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심성지(沈誠之) 의진에 참가하여 서기(書記)로서 경북 청송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김숭진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더욱이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시행되자, 그것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런데 1896년 정월에 안동의병진의 유시연(柳時淵)이 포수 20여 명을 대동하고 청송으로 와 군기고를 습격하였으며, 외지에서 「격문(檄文)」이 내도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청송의 유생들은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1896년 정월 29일 심성지를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이 때 그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며 거의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2월 2일 청송의진의 참모와 서기 등 지도부를 선임하였는데 그가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3일부터 인근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군사를 훈련하는데 필요한 군량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5일에 모량도감(募粮都監)을 설치하고 각 문중에 할당하여 군자금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9일에 참모진을 구성하였는데, 김대락(金大洛)으로 중군장을 삼고, 남두희(南斗凞)로 우익장을 삼았다. 10일에는 참모 남승철(南升喆)을 사병도총(司兵都摠)으로 삼았다.
그 후 대구에서 일본군이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일 심성지 의병장은 중군장 김대락에게 포정(砲丁) 60명을 이끌고 가서 감은리(甘隱里)의 뒷산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래서 청송·의성·영천의 3의병진이 연합하여 마을 앞에 진을 치고 적들의 공격을 막았다. 의병진은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여 적병 7,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날이 저물자 적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그는 의병진의 서기로서 적병과 교전하여 뛰어난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청송의 의병진은 고종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려져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적원일기(필사본, 18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