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 1919년 남만에서
4. 중국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의주·창성(昌城) 등지에서 장원섭(張元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백삼규(白三圭)·전덕원(全德元) 등과 함께 환인현(桓仁縣)에서 농무계(農務契)·향약계(鄕約契) 등을 조직하여 동포들의 정착, 자치생활을 도모하고 아울러 독립운동의 항구적인 기반을 닦기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남만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서 박장호(朴長浩)·전덕원·백삼규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고 총참모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한편, 대한독립단이 연호(年號)의 사용문제로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열되었을 때에는 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김승학(金承學) 등과 함께 민국독립단에 가담하여 민국 연호의 사용을 주장하였으며 단체의 도총재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임시정부 평북 의주(義州)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장송암(張松岩)·백동규(白東奎)·박현환(朴賢煥) 등과 함께 일하였다. 그리고 동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평북독판(平北督辦)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0년 2월에는 평북독판부 직원이 대한청년단연합회 사무를 분담 집무하기도 하였으며, 그는 안병찬(安秉贊)·김찬성(金燦成)과 함께 서간도에서 한족회(韓族會)와 독립단(獨立團) 및 청년단연합회의 연결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서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할 때에는 평안북도 독판부 대표로서 김승만(金承萬)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였으며, 사령부가 성립된 후에는 광복군 참리부장(參理部長)으로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임시정부 국무원에 공채(公債)발행으로 군자금 모집 방안을 건의하는 등 독립군의 군수조달에 전념하였다.
그후에도 사망시까지 만주일대에서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년감 59·61·62·70·71·76·95·131·205면
- 고등경찰요사 21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2·39·58·61·189·211·251·252·254·257·258·425·433·457·467·478·479·496·531·543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55·5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5·55·142·1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0·3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25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56·245·264·265·267·665·6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