍)을 위시하여 독립단이 뒤를 이어 일어날 염려가 있으니 경한 형벌에 처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니 극형에 처하여 달라고 구형”을 하니, 의사는 태연히 웃으며 “극형 이상의 형벌이라도 사양치 않는다.”라고 공술하였다. 결국 의사는 9월 25일 나카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마츠타(松田) 재판장에 의해 무기징역을 받았고, 이에 불복한 검사 측의 공소로 11월 6일 오후 1시 열린 나카사키 공소원의 공소공판에서 모리(森) 재판장에 의해 사형을 받았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그랬던 것처럼 각본대로 진행되는 일제의 재판에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었고, 또 자신의 한목숨을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치기로 작정하여 추호의 미련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상고를 포기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의사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21년의 오랜 옥고를 치렀다. 그래서 의사는 28세의 나이로 의거를 결행한 뒤,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노년에 접어든 50세의 나이에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에 광분하던 일제가 의사를 가만둘 리 없었다. 의사가 귀향하고 얼마 안 있어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해 가더니, 어디선가 암살되고 만 것인지 종적이 묘연해졌던 것이다.

이처럼 의사는 불우한 처지에서 성장하면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철공소 공원과 연초회사 직원으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품었던 비행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섰다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이라는 더 큰 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원하여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결행하였고, 또 상해 황포탄 의거를 단행하였다. 의사는 의거 후 법정에서도 자신의 의거가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혔고, 그렇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의사는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일본 경찰에 의해 암살되어 순국하고 말았지만, 그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은 ‘유방백세(遺芳百世)’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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