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54
성명
한자 權用佾
이명 淸隱(號)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 1907년 의병에 투신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의 우군선봉, 도선봉

2. 1908년 6월부터 1908년 6월까지 제천(堤川), 보평(普坪), 연풍(延豊) 유치산(楡峙山), 죽령(竹嶺), 안동 서벽(安東西壁) 등지의 전투에서 좌군선봉 백남규(白南圭)와 함께 다대한 공을 세우고 수백명의 왜적을 도륙(屠戮) 포로(捕虜)

3. 1908년 이강년(李康秊)피포후 입경하여 전승지 김규환(金奎奐), 이범구(李範九), 김규철(金奎澈)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서 원세개에의 청병조서를 받아 출국중 발각되어 타 삼인은 체포되고 혼자 망명하여 해방때까지 망명생활하다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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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충북 제천(忠北 堤川) 출신으로 청풍(淸風)에서 살았고, 본은 안동(安東)이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에 투신하여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가담하여 처음에는 우군선봉(右軍先鋒), 후에는 도선봉(都先鋒)으로서 청풍과 충주(忠州)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6월 권용일은 원주(原州) 길에서 이강년을 처음 만났다. 이 때 이강년은 제천(堤川)으로 가다가 오석(烏石)에서 '윤기영(尹基榮)이 평창(平昌)으로 들어가 적 2명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서 원주 병영의 무기를 거두려고 종사(從事) 11인을 거느리고 원주로 가던 길이었다. 권용일은 국사가 이미 기울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하여 서울에서 내려오던 길이었다. 이들은 밤에 대평교(大平橋)로 들어가 윤기영을 만나 상세한 사정을 듣고 원주읍으로 들어가서 군기(軍旗)를 거두고 군대를 소모(召募)하였는데 무기는 독전장(督戰將) 이만원(李萬源)과 권용일이 배양산(培陽山)의 은밀한 곳에다 묻어 두었다. 7월 30일 권용일은 이강년의 명령을 받아 이만원과 함께 원주에 묻어 두었던 탄환을 다시 찾으러 떠났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제천 송수곡(松首谷)에서 1부대의 적을 만났으나 피하고, 또 청풍 후평(後坪)에서 순검 3인을 만났으나 또 잘 피하여 무사히 본진에 도착하니 온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그들을 칭찬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권용일은 우군선봉장, 그리고 이만원은 도총독장(都總督將)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 때 이강년 의진의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중 군 장 김상태(金尙台) 우군선봉 권용일(權用佾) 도총독장 이만원(李萬源) 전 군 장 윤기영(尹基榮) 우 선 봉 백남규(白南奎) 후 군 장 신태원(申泰元) 도 선 봉 하한서(河漢瑞) 우 군 장 이중봉(李重鳳) 후 군 장 정연철(鄭淵 )

1908년 8월 갈평(葛坪)으로 가서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수없이 노획하였다. 처음 이 전투는 김현규(金賢圭)와 조동규 등이 갈평에서 적을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이를 보고 받은 이강년은 그들을 구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우선봉 백남규로 하여금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갈평 남산으로 올라가게 하고, 그리고 우군선봉장 권용일은 수백 명을 거느리고 동산으로 올라갔다. 한편 총독장 이만원은 중앙으로 쳐들어갔다. 적들은 김현규와 조동규가 패하여 달아난 것만을 믿고 이강년 의진의 대군이 포위 습격하는 것을 모르고 마음놓고 휴식하다가 습격을 받고는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 일대에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산과 들에 가득 찼다고 한 것을 미루어 보아 당시의 격전상을 알 수 있겠다. 마을 사람들도 달아나는 적을 맨손으로 잡았으며, 각기 밥 광주리와 술병을 들고 나와 군사들을 대접하며 위로하는데 해가 저물고 밖이 어두워져서야 적의 유류품들을 거두어 용연(龍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밖에 8월에 있었던 주요 전투를 차례로 살펴보면, 문경 모항령(毛項嶺) 갈평(葛坪) 문경 대성사(大成寺) 문경 적성(赤城) 단양 유치(丹陽 楡峙) 영월(寧越) 덕포독산(德浦獨山) 등이다. 이러한 전투가 1908년 6월까지 꾸준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강년이 체포되고 기타 지역에서도 의병운동의 한계성이 드러나게 되자 권용일은 새로운 전략의 필요성을 느끼고 만주에서의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어야 함을 절감하였다. 이에 전 승지 김규오(金奎奧) 이범구(李範九) 김규철(金奎澈)과 함께 모의하고, 고종에게서 원세개(袁世凱)에의 청병조서(請兵詔書)를 받아 출국하였다. 그러나 출국 중에 발각되어 위의 3인은 체포되고 권용일 만이 홀로 망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광복될 때까지 정경노(鄭敬老)라고 변성명하고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운강선생창의일록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88 544 545 54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222 229 23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용일 자 : 경로(敬魯), 호 : 청은(淸隱) 충북 제천(堤川) 갈평전투, 서벽전투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북도 제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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