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당하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평북 정주군 대전면(大田面)에 대명학교(大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 활동하였다. 그 후 1912년에는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자기 재산을 매도하여 6,700원을 임관호(林寬浩)·장관선(張寬善) 등을 통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또한 독립군 양성에도 뜻한 바 있어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 야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운영자금으로 8,000원을 모금, 한진석(韓晉錫) 등에게 송금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사유재산을 처분하여 그 금액과 모집한 군자금 5,300원을 휴대하고 만주에 건너가 한진석에게 수교하기도 하는 등 민족교육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3·1운동 당시에는 이승훈(李昇薰)의 연락으로 평북 정주·선천(宣川)·철산(鐵山)·양평(楊平)·신의주(新義州)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만주로 망명한 후에는 1920년 남만주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서 삼성학교(三成學校) 교직원으로 민족의식의 고취에 노력하는 한편 왕청문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전도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새배달신문사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재만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도 진력함과 아울러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최형구 등의 이러한 활발한 항일활동에 분개하여 1920년 10월 31일 소위 천장절(天長節) 축일(祝日) 행사라는 미명하에 최형구와 왕청문 교회의 장로인 이근진(李根眞)·전계도(田啓道)·임관호 등을 소환한 후 포박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이들 일행을 한적한 산중으로 데려가 검으로 살상하였는데 이 때 최형구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현대사자료(강덕상) 제28권 629·630면
- 독십신문(1920. 12. 18)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9·290면