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통영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준비를 갖추어 갔다.
이때 그는 박성일(朴星日) 등 4∼5명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두 개를 만들어 3월 28일 통영장터에서 1,000여명의 군중을 인솔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4월 18일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형을 언 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월형이 확정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26년 서울에서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통영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다시 일경에 붙잡혀 .1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5월에는 신간회(新幹會)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군내 여러 섬으로 다니면서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였고, 1930년 2월 10일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9일간 구금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광복할 때까지 중요인물로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釜山·慶南 3·1運動史(3·1 同志會, 1979. 9. 20) 289·290面
- 判決文(1919. 5. 12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40·124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